영화사신문 제24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58 ~ 1959
프랑스 누벨바그에 ‘풍덩’
트뤼포의 등 칸영화제 누벨바그 작품 일색
프랑수아 트뤼포는 에서 자서전적인 작풍과 신선한 카메라워크로 주목을 받았다.
‘누벨바그가 몰려온다!’ 1959년 5월15일 폐막한 칸영화제를 다루는 언론들은 일제히 이같은 표제하에 새로운 영화의 등장을 알렸다. 누벨바그의 물결이 이번 칸영화제를 휩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수상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올해 황금종려상은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에 돌아갔다. 더욱 의미심장한 결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가 예상을 뛰어넘고 감독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영화계를 발칵 뒤집은 데 이어 1959년 <아르>에 프랑스 영화계를 비난한 글을 실은 감독의 ‘전력’ 탓에 영화계의 반발을 사 가까스로 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편 영화제 집행위원회가 미국의 반발을 우려해 비경쟁으로 돌린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또한 수상에서는 제외됐지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칸영화제는 그야말로 누벨바그의 잔치였다. 크로아제트에서 누벨바그영화들이 상영되는 동안 크로아제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라 나풀에서는 누벨바그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트뤼포, 로제 바댕,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로베르 오셍 등 20명의 젊은 감독들이 참석한 이 심포지엄에서는 누벨바그를 둘러싸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젊은 영화의 제헌의회를 만들자는 로베르 오셍의 제안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진작에 감지된 것인데, 이번 토론회 개최의 아이디어를 낸 감독들은 이미 얼마 전 ‘영화 디테일에 대해 전적으로 합의된 영역’과 ‘전적인 불일치의 영역’을 규정한 문서를 발표한 바 있다.
사실 ‘누벨바그’란 단어는 이번 칸영화제에서 새롭게 등장한 일군의 영화를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가 아니다. 1957년 <렉스프레스>의 기자였던 프랑수아 지루가 여론조사 결과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부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수사어가 바로 누벨바그였다. 이어 지루는 <누벨바그: 젊음의 초상들>이란 단행본을 출판했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세대의 가치를 표현한 대표적인 영화로 로제 바댕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를 들기도 했다. 이처럼 저널의 용어로 탄생한 ‘누벨바그’는 이번 칸영화제에서, 역시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를 계기로 새로운 영화사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거듭났다.
불경기 땐 관객을 자극하라?
저예산 공포·범죄 영화 등 틈새공략으로 큰 수익
‘선정영화’(exploitation movie)가 미국 극장가에서 선전하고 있다. 경영 침체에 빠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제작편수를 계속 줄여온 반면 독립영화 제작편수는 1958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65%를 차지할 만큼 증가해왔는데, 그중에서도 저예산 공포영화, 공상과학영화 등을 두루 포괄하는 선정영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독립영화사인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AIP는 특정 관객층을 겨냥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금요일 또는 토요일 밤이면 집에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껌을 씹고 햄버거를 우적거리고 먹는 청년들’이 바로 AIP의 주관객층. AIP는 공포영화, 청소년 범죄영화 등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선정적인 소재의 영화들을 수만달러의 예산, 1∼2주의 제작기간에 완성해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수익을 올렸던 장르는 몬스터영화. <해저괴물>(1954)로 데뷔한 이래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오며 AIP의 대표주자가 된 로저 코먼이 두각을 나타낸 것도 몬스터·호러 장르였다.
배급시장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AIP는 다양한 마케팅 방식을 개발했다. 곧 AIP는 영화제목, 포스터디자인과 광고를 관객과 상영업자들에게 시험해본 뒤에 각본을 쓰곤 했으며, 텔레비전에 광고를 내보내고 드라이브인을 첫 개봉관으로 고르는 등의 혁신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1부 <길의 노래> 내놓은 지 4년 만에 - ‘아푸 3부작’ 완성
1959년 인도 감독 샤티야지트 레이가 드디어 ‘아푸 3부작’의 마지막편인 <아푸의 세계>를 완성했다. 1955년 <길의 노래>를 내놓은 지 4년 만이다.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레이는 세계적인 감독이 됐고, ‘아푸 3부작’은 세계 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2부인 <아파라지토>가 195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그 영예의 절정이었다. 이렇듯 결과는 창대하지만 그 시작은 한없이 보잘것없었다.
장 르누아르의 촬영현장을 곁눈질하며 영화를 배운 그는 영화에 대한 애정만 가지고 3부작의 1부인 <길의 노래> 제작에 착수했다. 그가 끌어모은 스탭은 거의가 아마추어들이었다. 촬영기사는 전직 사진사였다. 그도, 촬영감독도 카메라에 대해 모르긴 마찬가지여서 촬영 첫날 결국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제 유명한 일화가 됐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대가로 융자받은 7천루피로 촬영을 시작한 그는 제작비가 바닥나자 평일에는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만 영화를 찍었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중엔 자신의 책과 가족들의 패물까지 팔아치웠다. 이렇게 4년간의 고투 끝에 완성된 <길의 노래>는 벵골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고 1956년 칸영화제에 출품돼 최고 휴먼 다큐멘트상을 수상했다.
“이제 몽타주는 필요없다”
다큐 <인디아>로 돌아온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잉그리드 버그만과 헤어진 충격 탓이었을까? <불안>을 마지막으로 버그만과 헤어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이 돌연 인도로 떠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인도에서 일어난 일을 네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인디아>에서 로셀리니는 어떤 결말도 내리지 않은 채 인간과 동물,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묵묵히 카메라에 담는다. <이탈리아 여행>(1953)이 혹평을 받았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 이 영화를 옹호했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 자크 리베트와 페뢰둔 오뵈다가 1959년 3월, 인도에서 돌아온 로셀리니를 만났다.
<인디아> 전체를 통해 스토리와 중심 메시지를 최소화하려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의도적인 것이었나. = 맞다.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때의 이점을 알게 됐다. 나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장 르누아르, 앙드레 바쟁과 나눈 인터뷰에서 당신은 몽타주를 공격했다. = 그랬다. 이제 몽타주는 필요없다. 사물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왜 그걸 조작해야 하나. 몽타주는 마술사의 모자 같다. 모든 테크닉을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비둘기, 꽃다발 따위를 꺼낸다. 난 그런 몽타주에 반대한다. 몽타주는 영화학교에서 기술로나 배우는 것이다. 물론 무성영화 시대에 몽타주는 필연적이었다. 몽타주 없는 스트로하임의 영화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가 찾아난 진정한 영화언어가 몽타주였다. 하지만 더이상 몽타주는 필요없다. 물론 내 영화에도 몽타주의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건 구성요소들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문제로서의 몽타주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몽타주는 기존의 관념과 상관없다는 말인가. = 그렇다. 내겐 미리 정해진 계획이 없다. 난 내가 본 것에 따라 작업한다. 어떤 사물이 눈길을 끈다면, 그건 그 사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요한 걸 보여줄 만큼 보여준 다음 커트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중요한 건 숏과 숏의 연결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을 하나의 이미지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앙드레 바쟁은 당신이 인간과 호랑이를 한 화면 안에 담아야 했다고 말하고는 했다. 당신은 이 둘을 분리해서 보여줬는데. = 바쟁의 관점에서라면 그의 말이 맞다. 흥분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한 화면 안에 이 둘을 함께 담는 게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내 영화는 그런 흥분이 필요없다. 나는 계산을 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걸 알면 그걸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다. 그게 전부다. 나는 미리 대상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고한 컨셉은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이지 이미지가 아니다.
영화감독에겐 신념이 중요하다는 말 같다. 질문을 좀 돌려보자. 플래허티의 작품 같은, 그런 통상의 다큐멘터리는 어떤가. = 내게 중요한 건 인간이다. 나는 영혼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을, 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물의 모든 의미를 표현하려고 했다. 어떤 사물이 의미를 갖게 된다면, 그건 그것을 보아주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면 내 안의 생각을, 인간의 마음을 포기해야 했을 거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 절박했다.
간단히 말해, 초기 네오 리얼리즘 정신으로의 회귀인가. =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주목! 이 사람- MGM 프로듀서 아서 프리드
“스탭을 알아야 작품이 산다”
MGM 뮤지컬 <지지>가 1959년 4월7일 열린 아카데미영화제에서 감독상, 최고작품상 등 9개 부문을 석권했다.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에도 MGM 뮤지컬만은 변함없이 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에서 <브로드웨이의 버클리가> <파리의 미국인> <사랑은 비를 타고> <밴드 웨건>을 거쳐 <지지>까지, MGM은 쉬지 않고 뛰어난 뮤지컬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프로듀서가 여기에 언급된 뮤지컬 전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로 아서 프리드(Arthur Freed)이다.
“프로듀서로서 아서 프리드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재능을 알고 재능을 인식하고 그런 재능을 자기 주위에 두는 것이다.” 아서 프리드에 대한 어느 영화인의 촌평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 아서 프리드는 MGM에 소속되어 있던 유능한 감독, 배우, 작가, 작곡가, 안무가들과 지속적인 유대를 맺었다. 이 ‘아서 프리드 사단’에 속하는 대표적인 감독이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 그리고 빈센트 미넬리다. 특히 미넬리와의 유대는 돈독해서 미넬리는 그의 모든 뮤지컬을 프리드와 함께 만들었다.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은 안무가 출신으로 감독을 겸하게 됐는데, 이처럼 안무가가 감독이 되는 것은 할리우드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안무가의 중요성을 알아본 프리드는 과감하게 이들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기는 배우, 작가와도 마찬가지. 프레드 아스테어는 프리드의 뮤지컬 6편에 출연했고, 앨런 제이 러너 등 몇명의 작가가 프리드가 제작하는 영화의 시나리오 대부분을 썼다. 이렇듯 아서 프리드는 휘하 스탭들의 능력을 제대로 보고 또 존중할 줄 알았다. 이는 그가 여느 프로듀서와는 달리 비즈니지맨이 아니라 작사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전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보드빌쇼에서 공연하고, 1차대전 뒤에는 작사를 시작한 그는 1929년 MGM과 계약을 맺은 이래 <브로드웨이 멜로디> 등의 가사를 썼고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로 <오즈의 마법사> 제작에 참여한 뒤 그만의 제작부를 꾸렸다. 이러한 제작라인을 거치면서 그는 뮤지컬 장르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단 신 들
<전함 포템킨> 베스트 오브 베스트
1958년 벨기에 시네마테크가 영화사가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한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 12편을 발표했다. 최고의 영화로 뽑힌 작품은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00표). <황금광 시대> <자전거 도둑>이 85표를 얻어 공동 2위에 올랐으며 <잔다르크의 수난> <위대한 환상> <탐욕> <편협> <어머니> <시민 케인> <대지> <마지막 웃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그뒤를 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자전거도둑> 등 유성영화가 겨우 3편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번 투표에는 존 그리어슨, 앙리 랑글루아, 아이리스 배리, 앙드레 바쟁 등 26개국 영화사가 117명이 참여했다.
<스팔타커스> 스탠리 큐브릭 손에
<스팔타커스>의 감독이 교체됐다. 1958년 2월 <스팔타커스>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인 커크 더글러스는 캘리포니아의 데스 밸리에서 촬영에 들어간 지 2주 만에 앤서니 만 감독을 해고하고 30살의 젊은 감독 스탠리 큐브릭에게 새로 메가폰을 맡겼다. 이에 대해 할리우드 일각에서는 과연 저예산영화 몇편을 만든 것이 고작이 이 신출내기 감독이 1200만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 대부 앙드레 바쟁 타계
1958년 11월11일, 프랑스의 평론가이자 영화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이 4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백혈병. 그는 투병으로 고생하던 말년에도 일주일에 한번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출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영화와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것이다. 1918년 앙제에서 태어난 바쟁은 10대 후반 <에스프리>에 실린 로제 레엔하르트의 영화평을 읽으면서 영화가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깨닫고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어 영화에 깊이 빠져든 그는 시네필이자 평론가로서 프랑스의 시네클럽 운동을 주도했고, 영화전문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