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잇 컴스 앳 나잇>(2017)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원제인 ‘It Comes at Night’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본적인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명쾌하고 으스스하고 우아한 제목이다. 무엇보다 이 제목은 아무런 장애 없이 한국어로 말끔하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수입사에서는 이 간단한 작업을 하지 않고 <잇 컴스 앳 나잇>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붙여버린다. 쉬운 단어라고 해서 한글 표기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comes’는 쉬운 단어지만 ‘컴스’라고 쓰면 어색할 뿐이다. 물론 기억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잠재 관객이 이 영화의 제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못 볼 수 없는 문제인데 어떻게 이 제목으로 극장 개봉까지 온 것일까. 모를 일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잇 컴스 앳 나잇>이라니 이 영화는 십중팔구 호러이거나 스릴러다. 제목만 본다면 호러인 것 같고 그중에서도 유령과 악마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제목만 제외하면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초반에 방독면을 쓴 사람들이 등장했을 때 조금 놀랐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무서운 영화인가
영화의 장르를 따진다면 종말론적인 SF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생존자들은 도시를 떠나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이 전염병의 묘사는 좀비영화와 유한데 이 영화의 ‘감염자’는 엄밀하게 따지면 좀비는 아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는 생살 뜯어먹는 구울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설정에 엄청나게 독창적인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장르의 익숙함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근미래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임진왜란처럼 장르 자체에 사전정보가 내장된 기성품 배경이다. 덕택에 영화는 배경을 설명하는 노력을 아끼고 대신 삭막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두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예상 가능한 영화이고 또 관객의 반응 역시 예상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이 영화를 좋아했지만 관객의 반응은 보다 다양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지겨워했다. 그 이유는 이해될 수 있다. 잘 만든 영화이고 연기도 좋지만 특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도, 페이스가 아주 빠른 편도 아니며 관객에 따라 이 이야기가 매력이 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장르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잇 컴스 앳 나잇>이 굉장히 무서운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이 ‘장르적’으로 무서운 영화인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시간 흐름에 따라 기대가 계속 바뀌는 장르가 있고 한자리에 머무는 장르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맨스물은 다루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이야기의 다양성이 확장되지만 브론테 자매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은 여전히 신선하다. 하지만 호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는 여전히 훌륭한 영화이고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지만 지금 관객은 대부분 이 작품이 장르 호러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옛날 호러영화 애호가다. 그건 수많은 영화들이 눈앞에서 호러영화로서 유통기한을 넘기는 걸 꾸준히 목격해왔고 그런 경험담을 또 많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지금 관객은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1931)이나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1931)가 당시엔 극한의 공포 경험을 안겨주는 영화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나 역시 그렇다. 80년대 슬래셔영화 시대를 겪어왔기 때문에 <13일의 금요일>(1980)이나 <할로윈>(1978) 같은 영화들이 날카로움을 잃어가는 과정은 직접 보아왔다. 얼마 전 영국에서는 <양들의 침묵>(1991)의 등급을 하향 조정했는데, 그건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영화가 공포영화로서의 기능을 그만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세기 동안 호러영화 장르는 극단적인 자극을 향해 전진해오면서 이전의 ‘온화한’ 영화들을 꾸준히 뒤로 밀어내왔다.
관객의 기대와 그것을 넘어서기
이 경향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결국 장르는 호러 열광자들이 어떤 자극에도 두려움이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전진할 것인가? 이는 약간 두렵기까지 한데, 무서운 이야기와 이미지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런 것들의 강도가 지난 1세기처럼 빠른 속도로 높아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다행히도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지난 몇년 동안 유행했던 고문 포르노의 인기는 많이 꺾였다. 최근에 나온 인상적인 호러영화 상당수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공포와 고통의 극한을 추구하지 않으며 장르의 재료와 소재를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쥘리아 뒤쿠르노의 <로>(2016)는 늑대인간 소재를 변주하며 카니발리즘을 다루고 있지만, 신체손상의 극한을 추구하는 대신 두 자매 캐릭터의 폭력적인 관계 묘사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제니퍼 켄트의 <바바둑>(2014)은 정말 고통스러운 영화지만 이 영화의 고통스러움은 장르영화의 유원지적 공포가 아닌, 다루기 힘든 아들을 둔 싱글맘의 현실에서 온다.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2015), 바바크 안바리의 <어둠의 여인>(2016), 애나 릴리 아미푸르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2014), 기예르모 델 토로의 <크림슨 피크>(2015) 역시 이 부류에 해당될 것이다. 장르적 자극은 상대적으로 줄었지만 현실 세계의 공포와 고통을 보다 시적이고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이야기의 폭을 넓히는 도구로서 장르가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상당수는 호러 관객의 역풍을 받았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무엇이 장르적 공포를 만드는가. 그것은 장르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에 대한 약속 또는 그 기대를 넘어서는 배반이다. 장르가 강도를 높이고 관객이 이에 익숙해지면서 이 모든 것들은 점점 더 규격화된다. 그 규격화된 틀에서 벗어난 영화들이 팬들의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약속을 깨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가 덜 무섭거나 덜 재미있는 것일까?
<잇 컴스 앳 나잇>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이 영화가 규격화된 장르영화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제목과 예고편만 보면 이 영화는 익숙한 영화처럼 보인다. 무언가 음침하고 무서운, 우리가 아닌 존재가 밖에 있으며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부패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미 성능이 검증된 호러영화의 과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이 의무적인 과정에 무관심하다. 감염자들은 끝까지 물리적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고 공포는 언뜻 화기애애한 집 안에서 쌓여가는 조용한 압박감 속에서 자라난다. 후반부에 주인공들에게 닥치는 수난은 끔찍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장르에서 기대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가면 쓴 연쇄살인마가 날뛰는 영화에서 우린 영화 속 공포를 극장에 남겨두고 잊을 수 있다. 하지만 괴물과 우리의 구분이 의미가 없고 경계선도 없는 <잇 컴스 앳 나잇>에서 그 공포는 끈적거리면서 죄의식과 불쾌한 기억을 남긴다. 아마 이 영화에 부정적인 관객은 이 역시 영화의 단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앞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호러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먹었다. 장르적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것은 그 영화가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심지어 무섭지 않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싸이코>(1960)의 샤워 신은 슬래셔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별 자극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린 낯선 자극에 비명을 질러대던 50년대 관객보다 이 영화의 어둠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잇 컴스 앳 나잇>은 그 장르 외피를 장르 유통기한을 통한 숙성기간과 상관없이 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간 영화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