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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영화10 년,충무로의 빅뱅을 돌아보다(2)
2002-07-26

좋은 기획 있으면 소개시켜줘,제발!

<결혼 이야기>가 빅뱅이었다

92년 기획한 <결혼 이야기>는 가장 일상적인 부부관계의 내밀한 구석을 들춰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 한국영화의 주소비층이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 도시 여성을 타깃으로 삼았던 이 작품은 동시대인 90년대형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트렌디코미디였지만,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됐던 성담론이나 여성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스쳐지나가 나름의 사회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때문에 신씨네는 10여쌍의 부부를 밀착 인터뷰해 그들의 상세한 삶을 알아냈고, 가전회사 등의 협찬을 받아 주관객층에 소구할 만한 스타일의 화면을 구성했다. 관객의 취향과 성향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해, 관객의 눈높이에 맞도록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결혼 이야기>는 본래 의미에서의 기획영화로서는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김혜준 정책연구실장은 “이전까지의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은 시대가 변화하고 표현의 자유도 확대된 환경을 이용하지 못했고, 할리우드 직배영화에도 익숙해진 관객의 눈높이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 이야기>는 관객의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해냈다”고 설명한다.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원색의 소파, 파스텔색 조명, 자동응답전화기, 캔맥주 등 관객층이 갖고, 살고 싶어하는 분위기의 인테리어나 소품들을 배치했다. 이런 아이콘을 통해 트렌드를 이끌어나간 점은 놀랍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산업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익영영화사의 박상인 대표는 기획의도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제작을 전적으로 신씨네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대신 익영영화사는 지방배급업자와 영화업에 막 뛰어든 삼성으로부터 제작비를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결혼 이야기>는 투자와 제작의 분리라는 현재 충무로에 일반화된 제작방식이 시도된 첫 작품이었을 뿐 아니라, 대기업이 한국영화에 직접 투자한 첫 케이스이기도 하다. 삼성은 이 영화의 비디오 판권 비용을 미리 지급해 그동안 외화 수입에만 머물던 대기업의 한국영화 투자를 촉발시켰다. 사실 영상산업을 차세대 업종으로 염두에 뒀던 대기업들은 막상 충무로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충무로의 기존 제작사들의 경우 지방 배급사들과 탄탄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탓에 굳이 외부의 자금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향후 배급 등의 분야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을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충무로의 자금줄과 돈독한 관계를 맺지 못한 신생 제작·기획사와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 대기업과의 결합은 기획자들의 입지를 좀더 넓혀줬다. 지방흥행업자나 지방 극장주들로부터 주문받은 작품을 만들다보니 창작욕이 꺾이고, 지방 수입이 제대로 정산되지 않다보니 열심히 일한 대가를 챙기지 못했던 이전 세대들과 달리, 기획자들은 자신이 보고 컸던 유럽, 할리우드영화처럼 제작하겠다는 의욕을 갖게 됐고, 금전적인 보상에 대한 기대도 품을 수 있었다.

△ 신씨네의 영화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과감한 추구의 복고적 기획, 하이 트렌디물 사이를 오가며 만들어져 왔다. <구미호>와 <은행나무 침대>는 이소룡

부활 프로젝트 <드래곤 워리어>로 이어지고 있으며, <결혼 이야기>는 <엽기적인 그녀>에 와서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결혼 이야기>가 남긴 더욱 중요한 성과는, 이 영화의 제작을 계기로, 그리고 이 영화의 성공에 자극받은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충무로로 진출했고 혁혁한 성과를 올림에 따라, 이후 한국영화계의 등뼈 구실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연출자 김의석 감독과 시나리오를 쓴 박헌수 감독은 물론이고, <결혼 이야기>에서 제작지휘를 맡았던 오정완(영화사 봄 대표), 이 영화 크랭크인 직전 영입된 유인택 대표 등이 그들. 당시 마케팅을 책임지던 심재명 대표는 ‘잘까 말까 끌까 할까’, ‘남주기 아까우니 우리 결혼하자’처럼 눈에 척척 감기는 카피를 뽑아내 영화의 성공에 결정적인 공헌을 세우기도 했다.

<결혼 이야기> 개봉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에 착수한 신작 <미스터 맘마>의 연출자는 강우석(시네마서비스 대표) 감독, 시나리오 작가는 김형준(한맥영화사 대표)씨, 제작실장은 차승재(싸이더스 대표)씨였다. 한편 당시 신씨네에는 3세대 프로듀서라 할 수 있는 이문형(전 LG 미디어 영화팀장, 라이트하우스 프로듀서), 권병균(시네마서비스 한국영화팀 실장), 김선아(싸이더스 프로듀서), 김무령(싸이더스 프로듀서)씨 등도 있었다. 또 91년부터 유인택, 이춘연씨 등이 이끌던 ‘한국영화 기획실 모임’의 구성원이던 안동규(영화세상 대표)씨를 비롯해, 권영락(씨네락 픽처스 대표), 소병무(동아엔터테인먼트 이사), 김미희(좋은영화 대표), 지미향(필름매니아 공동대표), 정승혜(씨네월드 이사)씨 등 영화사 기획실 직원들도 훗날 프로듀서로 영화계로 뛰어든다. 또 비슷한 시기 활동하던 영화홍보사 영화기획정보센터에서는 노종윤(전 삼성영상사업단 대리, 싸이더스 이사), 조민환(나비픽처스 대표)씨 등이 배출된다.

이렇듯 <결혼 이야기>에서 본격화한 기획영화가 한국영화계에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족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까지 영화교과서에나 등장하던 프로듀서 시스템이 한국영화에도 비로소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이전까지 영화사는 자본에서부터 제작까지 아우르는 사장과 제작 실무를 총괄하는 제작이사, 제작실장, 제작부장, 경리 등 4∼5명에 불과한 구성이었다. 결국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기획이라는 업무는 감독 스스로가 알아서 했거나, 사장인 제작자가 일부 관여하는 초보적 형태에 불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기획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관객의 눈높이에 맞는 영화를 개발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마케팅하는 데까지 포괄하는 기획이라는 업무는 가장 중요한 일로 떠올랐다. 결국 자본을 직접 꾸리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조달하는 대신, 기획자 또는 제작자가 작품에 집중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시스템이 비로소 갖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90년대 후반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넓혀놓은 한국영화의 마당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세대 프로듀서 3인 인터뷰-황기성사단

대표 황기성

“상업영화란 말에 떳떳해지자”

62년에 충무로에 들어와 40년 동안 영화를 기획해왔는데, 전문 프로듀서 1세대로서 10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른바 ‘기획영화’들을 어떻게 보는가.

→ 기획영화라는 말이 뭘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상업영화는 항상 시류나 시의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프로듀서가 감독과 대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상업영화의 기본이다. 예전에 비해 프로듀서의 역할이 부각된다는 건 상업영화의 숙명이다. 다만 80년대 후반부터 충무로에 엘리트 코스를 거친 고급인력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을 개선해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크린쿼터 사수운동을 펼쳤고, 영화법을 영화진흥법으로 바꾸고, 검열을 없앴다. 그걸 바탕으로 영화산업이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제작자 혼자 다 하던 투자, 제작, 배급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황기성사단도 90년대 들어서서 <닥터 봉> <고스트 맘마> 등 트렌디한 기획영화를 만들었다.

→ 갑자기 기획영화를 했다기보다, 기획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관객의 취향이 빨리 변하고 젊은 세대가 문화소비의 중심에 서니까. 80년대 초에는 암울한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꿈이라는 걸 기획포인트로 <고래사냥>을 만들었고, 80년대 후반에는 청소년에게 성적을 너무 강요하는 교육현실을 겨냥해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만들었다. 그래서 성공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젊은이들은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관객의 공통분모를 찾기 쉬웠다. 지금 젊은이들은 백인백태다. 시류를 읽기가 힘들다. 나도 그걸 읽기 위해 사고하고 행위하고 있다.

한국 영화산업이 최근 급속히 커지면서 질적으로도 많이 변화했다.

→ 전문성 있는 프로듀서가 수적으로 부족하다는 게 산업적으로도 큰 문제다. 지금 한국영화는 평균제작비의 상승 때문에 문제가 크다. 투자의 위험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정적으로 투자할 만한 프로듀서가 몇이나 있는가. 그러나 여건은 좋아졌다. 투자, 배급, 제작이 분리돼 제작기획에 여유가 생겼다. 나는 <세이 예스>부터 제작만 했다. 그전에는 다 해야 했다. 좋은 시대다.

후배 프로듀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나는 상업영화라는 말을 떳떳하게 쓰기를 바란다. 나는 예술성보다 오락성을 중시한다. 왜 나보고 칸영화제에 안 가려 하냐고 물으면 내게는 안 맞는 질문이다. 나는 그런 데 매력 안 느낀다. 일반 대중과 호흠을 나누는 게 재밌다. 그러나 상업영화라도 문화상품으로서의 품격은 지켜야 한다. 예술영화뿐 아니라 상업영화 프로듀서도 흥행과 관계없이 관객에게 책임을 지고 자기 신뢰를 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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