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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영화비평] 히치콕이 스스로를 영화에 비추어서 표현하는 과정에 주목한 <히치콕 트뤼포>

<히치콕 트뤼포>

단순하게 책에 담긴 내용을 요약하거나 줄친 정도로 영화 <히치콕 트뤼포>를 바라본다면 곤란할 것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 그래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몇 가지 요소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부각되고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이란 인물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들이 읽었던 인터뷰집 <히치콕과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그 중심에 놓인다. 한마디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트뤼포가 아니라 ‘히치콕’이다. 트뤼포가 쓴 히치콕에 대한 인터뷰집을 읽은 자를 위해 영화가 제작되었고, 히치콕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목표로 영화는 자신의 여정을 짜맞추고 있다.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인 연출자 켄트 존스는 과감하게 나머지 단서들을 삭제해간다. 마틴 스코시즈, 웨스 앤더슨, 리처드 링클레이터,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수많은 감독들의 인터뷰 내용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만, 감독이 목표한 주요한 내용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녹음기를 끄고 이야기하자”

어쩌면 서구 관객의 입장에서 이 작품의 의의는 ‘시각적’이라는 측면에서 우선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이 존재하기 이전에, 인터뷰 녹음 파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인터뷰 파일은 지금이라도 쉽게 웹상에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영화는 ‘책의 절판’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더불어, 나름 ‘히치콕의 목소리’를 경험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만족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이 과정에서 간과하기 쉬운 몇 가지 특징들을 우선 살펴야 할 것 같다. 감독에 따르면, 책을 읽는 것과 오디오로 듣는 것은 히치콕이라는 사람에 대한 매우 상반된 인상을 줬다고 한다. 녹음된 히치콕의 목소리가 책에서보다 직설적이고 본능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에 반해 책을 통해 접했던 히치콕의 첫인상은, 몇몇 인터뷰 감독들이 말하듯이 냉혹하고 분석적 성향이 부각되었다. 때문에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녹음기를 끄고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는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가 강조하고자 하는 히치콕에 대한 예외적 이미지라 말할 수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독이었고, 그래서 더욱더 스스로를 영화에 비추어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영화 <히치콕 트뤼포>는 이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게다가 히치콕 특유의 느리고 두터운 말투는 그의 영화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서스펜스와 대비되어 ‘감독’이라는 그의 직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리 다양한 영화가 작품에 등장하더라도, 그 영화를 창조해낸 인간은 한 가지의 중심을 가지고 존재해 있다. 다양한 영상 클립을 잇는 묵직한 목소리가 그 핵심을 꿰뚫는다.

사실 ‘서스펜스’나 ‘부감의 의미’ 등이 한편의 영화 전체를 보아야 느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영화보다 인터뷰집을 통해 이해하는 편이 더 수월할지 모른다. 이와 비교해서 ‘빛과 어둠’에 관한 언급이나 ‘완성된 화면의 중요도’에 대해서는 이 영화를 통해 살피는 편이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유용해 보인다.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디테일한 측면들이 시각적 재현을 통해 이중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기증>(1958)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시체 애호증’에 관한 설명은 책보다는 이 영화를 통해 접하는 편이 낫다. 킴 노박이 머리를 염색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행동이 몽타주될 때에야 전체 의미가 구성돼 완성된다. 또한 ‘백인 여성’에 대한 히치콕 특유의 성향도 개별 영화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좀더 면밀하게 표현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히치콕식 미스터리의 출발점은 그레이스 켈리나 잉그리드 버그먼 부류의 북유럽계 금발 미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등장하는 화면을 보는 도중 몇몇 세부사항에 눈길이 간다. 이를테면 <현기증>의 미술관 장면을 통해 보는 ‘나선형의 머리 모양’이 그중 하나다. 이 디테일은 다른 영화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1954년작 <레베카>에서 조앤 폰테인이 연기하는 겁에 질린 여주인공 캐릭터는 자연스레 풀어헤쳐진 단발을 고수하지만, 단 한 차례 머리를 말아올리는 변신을 할 때 순간적으로 ‘악의 화신’으로 바뀐다. 그때의 머리 모양은 사망한 전 부인 레베카의 것으로, 레베카는 섹슈얼한 어둠의 그림자를 품은 자로 영화에 묘사되어 있다. 히치콕의 40번째 영화 <>(1963)의 첫 번째 공격 장면도 생각해보면 마찬가지다. 곱게 말아올린 티피 헤드런의 금발은 정확하게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즈음을 공격받는다. 갑자기 보트 주위에 나타난 새 한 마리가 그녀의 머리 부위를 조준해서 찍어 누르고, 그렇게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다가온 외지인의 미스터리한 사건이 시작된다.

이렇듯 금발의 구체적 형상을 히치콕이 집착했던 여성의 외향적 특징이라 본다면, 다큐멘터리에서 유독 비교되는 여인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히치콕의 아내 ‘알마 레빌’이다. 그녀를 보면서 느끼는 아이러니한 감정은 비단 히치콕의 유능한 보조자 역할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큐멘터리 초기에 드러나는 몇 차례의 의도적인 사진 이미지의 노출을 통해, 알마 레빌은 히치콕이란 실제 인물이 놓인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대한 상념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영화 속 주인공들과 명백하게 대비된 채로, 그녀는 붉은빛의 말끔한 헤어스타일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덮어쓰고 나타난다. 만일 마틴 스코시즈가 설명하는 페티시즘적 성향이 스크린 속의 금발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면, 실제 세계에서 히치콕의 파트너가 이를 억압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현기증>에서 제임 스 스튜어트가 혼동했던 그림과 현실의 혼돈이, 히치콕이라는 실제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 속과 카메라 밖으로 나뉘어서 분리된다. 과도하게 열중해서 보여주었던 여성적인 반복의 모티브들이, 감독 자신이 억누르는 성적 욕망에 대한 규칙적 패턴을 완성해낸다. 이렇듯 “자신의 우울과 상실감을 공유하는 영화”라는 히치콕에 대한 스코시즈의 정리는 켄트 존스의 영화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는 것 같다.

<히치콕 트뤼포>

곡선을 그리는 히치콕의 욕망

만일 누군가 히치콕과 루이스 브뉘엘 영화의 공통점을 언급한다면, 그건 손쉽게 ‘욕망과 죄의 감각’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억눌린 욕망이 겉으로 표출될 때, 이들 영화에서 욕망의 가능성은 사건 발생의 꼬투리로 변한다. 그런데 히치콕과 트뤼포라면, 언뜻 욕망이나 관객에 대한 이 두 사람의 태도는 크게 연관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큐멘터리가 말하듯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이란 일부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트뤼포와 히치콕의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트뤼포가 히치콕 영화의 정수를 꿰뚫고 있다는 점은 놀랍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그는 마치 도상학자가 된 듯 히치콕의 의식을 추적해내는 데 성공한다. 환상에서 대상이 강조될 때 발생하는 도착적인 불균형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를 상상계적 구조와 연결시켜 무려 8일간의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히치콕이 지닌 공포와 강박, 집착에의 무의식은 이 과정에서 명쾌하게 파헤쳐진다. 이 영화 <히치콕 트뤼포>에서 켄트 존스가 바라보는 ‘모티브 놀이’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히치콕의 욕망은 단 한번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향해 직선으로 다가간 적이 없었다. 늘 곡선으로 방향을 틀어 서서히 다가가길 즐겼다. 다큐멘터리가 목표한 히치콕 영화의 정수는 이처럼 에두르는 방식 자체에 있다. 아버지가 연인인 햄릿에게 살해당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필리아를 바라보는 동안, 관객은 비극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스토리의 진짜 주인공인 햄릿의 이야기를 추적해내야 한다. 트뤼포가 내미는 물에 빠진 여인의 초상화가 히치콕의 뚱뚱한 뒷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약간의 과장된 감상이라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트뤼포의 작업 역시 저 너머의 형상을 찾는 데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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