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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부터 열리는 빔 벤더스 걸작선
홍성남(평론가) 2003-06-13

길 위의 시인, 도시와 영화에 관해 읊조리다

빔 벤더스 걸작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6월13일부터 19일까지 열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빔 벤더스의 초기작 <도시의 앨리스>(1970)의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 필립이 “잃어버린 세상”이란 헤드라인이 붙은 존 포드의 부고 기사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은근슬쩍 암시하고 있듯 벤더스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랬듯 존 포드를 흠모하고 존경한 영화감독이었다. 사실 그는 몇몇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과거에 존 포드가 영화를 통해 이뤘던 것을 그보다 이후의 영화로 재창조해낸 시네아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포드가 스크린 위에 그려놓은 것이 미국의 과거 세계의 풍경화였다면 벤더스가 자신의 캔버스 위에 펼쳐놓은 것은 현대사회의 씁쓸한 풍경화였다. 뿌리없고 외로운 사람들의 길 떠남을 카메라로 기록함으로써 창조된 황량하면서도 시적인 현대사회의 풍경화.

주지하다시피 벤더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대사회의 풍경화란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 법한 고독과 소외, 불안 그리고 그런 마음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여행 등을 소재로 그려진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대단히 감각적으로 구축된 이미지와 음악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보태야 할 것이고, 또 포드와 앤서니 만, 니콜라스 레이로부터 배운 영화에 대한 미국적인 이상과 로베르 브레송과 오즈 야스지로 등으로부터 배운 할리우드영화와는 다른 식의 영화에 대한 접근을 추가해야 할 것이며, 배타적으로 특히 영화를 통해서만 과거와 사회를 사유하려는 태도와 그것의 연장인 이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벤더스의 풍경화를 이루는 이런 요소들이 아름다운 결합을 이뤄낼 때 그는 예컨대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 <파리, 텍사스>(1984), <베를린 천사의 시>(1987) 같은 매혹적인 영상시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럼으로써 벤더스는 뉴 저먼 시네마 멤버들 가운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영화감독이라 불릴 수 있게 되었고 ‘스타감독’이란 칭호를 들어도 될 만한 영화감독이란 특별한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세상 끝까지>(1991)에서부터 <폭력의 종말>(1997), <밀리언 달러 호텔>(2000)에 이르는 벤더스의 비교적 최근작에 속하는 영화들이 그의 행보를 주시하던 이들의 기대를 꺾어놓은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샤를 테송이 최근의 벤더스의 행보를 언급하며 벤더스는 자신을 실망시킨 시네아스트들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벤더스는 예술로서의 영화와 상품으로서의 영화, 할리우드식의 영화와 유럽적인 예술영화, 혹은 미국적 감수성과 유럽적 감수성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들을 동력으로 삼아 종종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머리를 자극하는 영화들을 만든 드문 시네아스트임을 깡그리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그 벤더스의 매혹적인 세계를 탐사해볼 기회가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 빔 벤더스 걸작선 상영시간표 ]

<빗나간 행동>

Falsche Bewegung / Wrong Movement | 1975년 | 컬러 | 103분출연 뤼디거 포글러, 한나 쉬굴라, 나스타샤 킨스키

<빗나간 행동>은 <도시의 앨리스> <시간의 흐름 속에서>와 함께 이른바 ‘로드무비 3부작’을 이루는 영화들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영화이며 그것들 가운데 유일하게 컬러로 찍은 영화이다. 벤더스의 말을 빌리자면, “관계의 불가능성”과 “독일에서의 고독”에 대한 영화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주인공 빌헬름의, 알고보니 ‘빗나간 행동’에 불과한 여정을 따라간다. 벤더스의 ‘동료’인 페터 한트케가 쓴 시나리오의 원천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영화는 괴테의 고전 교양소설과 많이 겹치지는 하지만 미묘한 점에서 원작과는 다른 식으로 ‘성장’ 이야기에 다가간다. 이를테면 영화의 빌헬름은 원작의 그와는 달리 교육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식이다. 그래서 평자들은 종종 <빗나간 행동>에 대해 반교양소설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미국인 친구>

Der Amerikanische Freund / The American Friend | 1977년 | 컬러 | 123분

출연 브루노 간츠, 데니스 호퍼, 리사 크로이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1951)나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1960) 같은 영화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이스미스의 오랜 숭배자인 벤더스가 그녀의 톰 리플리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리플리의 게임>을 영화화한 작품이 바로 <미국인 친구>이다. 영화는 리플리라는 미국인과 그로 인해 살인의 덫에 걸리고 마는 독일인 조나단의 이야기를 그린다. 장르를 따져볼 때 <미국인 친구>는 분명히 스릴러에 속할 만한 영화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서스펜스를 강조하기보다는 명상적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다소 느린 리듬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는 스토리의 구성보다는 사운드와 색채를 표현주의적으로 이용하는 형식적 측면을 통해 긴장을 유발하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벤더스의 오랜 소망을 실현케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영화다.

<물 위의 번개>

Nick's Film: Lightning Over Water | 1980년 | 컬러 | 90분

출연 니콜라스 레이, 빔 벤더스

존 포드 외에 벤더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미국의 영화감독은 니콜라스 레이였다. 레이에 대한 벤더스의 흠모가 어느 정도 특별한 것이냐고 하면 벤더스는 레이를 두고 ‘영화의 발명가’라고 부를 정도였다. “레이는 정말이지 영화를 발명했다. 그렇게 한 감독은 많지 않다.” <물 위의 번개>는 벤더스가 프랜시스 코폴라의 초청을 받아 <해밋>을 만들러 할리우드에 갔으나 영화제작이 잘 진척되지 않을 때, 같이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레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든 영화다. 암으로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레이에 대한 기록과 픽션이 섞여 있는 이 영화는 예술의 가치, 희구와 죽음의 문제 등을 다룬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물 위의 번개>는 관객에게 불편한 관음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논란을 사기도 했다. 예컨대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레이에 대한 이 슬픈 기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인가, 하고 의문을 표시했다.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 1984년 | 컬러 | 145분

출연 해리 딘 스탠튼, 나스타샤 킨스키, 헌터 카슨

극작가이면서 배우이기도 한 샘 셰퍼드와 벤더스의 만남은 벤더스가 <해밋>을 만들려고 했을 때 처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 이뤄질 수도 있었을 두 사람의 협업은 당시 돈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파리, 텍사스>가 영화로 만들어질 때까지 미뤄지게 된다. <파리, 텍사스>는 셰퍼드의 <모텔 크로니클즈>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미지의 장소에서 갑작스레 나타나 사막을 지나 문명 속으로 들어온 한 남자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를, 벤더스는 로비 뮐러가 찍은 비주얼과 라이 쿠더의 음악을 주요한 도구삼아 완벽하게 아름다운 고독과 상실의 풍경화로 만들어냈다. <파리, 텍사스>는 벤더스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영화인데, 그건 꼭 이것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해 벤더스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전까지 철저히 남성중심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벤더스가 여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영화가, 그리고 그간 ‘스토리의 실종’을 선호했던 벤더스에게 스토리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영화가 <파리, 텍사스>이다.

<도쿄가>

Tokyo-Ga | 1985년 | 컬러 | 92분

출연 류치슈, 야쓰다 유하루, 베르너 헤어초크

벤더스는 언젠가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를 두고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물을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건 옳은 일이다. 사물들을 보여줌으로써만이 그것들을 좀더 잘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즈가 내게 가르침을 준 유일한 영화감독인 이유이다.” 벤더스는 오즈의 자취가 아직 남아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도쿄가>이다. 영화엔 오즈와 함께 일했던 촬영감독 아쓰다 유하루, 그리고 배우 류 치슈와의 인터뷰 장면도 담겨 있지만 그렇다고 <도쿄가>가 오즈라는 한 위대한 감독에 대한 단순한 다큐멘터리인 것은 아니다. 벤더스는 진열용 식품을 만드는 공장이나 파친코장을 관찰하며 한 도시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을 수행하는가 하면 우연히 크리스 마르케, 베르너 헤어초크와 만나 순수 이미지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기도 한다. 벤더스 자신이 본 것과 생각한 것을 구조와 관계없이 적었다는 점에서 <도쿄가>를 두고 그는 적절하게도 ‘필름 다이어리’라고 불렀다.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uber Berlin/Wings of Desire | 1987년 | 컬러,흑백 | 126분

출연 브루노 간츠, 솔베이그 도마르탱, 피터 포크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를 두고 자신의 ‘미국 시기’를 마감하는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해밋>을 만들려고 한 때부터 <파리, 텍사스>에 이르기까지 꽤 오랫동안 미국과 또 다른 나라에서 영화작업을 했던 그는 1985년 가을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베를린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을 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천사의 시선을 통해 베를린이란 도시의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의 풍경 모두에 적극적으로 들어가보려는 벤더스의 의도(혹은 의지)로 만들어진 한편의 시 같은 영화다. 한편으로 이것은 사운드의 중첩이라든가 흑백과 컬러를 내러티브의 요구에 맞게 활용하는 방식 같은 형식의 창의적 활용으로도 눈여겨볼 만한 영화이기도 하다. 93년에 벤더스는 비슷한 형식을 이용해 이번에는 다미엘(브루노 간츠)이 아니라 그의 동료 카시엘(오토 잔더)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속편을 만들기도 했으나 이것은 전편이 이룬 성과에 훨씬 못 미치는 실패작이었다.

<도시와 옷에 대한 노트>

Aufzeichnungen zu Kleidern und Stadten/Notes on Cities and Clothes | 1989년 | 컬러 | 79분

출연 야마모토 요지, 빔 벤더스

벤더스는 언젠가 자신이 사입은 재킷이 마치 갑옷을 입은 기사가 된 듯 보호를 받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옷은 야마모토 요지라는 의상디자이너의 레이블을 단 것이었다. 그래서 퐁피두센터로부터 패션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벤더스는 일본으로 가 야마모토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쿄가>가 오즈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듯이 일본에서 만든 또 다른 ‘필름 다이어리’인 <도시와 옷에 대한 노트> 역시 단지 패션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진 않았다. 여기서 벤더스는 야마모토를 하나의 매개로 삼아 패션과 도시만이 아니라 창작 과정, 정체성, 디지털 시대 등에 대한 사고를 풀어놓으려 한다.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벤더스의 최악의 작품을 고른다면 이 영화나 아니면 <이 세상 끝까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보는 이들에게 사고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영화임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리스본 스토리>

Lisbon Story | 1994년 | 컬러 | 105분

출연 뤼디거 포글러, 패트릭 바우차우

<해밋>의 제작이 연기되는 동안 벤더스는 상업적인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영화 <사물의 상태>(1982)를 만들었는데, <리스본 스토리>는 바로 그 영화의 연장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할 만한 영화다. 전작처럼 여기에서도 벤더스는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사물의 상태>에서 영화감독 역을 맡았던 패트릭 바우차우가 <리스본 스토리>에서도 같은 이름의 영화감독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무성영화를 만들려다가 창작의 위기를 맞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진 감독과 그로부터 전갈을 받고는 그를 찾으러 리스본에 간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그 안에다가 리스본이라는 도시의 매혹을 비추는가 하면 순수한 영화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도 담아낸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긴 했지만 <리스본 스토리>는 80년대 후반 이후 영 실망스러운 벤더스의 일련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