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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
2003-05-27

무기력한 젊음, 미래는 있는 걸까?

20대 초반의 한 여자가 뛰어간다. 춤을 추듯 손을 흔들고 가끔 뒤돌아 보며 웃는다. 긴 터널 속을 혼자 가는 게 어딘지 불안하지만, 상관없다는 듯 계속 웃는다. 배경음악은 경쾌한 테크노풍이고 화면은 핸드 헬드 카메라로 가볍게 흔들린다. 독백이 흐른다. “그녀의 이름은 비키. … 그녀에겐 ‘하오하오’라는 연인이 있다. 그녀는 하오하오와 헤어지고 싶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다짐했다. 예금해둔 돈을 다 써버리는 날, 그를 떠나리라고…. 이것은 세계가 축제로 들떠 있던 10년 전, 2001년에 일어난 일이다.”

매력적인 출발이다. 스산하면서도 따듯하다. 이어 독백의 내용의 재연된다. 비키는 고등학교 때 같은 또래의 하오하오를 만나 동거에 들어가면서 졸업을 못했다. 하오하오가 집에서 훔쳐온 시계를 판 돈으로 살다가 돈이 떨어지자 비키는 나이트클럽 접대부로 나간다. 비키와 하오하오의 일상은 지루한 다툼의 연속이다. 여전히 백수인 하오하오는 비키에게 질투를 해대고, 비키가 떠나려 하면 붙잡고 매달린다. 모질게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오하오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비키는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 중간 보스 잭을 만난다. 나약한 하오하오와 달리 잭은 넓은 품으로 비키에게 위안이 돼주지만 조직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돌아간다.

<밀레니엄 맘보>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얼핏 <첨밀밀>과도 닮은 데가 있다. 철없는 나이에 동년배와 애정을 나누다가 어른이 된다는 것의 무게감을 버텨내지 못하고 삐걱댄다. 여자에게 폭력조직의 중년 남자가 다가온다. 밑바닥에서 인생의 역설을 다 알아버린 이 남자는 여자의 치기와 속좁음을 다 포용해주지만 그 만남은 시한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첨밀밀>의 장만위(장만옥) 리밍(여명)이 밝고 생기있는 데 반해, 비키와 하오하오의 청춘은 어둡고 무기력하다. 왕자웨이(왕가위) 영화 같았던 도입부와 달리, 비키의 집을 비출 때 고정된 장면이 허우샤오셴 감독의 전작 <비정성시>보다도 길다. 그 롱숏 안에서 비키가 옷 갈아입고 욕실에 목욕하러 들어가는 일상사가 여러차례 되풀이된다. 등장인물도 단출하고, 별다른 기교도 없다.

젊음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기성세대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시간은 현재보다 미래를 위해 바쳐야 마땅하다. 하물며 그 룰에서 벗어난 청춘에게, 시간은 그냥 버텨내기에만도 힘든 지루한 것일 수 있다.

영화가 독백을 통해 10년 뒤에 회상하는 형식을 취한 건, 향수라는 당의정을 빌리기 위한 게 아니다. 그건 일종의 위로로 보인다. 그 비키가 10년 뒤에도 살아서 담담하게 젊은 날을 돌이켜 본다. 그 미래의 존재감이 이 음습한 청춘에 온기를 준다.

유장한 호흡으로 대만의 역사와 인간을 얘기해온 허우샤오셴은 <해상화>를 거쳐 이 영화에서 더 미니멀해졌다. 이렇다할 일이 벌어지지 않는 화면을 오래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캐릭터의 육체성이 살아난다. 영화에서 비키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기까지 하지만, 어떤 설명이나 예측 안에 포획되지 않는다.

그 캐릭터에 대한 연민은, 자유에의 희구를 수반한다. 롤링 스톤스의 <루비 튜즈데이>나 비틀스의 <노르웨의 숲> 노랫말에 나오는 여자 같다. 비키 역의 수치(서기)는 다른 어떤 영화에서보다 매력적이다. “여자가 남자 같아지고, 남자는 울보가 되는 세태가 개탄스럽다”고 말하는 55살의 가부장적인 그가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게 신선하다. 30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