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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읽을 수 있는 영화,<도플갱어>
김현정 2003-10-07
■ Story

하야사키 미치오(야쿠쇼 고지)는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기계몸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한때 천재로 인정받았지만, 지금은 슬럼프에 빠져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처지다. 그런 하야사키 앞에 자신만만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도플갱어, 또 다른 하야사키가 나타난다. 하야사키는 도플갱어의 출현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욕망을 분출하는 그를 선망하고 질투한다. 하야사키와 도플갱어가 동시에 애욕을 느끼는 유카(나가사쿠 히로미)는 동생이 도플갱어를 대면한 뒤 자살한 인연으로 두 남자와 만나게 된 여인이다. 하야사키는 유카와 조금 멍청한 청년 기미시마와 팀을 이루어 외딴 작업실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점점 더 도플갱어에게 의존하게 된다.

■ Review

도플갱어는 살아 있는 영혼(生靈) 혹은 분열된 자아가 만들어낸 분신을 뜻하는 독일 민담 속의 존재다.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면 죽게 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속설. 그 자신조차도 샅샅이 파헤쳐 들여다보거나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 뒷모습을 드러내는 도플갱어는 이름만 바꿔가면서 여러 나라 전설에 등장했고, 소설과 영화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도플갱어>는 아마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하면서 솔직한 해석을 내린 영화 중 한편이 아닐까 싶다. <도플갱어>를 만들기 전에 이미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다. 함께 존재하고 변해간다”고 말했던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번엔 유령 대신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을 손에 쥐고 날카로운 메스로 활용했다. 그 칼날 밑에서, 하야사키와 주변 사람들은 추악한 내장을 쏟아내지만, 또한 덜어낸 무게만큼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큐어> <카이로> <지옥의 경비원>처럼 주로 공포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들은 연쇄살인이나 유령, 광기가 표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영화들을 보면서 정작 두려워 외면하고 싶어지는 대상은 우리의 마음이었다. 꼭 눌러담았던 증오가 나른한 최면을 타고 경동맥을 자르는 칼날로 비져나오는 <큐어>나 공포에 이끌리고 함몰되는 이들은 영원한 그림자에 갇혀버리는 <카이로>처럼. 장르만 따져본다면 <도플갱어>는 공포영화라고 할 수 없겠지만, 충격의 근원만은 전작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몇번이고 스패너를 내리치며 도플갱어를 때려죽이는 하야사키가 웃는 얼굴로 삽을 휘둘러 한 남자를 살해했던 도플갱어와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유카는 동생의 도플갱어라도 곁에 머물러줬으면 했지만, 그가 전처럼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하야사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유카는 동생의 살인을 청부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도플갱어>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의 도플갱어는 물에 녹은 소금처럼, 더이상 서로가 서로를 분리해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그것은 한 사람만 존재하는 유카도 마찬가지다.

<도플갱어>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진 <카이로>보다도 한발 더 일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 자신의 얼굴을 짓뭉개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주변 사람들은 한때 분명하게 달랐던 두명의 하야사키를 더이상 구분하지 못하고, 도플갱어는 네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자고 숨을 조여온다. 그 때문에 <도플갱어>는 잔인하나 엄격했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전작들과 달리 혼란스럽다. 전작은 눈치채지 못했던 일상의 공포를 끄집어냈지만, 이번엔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예상을 뒤엎는 적도 많다. 하야사키의 친구 무라카미는 새롭게 태어난 하야사키에게서 그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성찰을 시작하려는 순간 꼭 인형처럼 트럭에 치어 날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도플갱어>는 하나의 합성화면이 세개로 분할되고 다시 두개로 줄어드는 식의 정교한 연출을 과시하기도 한다. 두명의 하야사키는 각기 다른 화면에 담기지만, 그중 한명은 또다시 둘로 나뉜다. 자기 것이라 믿었던 세계에서마저도, 하야사키는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큐어>에서 사교의 전도사로 변해가는 형사 다카베를 섬뜩하게 연기했던 야쿠쇼 고지는 앞면과 뒷면처럼 상반되는 듯했다가 서서히 하나로 융합하는 두 얼굴을 플라스크를 든 과학자처럼 능숙하게 분리하고 용해한다. 하야사키는 선하지 않고, 도플갱어는 악하지 않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도, 야쿠쇼 고지에게도, 도플갱어는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다. 접힌 채 보이지 않았지만 언젠가 받아들이고 말았을 주름진 마음이다. 이처럼 떨쳐내고 싶은 이야기일지라도 <도플갱어>는 희망을 읽을 수 있는 영화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기미사미를 댐 아래로 밀어버린 하야사키는, 굳이 말하자면 진짜 하야사키는, 죽는다. 그는 변했고 복수나 기억에 연연하지 않는다. 2천만엔을 버리고 스스로 얼굴을 바꾸고 떠나는 하야사키는 상자 속에 갇힌 것 같은 세상에서도 틈새로 새어드는 빛을 던진다.

:: 배우들

두얼굴 사나이 야쿠쇼 고지

<도플갱어> 오프닝 시퀀스는 야쿠쇼 고지의 두 가지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는다. 도플갱어의 출현으로 인한 혼란과 탐욕, 변화를 그처럼 선명하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야쿠쇼 고지가 유일하지 않을까. TV드라마와 연극에 주로 출연하던 야쿠쇼 고지는 이타미 주조의 <담포포>를 시작으로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애매한 인상을 가진 그는 <쉘 위 댄스?> <쥬바쿠> <우나기> <실락원> 등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들에 출연하며 지금까지도 ‘국민배우’로 자리잡고 있다. 하야사키의 동료 무라카미를 연기한 에모토 아키라로미는 금세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배우일 것이다. 탐욕으로 추락해가는 모습이 낯설지만, 그는 수오 마사유키의 <쉘 위 댄스?> <으랏차차 스모부> 등에 마음 좋은 아저씨로 출연했던 배우. 최근에는 <워터보이즈>에서 여장남자로 등장해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어리숙하다가 무섭게 돌변하는 청년 기미시마 역의 유스케 산타마리아는 한국에서 같은날 개봉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도 준세이의 친구로 얼굴을 내민다. 라틴록 밴드 빙고빙고 보컬로 연예계에 발을 딛었으며 TV시리즈 <춤추는 대수사선>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젊은 배우. 두명의 하야사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유카는 나가사쿠 히로미가 연기했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벌써 서른을 넘긴 나가사쿠 히로미는 오랫동안 구로사와 기요시의 팬이었다고. 상대역인 야쿠쇼 고지와는 올해 7월 연극 <두 번째 사랑>에서 다시 한번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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