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순이, 맹순이, 금순이… 바야흐로 여배우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지금 충무로는 연기력 탄탄한 30대 여배우를 기준으로 재편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얼굴 마담’이 아니라, 연기에 올인하는 여배우들이 손가락에 꼽기 모자랄 정도가 되었다. 이제 할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여배우들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충무로 여배우들의 힘은 강력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충무로 대 할리우드, 여배우 대격돌! 그녀들의 성향과 연기 스타일, 과연 얼마나 비슷할까?
1. 친근한 삼순이 <르네 젤위거 - 김선아>
뚱뚱하고 엉뚱하며 때론 바니걸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과감한 패션 센스까지 자랑했던 브리짓 존스. 르네 젤위거는 브리짓이 되기 위해 몸무게를 48kg에서 63kg까지 늘리는 저력을 발휘했더랬다. 통통한 볼살과 살짝 오므린 듯 튀어나온 입술은 그녀의 강력한 트레이드마크였다. 하지만 그녀는 노련한 배우답게 우리의 기대를 기분좋게 배반<?>했다. 못 말리는 사고뭉치였던 그녀가 <시카고>에서 50kg짜리의 늘씬한 쇼걸로 등장했을 때, 우린 얼마나 눈을 비벼댔던가. 또 <신데렐라 맨>에서 미국을 열광시킨 복서 짐 브래독의 아내로서 그녀는 얼마나 사려깊은 여인이 되었던가. 그러나 그런 변신에도 브리짓만큼 그녀에게 딱 맞는 옷은 없을 것이다.
르네 젤위거와 닮은 한국 여배우는 단연 김선아다. 김선아가 <황산벌>에서 남편 계백 장군을 붙잡고 서럽게 우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우린 그 순식간에도 대번 그녀가 단순히 코믹 배우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삼순이라는 코믹한 캐릭터로 안방극장에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또 식상한 코믹 연기의 연장선이겠거니, 그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S 다이어리>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귀여운 여자 지니와 <위대한 유산>의 우악스러운 여자 미영이 섞인 듯한 삼순이가 되어갔다. 그것도 “뻑이 갑니다, 뻑이 가…” 따위의 터프한 멘트를 날리면서. 만일 ‘삼순이=김선아’가 아니었다면? 밀가루를 얼굴에 마구 문질러대다가도 어느 순간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기도 하는 지극히 삼순스러운 캐릭터를 김선아만큼 소화할 한국 여배우는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김선아의 힘은 이렇듯 범접할 수 없는<?> 친근함에 있다. 이제 ‘김선아는 한국의 브리짓 존스’란 말은 수정돼야 한다. 르네 젤위거가 할리우드의 삼순이일 뿐이다.
르네 젤위거 관련 영화 보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카고>, <신데렐라 맨>
김선아 관련 영화 보기 <황산벌>, <S 다이어리>, <위대한 유산>, <내 이름은 김삼순>
2.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천상 배우 <힐러리 스왱크 - 문소리>
여배우의 변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된다. 하지만 힐러리 스왱크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31살짜리 복서 매기가 되기 위해 3개월 동안 몸무게를 9kg 정도 늘렸다는 것은 뉴스 거리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 탱크톱만 걸친 채 근육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녀는 하루 2∼3시간 복싱 연습을 했다고. 물론 이것 역시 복서 연기를 하는 누구나 넘어야 할 관문이다. 하지만 모든 연기자가 바지 속에 두툼한 것을 끼워놓고 남자인 척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안겨준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티나를 떠올리자. 남자처럼 강한 골격과 약간 허스키한 중저음이 분명 도움이 됐겠지만, 남자 연기를 위해 실제로 4주 동안 남자로 행동할 여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남자든, 복서든, 웨이트리스든 입는 옷은 족족 소화해버리는 독한 여배우는 한국에도 있다. 공교롭게도 힐러리 스왱크와 74년생 동갑내기인 여배우 문소리다. 많은 영화를 찍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여배우의 강력한 힘을 논할 때, 문소리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의 첫사랑 순임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그녀. <오아시스>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한공주를 연기했던 그녀가 극중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 능청스러움에 한번 크게 데인 탓인지 <효자동 이발사>나 <사랑해, 말순씨>에서처럼 그녀가 몸빼 바지와 푼수 같은 말투, 막춤이 잘 어울리는 영락없는 아줌마를 연기했을 때 누구도 ‘연기 변신’ 따위의 촌스러운 수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등학생과 바람난 유부녀가 되든, 은밀한 매력을 풍기는 여교수가 되든, 문소리는 그저 문소리다.
힐러리 스왱크 관련 영화 보기 <밀리언 달러 베이비>, <소년은 울지 않는다>
문소리 관련 영화 보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효자동 이발사>, <사랑해, 말순씨>
3. 어리지만 야무진 배우 <내털리 포트먼 - 강혜정>
<레옹>이 처음 나왔을 때 적어도 두번은 놀랐을 것이다. 한번은 마틸다 역의 내털리 포트먼의 당찬 카리스마 때문이고, 또 한번은 그녀가 그때 겨우 13살 소녀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여배우로 불리기 이전에 늘 ‘마틸다’로 불렸고 그것은 마치 세기말에 등장한 롤리타의 새로운 이름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검은색 개목걸이와 단발머리는 곧바로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돌보다는 학업에 충실한 학생으로서 1년에 한편씩에만 출연하며 천천히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히트> <화성침공>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스타워즈> 시리즈 등 유명 감독과 호흡을 맞춰오던 그녀가 <레옹> 이후 10년 만에 돌아온 작품은 바로 <클로저>. 청순한 소녀 마틸다가 스트리퍼 출신의 여인으로 돌아와 파격적인 노출연기를 펼치자마자, 골든 글로브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다.
내털리 포트먼과 강혜정은 매우 닮았다. 당차고 야무진 입술, 또렷한 갈색빛 눈동자, 탱탱볼처럼 튀어다니는 말투까지 말이다. <올드보이>에서 사시미를 들고 있는 앳된 숙녀(혹은 소녀)의 모습은 10년 전의 마틸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똑부러지는 배우는 자신이 단지 남성 캐릭터의 조력자로만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연애의 목적>의 상처입은 교생 선생, <쓰리, 몬스터>의 손가락이 잘리는 아내,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TV드라마 <은실이>의 표독한 의붓언니까지, 그녀는 스토리에 묻혀버리는 평범한 역은 거부해왔다. 그녀의 확실한 작품 선택 기준은 그녀가 <웰컴 투 동막골>에서 약간 나사 풀린 듯한 여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듯 보인다. 그녀가 단지 누군가의 애인이기 이전에, 한명의 연기파 배우로 기억되는 것은 스크린에서도 자기주장을 펼칠 줄 아는 드문 여배우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털리 포트먼 관련 영화 보기 <레옹>, <히트>, <화성침공>,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스타워즈>, <클로저>
강혜정 관련 영화 보기 <올드보이>, <연애의 목적>, <쓰리, 몬스터>, <은실이>, <웰컴 투 동막골>
4. 창백한 자화상 <스칼렛 요한슨 - 이은주>
스칼렛 요한슨은 깨지지 않는 도자기 같다. 어딘지 불안하고 섬세해 보이면서도 자기세계가 강한 탓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표정. 얼굴에서 풍기는 여린 이미지와는 다른 중저음의 목소리, 초록과 회색이 적절히 섞인 눈 등. 그녀는 웃지 않는 공주처럼 도도하면서도 섹시해 보이고 고풍스러운 모습을 동시에 지녔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시니컬한 친구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남편을 따라 도쿄에 온 외로운 이방인의 모습 등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캐릭터다. <인 굿 컴퍼니>에서 뉴욕대 입학을 앞둔 알렉스도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학생이지만, 스칼렛 요한슨의 프리즘을 통과한 그 캐릭터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배타적인 느낌이다. 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340년 전 인물인 하녀 그리트의 모습은 베르메르 그림 속 소녀의 얼굴과 겹친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연기 지평이 시간과 공간을 이미 훌쩍 넘어선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칼렛 요한슨과 이은주는 그런 면에서 무척 닮았다. 또래보다 부쩍 성숙해 보이면서 동시에 또래의 창백한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마스크가 특히 그렇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유리처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대학생이나 <연애소설>에서처럼 허약한 환자 역은 그녀의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렸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가련한 여인부터 아예 트렁크에 들어가 질식사하는 모습까지 우리는 그녀가 가짜로 죽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그리고 단 한번 그녀의 진짜 죽음을 만났다. 스칼렛 요한슨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불안하고 외로운 모습이 이은주에 대한 느낌과 흡사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스칼렛 요한슨 관련 영화 보기 <판타스틱 소녀백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인 굿 컴퍼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은주 관련 영화 보기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5. 코믹 여왕 <리즈 위더스푼 - 김정은>
제목부터 너무한 영화 <금발이 너무해>를 보고 나서도, 리즈 위더스푼이란 여자를 잊어버렸다면, 참 너무한 일이다. 연신 재잘거리는 그녀의 주걱턱과 동그란 눈, 치와와 같은 표정을 보라. 그녀는 마치 로맨틱코미디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같은 바니걸 의상인데도, 르네 젤위거가 입은 것과 리즈 위더스푼이 입은 것은 자태부터 다르다. 똑부러지는 성격대로 하버드를 수석 졸업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 시행착오 많고 덜렁대는 성격 탓인지 밉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스위트 알라바마>에서도 그녀는 명품만 디자인하는 차세대 디자인계의 거물로 허영심 많고 버릇없지만 귀엽고 똑부러지는 인물을 연기한다. 하지만 헛똑똑이답게 그녀는 술을 마시고 차에다 빈대떡을 부쳐놓는가 하면, 자신의 도장도 찍지 않고 이혼서류를 내고 급기야 당일에 결혼식을 철회해버리는 철없는 행동을 골라한다. 그래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서처럼 그녀가 꽤 조숙한 척 나올 때도 있다. 물론 심각한 표정의 라이언 필립을 웃기기 위해 머리에 뿔 만들고 이상한 표정 짓는 것만 봐도 그녀의 몸에 개그맨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얼굴은 영판 다르지만, 애드립과 코믹 연기 면에선 김정은은 리즈 위더스푼의 뺨을 치고 대일밴드를 붙여줘도 모자랄 판이다. 이미 차태현과 함께 한 016 PCS를 시작으로 <가문의 영광> <불어라 봄바람> 등으로 코믹 여왕 자리를 꿰찬 그녀이니 말이다. <불어라 봄바람>에서 껌 두번 돌려 씹는 연기에서는 백치미 필이 좔좔 흘러넘치는 게 일품이다. 그녀는 흥분하면 변성기가 오는데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특기다. <가문의 영광>에서 정준호 옆에 앉아 기차를 타고 있던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삶은 계란은 안 먹는다고 내숭을 떨던 장면이 생각나는가? 계란을 몰래 먹다가, 옆에서 정준호가 뒤척이자, 눈을 딱 감고 모른 체하는 순발력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리즈 위더스푼 관련 영화 보기 <금발이 너무해>, <스위트 알라바마>,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김정은 관련 영화 보기 <가문의 영광>, <불어라 봄바람>
6. 성녀와 악녀 사이 <니콜 키드먼 - 이영애>
니콜 키드먼과 이영애의 공통점은 성녀와 악녀 사이를 오가는 이미지를 동시에 지녔다는 점이다. 우선 니콜 키드먼의 필모그래피가 워낙 다양한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도그빌>이나 <스텝포드 와이프> <그녀는 요술쟁이> 등에서 그녀가 순진함과 귀여움을 무기로 성녀 이미지를 마구 드러냈다면, <아이즈 와이드 셧>이나 <투 다이 포> <물랑루즈> 등의 그녀는 침대 밑의 아이스픽처럼 요염함 뒤에 사악함을 감추고 있다. 그녀는 전형적인 서구 미인이지만, 그렇게 이중의 날로 자신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할 줄 알며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이기도 하다.
한편, 니콜 키드먼에 비하면 이영애의 필모그래피는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다. 영화로만 따지자면 앞에 망한 영화를 제외하고 대표작이랄 수 있는 것도 <공동경비구역 JSA> <봄날은 간다> <선물> <친절한 금자씨> 등 몇 작품에 불과하다. 단 이영애의 마스크는 니콜 키드먼만큼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절대선에 가까울 정도로 단선적인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장금> 이전까지의 그녀의 캐릭터를 성녀, <친절한 금자씨> 이후는 악녀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봄날은 간다>의 은수는 매우 복잡한 캐릭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을 굳게 믿었던 상우(유지태) 앞에서 은수는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난다. 상우가 중얼거린 명대사 “사랑이 변하니?”에 대해 어떤 답도 주지 않았던 그녀의 무미건조한 태도에서 우리는 이영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니콜 키드먼 관련 영화 보기 <도그빌>, <스텝포드 와이프>, <그녀는 요술쟁이>, <아이즈 와이드 셧>, <투 다이 포>, <물랑루즈>
이영애 관련 영화 보기 <공동경비구역 JSA>, <봄날은 간다>, <선물>, <친절한 금자씨>, <대장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