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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하경 여행기’ 이나영, 채움보다 비움
조현나 사진 백종헌 2023-05-23

"숙제하듯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나의 정신과 마음이 쉴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주는 거지. 그런 면에서 당일치기 여행의 매력에 설득이 됐다."

- 평소에 영화를 많이 보지 않나. 최근엔 어떤 영화로 일상을 채워나갔는지 궁금하다.

= 우선 기다리던 다르덴 형제의 신작 <토리와 로키타>를 극장에서 봤고 <컴온 컴온>도 재밌게 봤다. 그리고 예전에 즐겁게 봤지만 기억에서 흐릿해진 작품들, <파니 핑크> <체리향기> <팬텀 스레드> <갈매기> 등을 관람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작품들을 무작위로 보는 편이다. 영화는 내가 숨 쉴 수 있는 일종의 창구고, 그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 여러 시나리오들을 읽었을 텐데 그중 <박하경 여행기>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 극의 구성이 신선했고 시나리오도 재밌었다. 대부분 캐릭터의 히스토리가 짜여져 있기 마련인데 <박하경 여행기>는 ‘내가 별로 할 게 없겠는데’ 싶을 정도로 설정이 적었다. 처음엔 접근하기 쉽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너무 어렵더라.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내레이션과 대사의 느낌, 의상 등에 관해서 이종필 감독님, 손미 작가님과 대화를 나눴다. 재밌었던 건 미팅을 갖기 전에 에릭 로메르 감독의 <해변의 폴린>을 보면서 내용은 달라도 <박하경 여행기>와 결이 유사하다고 느꼈는데, 미팅 자리에서 감독님도 에릭 로메르의 작품들을 말씀하셨다는 거다. 생각한 그림이 비슷하구나 싶었다.

-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종필 감독이 “박하경 캐릭터와 이나영 배우가 비슷한 점이 정말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에 공감하나.

= 내가 이해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나를 통해 나온 인물이니까, 기본적으로 ‘나’라고 생각하긴 한다.

- 하경의 전사가 워낙 짧게 등장해 이에 관해 배우가 생각해둔 바가 있었을 것 같다.

= 스스로 규정지은 건 거의 없다. 국어 선생님 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행동과 이미지가 있긴 한데 평상시 행동과 취미가 자신의 직업과 반드시 연관되진 않지 않나. 오히려 요즘 세대의 자유분방함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생님들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바쁜 와중에 다들 시간을 잘 쪼개 쓰고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내더라. 그런 걸 참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틀을 만들진 않았다.

- <박하경 여행기>의 시나리오를 보면 하경의 대사가 대체로 길지 않고, 생각을 대변하는 내레이션 역시 짧고 직관적이다. ‘?’로만 표시될 때도 많아서 그 여백을 어떻게 채워나갔을지 궁금했다.

= 그걸 채워나가기보다 오히려 덜어내려고 했다. 다른 사람과 만났을 때의 시너지가 중요했고, 하경이 혼자 있거나 멍 때릴 때 뭔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덜어내자고 스스로를 다잡았고 ‘하지 마’, ‘덜어내’와 같은 말들을 시나리오에 적어두곤 했다. 감독님에게 여러 번 이야기한 게 있는데 “시청자들이 하경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황과 연결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나는 TV프로그램을 보다 종종 별거 아닌 것에 스스로를 대입해보곤 한다. 가령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자세를 바로잡는다든가. 이 작품에서도 하경의 여행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 하경의 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짧은 단발에 편하고 캐주얼한 의상을 즐겨 입는데, 그 산뜻함이 당일치기 여행이라는 컨셉과 잘 어울렸다.

= 작품 들어갈 때 의상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영화를 볼 때 캐릭터의 소품이나 의상을 통해 극에 잘 이입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계기를 주로 싶은 마음이다. 또 외형이 잘 갖춰졌을 때 연기적으로 캐릭터에 잘 몰입하는 편이다. 스타일리스트에게 부탁한 건 학교 안과 밖에서의 의상이 달랐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경이 새벽에 화장도 잘 못하고 나가는 애니까 그럴 때에 걸쳐 입기 좋은 옷들이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맨날 청바지만 입을 순 없으니 기성 제품 중에 고르되 제작한 것들도 있고, 스타일리스트와 동묘시장에서 직접 고른 옷도 있다.

- 이나영 배우와 동묘시장이라니. 신선한 조합이다. (웃음)

= 동묘에서 쇼핑하는 거 생각보다 재밌다. (가져온 점퍼를 보여주며) 이것도 동묘시장에서 산 옷이다. 그곳에서 구입한 옷 중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것들이 꽤 있다.

- 작품에 여백이 많은 것과 별개로 작은 것까지 디테일을 고심한 것 같다.

= 디테일, 중요하다! 소품을 중요하게 보는 편이라 내가 쓰는 도구, 하다못해 연필 같은 것도 캐릭터와 맞는 걸로 챙기곤 한다.

- 함께한 배우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회를 거듭할수록 소수의 인물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게 일반적인 수순인데 하경은 매회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난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나이대도 다양하고 연기한 배우들이 대부분 이번 기회로 처음 합을 맞춘 이들이다.

= 서현우씨만 빼고 거의 다 처음 뵀는데 그래서 더 기대가 컸다. 상대가 어떤 리듬으로 어떻게 연기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미리 준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벌어질 상황을 기대하면서 갔다. 정해진 게 없어 긴장되고 불안하면서도 그만큼 설렜다. 말 그대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코믹한 상황이 많고 현장에서 집중해 만들어낸 상황들이 있어서 <영어완전정복>을 찍을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 즉흥적으로 연출된 게 꽤 많겠다. 배우가 직접 의견을 준 것도 있나.

= 대체로 소소한 것들이다. 가령 1화에서 그냥 걷기 어색하니까 (몸 앞뒤로 손뼉을 치며) 이렇게 박수도 쳐보고. 그런데 매번 그러면 캐릭터성이 굳어질 수 있으니 나머지 신에선 또 다르게 걸어보고. 구교환씨를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고 유명 빵집 오픈런을 할 때 웃을 것인가 무표정하게 있을 것인가 같은 것들을 현장에서 정했다. 신기한 건 우는 신이 아닌데도 감정이 동요하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거다.

- 특히 어떤 장면들에서 그랬나.

= 예를 들면 1화에서 묵언수행하는 정아(선우정아)를 볼 때 삶이 힘들어 이런 수행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갔고, 2화에서 “선생님,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는 연주(한예리)에게 “아니야, 너 잘 지내는 거지?” 하고 되묻는데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나더라. 여행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촬영에 들어갔는데 겪고 보니 사람 이야기라 그랬던 것 같다. 제일 긴장한 건 3화, 4화였다. 특히 3화는 <비포 선셋>처럼 판타지의 호흡으로 가야 해서 유쾌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주고 싶었다.

- 그런 만남들에서 하경의 유연함이 눈에 띄었다. 곁을 잘 주지 않는 것 같다가도 새로 만난 사람과 감정 교류나 소통이 막힘없이 잘되는 게 신기했다.

= 말한 대로 하경은 넘치는 친절을 베풀지도 과하게 낯을 가리지도 않는다. 억지웃음 없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사람이다. 그게 혼자 여행을 떠나는 자의 미덕이 아닐까 싶었다.

- 여행은 원래 좋아하나.

= 좋아한다. 자연도 좋고 도시에선 건축물이나 미술관, 박물관 구경을 즐긴다. 하경이 빵집 오픈런을 했듯이 나도 햄버거 가게 투어를 해본 적이 있다. (웃음)

- 해남, 군산, 부산, 속초, 대전. 서울, 제주, 경주 등 총 8개 지역이 배경이 됐다. 이중 처음 가본 곳이 있나.

= 해남을 처음 갔는데 정말 예쁘더라. 기회가 된다면 또 가보고 싶다. 예전엔 2박3일 정도는 돼야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박하경 여행기>를 찍고 보니 당일치기도 괜찮겠더라. 원래 여행이라는 게 맛집도 가고 구경도 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부리기 마련인데, 하경처럼 호떡 먹으러 경주 가고 템플스테이 하러 해남 가고, 이런 식으로 목표를 단순화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숙제하듯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나의 정신과 마음이 쉴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주는 거지. 그런 면에서 당일치기 여행의 매력에 설득이 됐다.

- 가수 슈가의 유튜브 채널 <슈취타> 출연 소식이 공개된 후로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슈가와 이나영이라는 의외의 조합을 신기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나영의 첫 토크쇼 출연이며 그 플랫폼이 유튜브라는 데서 오는 놀라움도 컸다. 앞으로 작품 밖에서도 배우 이나영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하는 팬들이 많은데.

= 사실 많이 열려 있다. 다들 잘 안 믿으시는 것 같지만. (웃음) 인터뷰에선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니까 할 말이 많은데, 내 이야기는 별로 특별할 게 없다. 매일 영화 보고 운동하고, 이렇게 재미없게 사는데 뭘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전엔 <무한도전>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 같은 시트콤에서 캐릭터로서 등장하는 게 더 편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콘텐츠의 흐름이 바뀐 게 느껴지면서 고민이 되더라. <슈취타>는 매번 새로운 게스트가 등장한다는 면에서 <박하경 여행기>와 컨셉이 비슷해서 출연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다작을 하진 않지만, 대신 작품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만전을 기한다는 인상이다. 여전한 열정 또한 느껴졌는데 20년 넘게 연기에 대한 애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이유야 정말 많지만, 내가 캐릭터 안에 들어가 히스토리부터 모든 걸 만들어가는 과정이 지금도 너무너무 신난다. 세심하게 파고들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서 느끼는 재미가 크다. 물론 어렵다. 어려운데 그래서 더 달려들게 되는 것 같다. 앞서 말했지만 영화를 볼 때 소품과 같은 작은 요소에 크게 감동하는 편이다. 내 출연작을 보는 관객도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준비하고 연기한다.

- 혹시 다음 작품도 정해졌나. 이후의 계획을 이야기해준다면.

= 아직 정해진 건 없다. 5월까지는 <박하경 여행기>를 잘 선보이는 게 중요하겠고. 나중에 이 작품을 서서히 보내주며 스스로에게 물어보려 한다. ‘지금 뭐가 필요해? 어떻게 해야 너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아마 또 영화 보고, 시나리오 읽고, 영어 공부하며 비슷하게 보내겠지만. 사실 운동 겸 해서 춤을 배워볼까 생각 중이다. 항상 춤을 추면 군무가 된다. (간단한 동작을 보여주며) 이렇게, 이렇게 되게 열심히 추긴 하는데 느낌이 잘 나지 않아서. 카메라라도 있으면 연기니까 어떻게 해볼 텐데. 거울을 앞에 두고 출 생각을 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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