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모어 코리안 무비!” 올해 칸영화제 필름마켓에서 한 일본 바이어가 한국 배급사 직원에게 농반진반으로 던진 이야기는 현재 일본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동안 한국영화의 ‘제3의 자금원’ 역할을 해왔던 일본시장이 올해 상반기 들어 급격히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들이 일본 수입사끼리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백만달러의 미니멈개런티를 받으며 귀하게 모셔나갔던 게 불과 지난해 사정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최근의 경향은 이상징후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때 한국영화는 ‘엔화를 벌어들이는 황금거위’처럼 보였다. 지난해 칸 마켓은 그 절정이었다. <외출>이 700만달러, <형사 Duelist>가 500만달러, <괴물>이 470만달러(투자액 120만달러 포함), <야수>가 400만달러, <아파트>가 200만달러의 미니멈개런티를 받고 선판매됐다. 칸영화제 전후로도 <청춘만화>가 520만달러를 받은 것을 비롯해, <연리지>와 <태풍>은 350만달러, <달콤한 인생>은 320만달러, <웰컴 투 동막골>은 200만달러의 미니멈개런티를 받았다. 결국, 지난해 한국영화의 일본 수출액은 6032만달러로, 2004년에 비해 무려 49.3%나 상승한 수치를 기록했다. 2004년의 일본 수출액 4040만달러 또한 2003년보다 191% 늘어난 것임을 고려하면 한국영화의 대일본 수출규모는 2년 사이에 3.3배나 증가한 것이다. 2004년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와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의 흥행이 비교적 좋기도 했지만, 이러한 급증세의 배경에 한류 스타들의 인기 폭등이 자리한다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은 다시 급반전의 물살을 타고 있다. 한국영화에 냉랭해진 일본시장의 분위기는 칸영화제 마켓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 SPO사에 400만달러의 미니멈개런티를 받고 판매된 이병헌 주연의 <여름 이야기>를 제외하면, 한국영화의 대일본 판매액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쇼박스 해외팀의 이경진씨는 “간단히 말해, 한국영화 부스를 찾는 일본쪽 바이어가 별로 없었다”란 말로 올해의 분위기를 전한다. 쇼이스트 손민경 팀장은 “예전에 비해 가장 크게 바뀐 점은 일본 바이어들이 ‘일단 영화를 보고 얘기하자’고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동안 일본 수입사들은 한국영화를 놓고 입도선매식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씨네클릭 아시아의 지상은 팀장은 “지난해만 해도 배우 이름이나 시나리오, 심지어 시놉시스만으로도 적극적으로 오퍼를 내는 바이어가 많았다”고 말한다.
수입가에 못 미치는 흥행성적이 수요 감소의 원인
이처럼 일본시장이 갑자기 식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한국영화들이 높은 가격에 걸맞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내 머리 속의 지우개>(입장수입 30억엔)와 <외출>(입장수입 27억엔)만이 웬만한 성공을 거뒀을 뿐, 대부분은 큰 실패를 겪었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 사이에 개봉된 <야수> <태풍> <연리지> <형사…> <역도산> <데이지> 등 대작들이 줄줄이 흥행에서 실패하면서 한국영화 수입사들은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비싼 가격으로 수입한 한국영화 중 상당수가 아직 개봉을 하지 않은 상황이다보니, 현재 일본 수입사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한류는 끝났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각 배급사 해외 담당자들의 이야기다. CJ엔터테인먼트 해외영업팀 김성은 과장은 “그동안 우리를 포함해서 일부 배급사들이 단순히 미니멈개런티를 높이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일부 배우에 대한 선호도가 급증하면서 판권료 또한 따라 올라갔는데, 그 와중에 우리도 ‘일본에는 최소한 수백만달러 이상에 팔아야 한다’는 이상한 바이러스에 걸렸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현재의 상황을 “거품이 빠지는 것”이라고 진단하는 지상은 팀장은 “해외시장에 걸맞지 않을 만한 영화까지 다 수출하려는 상황이다보니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는데, 일시적으로는 마이너스를 겪더라도 언제가는 겪어야 할 진통”이라고 설명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일본시장뿐 아니라 아시아 시장 전반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손민경 팀장은 “한때 아시아권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멜로영화나 로맨틱코미디에 대한 반응이 안 좋다. 아시아권 바이어들은 ‘초반에는 웃기다가 후반에 가면 슬퍼지고, 중간에 누가 죽는’ 구성이 똑같다고 한다”고 전한다. 특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기점으로 일본영화가 아시아 시장에서 다시 약진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세상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신파 멜로영화에서 시작된 일본영화의 인기는 애니메이션, 시대극 등으로 넓어지고 있고, 쓰마부키 사토시 등 배우에 대한 선호도도 올라가고 있다.
일본 의존 탈피, 해외시장 적극적 공략 등 다양한 시도
결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 비중을 줄이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다. 2005년 한국영화 전체 수출액 7599만여달러 중 일본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79.4%다. 아시아권으로 확장하면 87%에 이른다. 반면 비아시아 시장 대상 수출은 감소했다. 2004년 비아시아권 대상 수출액은 1295만달러였으나, 지난해는 985만달러로 오히려 줄었다. 올해 들어 상황은 조금 나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남미와 동구권 시장의 한국영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은 과장은 “이번 칸 마켓에서 동유럽 국가들이 유례없이 적극적으로 나와 유럽지역 수출액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동안 멕시코 외에는 개별 국가별로 계약한 적이 없는 남미 또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이 각각 계약을 체결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일본시장이 줄어든다고 전제하면 현재 확보된 해외시장만으로는 급속히 확장되고 있는 한국영화의 규모를 충족하기 어려워 보인다. 해외시장에 대해 좀더 공격적으로 접근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그러한 차원에서 제기된다. CJ엔터테인먼트는 지난 5월 <태풍>을 세계 최대 영화시장인 미국에서 직배 형식으로 배급했다. “20~30개 스크린을 확보한 정도였지만, 직접 미국시장의 데이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서현동 CJ 해외기획팀장은 설명한다. 그는 “CJ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에 거점을 두고 아시아 콘텐츠를 공급하는 특화된 현지 배급사를 지향한다”고 설명한다. CJ는 미국에서 직접 제작도 추진 중이며, <착신아리 파이널> <검은 집>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일본과도 공동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시장 또한 현지화된 콘텐츠를 개발해 접근할 계획이다. 유니버설스튜디오의 자회사인 포커스피처스와 <줄리아 프로젝트>(가제)를 공동제작하고 있는 프라임엔터테인먼트는 더욱 적극적이다. “영어로 이뤄진 영화를 만들어야 최대시장인 북미권 진입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승재 프라임 부사장은 “일단 <줄리아 프로젝트>는 미국 감독과 A급 할리우드 배우를 기용하지만, 차츰 한국의 창조력을 미국시장 안에 녹여낼 것”이라고 설명한다. 할리우드와 공동 제작할 <리심>이나 정두홍 감독이 연출하는 액션영화 프로젝트 또한 이같은 차원에서 시도된다. 청어람이 <괴물>의 중국 직접배급을 추진하는 것이나 보람영화사가 <심청> <만추> 등의 영화를 범아시아영화로 만들려는 것 등도 비슷한 맥락에서 시도되는 프로젝트들.
충무로 관계자들은 일본시장이 일시적인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한국영화의 ‘세계화 프로젝트’가 가로막힌 것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수출문제만 놓고 얘기해도 ‘한류 스타들의 인기를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오락성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때문에 충무로는 한류 스타들이 출연하지는 않지만 영화적으로 탄탄한 <너는 내 운명> <웰컴 투 동막골> <왕의 남자> <괴물> 등이 차례로 개봉되는 하반기가 되면 일본시장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