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기대작들이 개봉을 연기한 탓에 지금 극장가에는 재개봉 열풍이 불고 있다. <위대한 쇼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 여러 작품들이 다시 상영되고 있다. 그 속에는 올해 오프라인 상영을 취소하며 아쉬움을 샀던 칸국제영화제의 역대 수상작들도 다수 포진됐다. 서울극장 등 소규모 극장들을 중심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칸의 영화들이 국내 관객들을 다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스크린으로 재회한 칸국제영화제 수상작 10편을 돌아봤다.
켄 로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06년 제59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일관된 목소리로 소외계층의 삶을 대변한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 그의 첫 황금종려상 수상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담았다. 켄 로치 감독은 조국 독립을 위해 비극으로 뛰어드는 형제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국인 영국의 과오를 조명하고, 자유를 가로막는 제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거기에 주인공 데이미언을 연기한 아일랜드 출신 배우 킬리언 머피는 배우의 즉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켄 로치 특유의 연출 방식과 만나 캐릭터와 하나된 모습을 보여줬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
2013년 제66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노동력 착취, 독선적인 태도, 관음적인 화면 구성 등에 대한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자취는 무시할 수 없다. 영화는 주인공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이 엠마(레아 세이두)를 만나 새로운 사랑에 눈뜨고, 이별의 아픔을 거쳐 성장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이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케시시 감독은 집요한 통찰력으로 바라봤다. 길 하나를 건너는 장면에도 10시간 넘게 촬영을 반복했으며, 배우들은 감정의 극한을 끌어올리며 스크린을 허무는 듯한 현실적인 연기를 펼쳤다. 그렇게 <가장 따듯한 색, 블루>는 크래딧이 올라간 뒤에도 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각인되는 강렬한 경험을 선사하며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루벤 외스틀룬드 <더 스퀘어>
2017년 제70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는 지금 소개하는 작품들 중 유일한, 그리고 역대 황금종려상 수상작 중에서도 보기 드문 코미디 장르다. 그러나 단순히 코믹한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 속에 날카로운 풍자를 숨기고 있는 블랙코미디다. 영화는 미술관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의 수난기를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허례허식을 꼬집는다.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예술작품을 통해 인류애를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이의 노숙자들은 철저히 무사하고 외면한다. 이는 그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톤으로 어이없는 상황들을 쉴 새 없이 나열하며 실소를 유발하지만, 문뜩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무서운 작품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2018년 제71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어느 가족>은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감독이 5수 끝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일본에서 실제 발생했던 시체 은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혈연은 아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뭉친 반쪽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흩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진짜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다. 감독의 전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보다는 <아무도 모른다>(2004)처럼 냉혹한 현실과 따듯한 인간애를 적절히 배합해 커다란 울림을 자아냈다. 늘 부족함 속에서 발현되는 가족애를 그려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카엘 하네케 <히든>
2005년 제58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앞서 언급한 켄 로치 감독과 함께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몇 안되는 감독이다. 하네케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하얀 리본>(2009), <아무르>(2012)가 극단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관계를 포착했다면, 2005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히든>은 그의 초창기 작품들의 주요 화두였던 ‘인간과 미디어를 향한 의심’를 외치고 있다. 주인공 조르쥬(다니엘 오테이유)는 자신의 과오를 들추는 편지들 때문에 일상이 파괴된다. 그리고 편지의 근원을 찾아 자괴감에서 벗어나려 한다. 추적을 바탕으로 한 <히든>의 이야기는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그러나 하네케 감독은 긴박함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돌린 후 점점 보는 이들의 죄의식을 들춰냈낸. 이후 또 한 번의 반전을 통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경고를 날린다.
데이비드 린치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년 제54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몽환’을 탐닉하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작품을 대형 스크린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확실히 흔치 않은 기회인 듯하다. ‘가 선택한 21세기 최고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개봉 당시 평단의 찬사와 달리 관객들에게는 외면을 받았다.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의 추상적인 이야기 전개 때문이다. 두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구성은 꿈과 현실이 뒤엉키는 듯한 독특한 체험을 가능케했다. 이해보다는 감독이 강조하는 ‘직감’이 우선시되며, 관람 후 남는 혼란 자체가 영화의 목적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작품이다.
아쉬가르 파라디 <세일즈맨>
2016년 제69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남우주연상
서울극장 ‘은하계 여행 안내 기획전’
이란의 거장 이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세일즈맨>은 도덕적 딜레마에 시달리며 비극으로 향하는 한 남자의 심리를 꿰뚫는다. 연극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한 영화는 연극배우 겸 교사로 일하고 있는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가 아내를 해친 괴한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복수보다는 스스로를 망치며 점점 피폐해져가는 에마드의 심리를 파고들며 윤리에 대한 모순을 꼬집는다. 쉽게 판단내릴 수 없는 애매한 상황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딜레마에 빠져들게 만든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이 지지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묘한 모습을 연극과 현실을 섞은 독특한 형식과 다큐멘터리 같은 현실감으로 전달했다.
장이머우 <인생>
1994년 제47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남우주연상
대한극장 ‘장이머우 감독전’
중국의 장이머우 감독은 인물의 삶을 통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말할 때 빛을 발했다. 그가 1994년 제작한 <인생>은 그 산물 중 하나다. 영화는 부유한 지주에서 도박으로 밑바닥을 경험한 뒤 전쟁, 혁명 등에 휩싸이는 부귀(갈우)의 삶 전반을 훑는다. 한 사람의 흥망성쇠와 굴곡진 인생이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지만 이를 통해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격동의 중국 역사를 보여준다. 과거 중국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 <인생>은 제작 당시 중국에서 상영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칸국제영화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첸카이거 <패왕별희>
1993년 제46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메가박스 코엑스, 롯데시네마 영등포, 대한극장 등 전국 15개 극장
장이머우 감독과 함께 중국 5세대 영화감독의 대표주자로 기억되는 첸카이거 감독. 그의 역작 <패왕별희>는 지난 5월1일부터 15분가량 늘어난 버전으로 국내 재개봉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경극 배우가 되기 위해 훈련을 거친 데이(장국영)와 샬로(장풍의)의 파란만장한 삶과 애달픈 사랑을 담은 영화는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긋나는 청춘들을 그렸다. 역사영화, 성장영화, 퀴어영화 모두를 포괄하면서도 탄탄한 드라마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거기에 27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는 캐릭터와 일체된 장국영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선물 같은 영화로 남았다.
자비에 돌란 <로렌스 애니웨이>
2012년 제65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여우주연상
아트나인
칸이 사랑한 천재, 자비에 돌란 감독의 첫 칸영화제 수상작은 <로렌스 애니웨이>다. 2012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배출한 <로렌스 애니웨이>는 리듬감 넘치는 음악, 원색적인 의상과 미술, 자유분방한 편집 등 자비에 돌란다운 감각적인 이미지와 구성으로 평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더욱 돋보인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남은 일생을 여성으로 살아가려는 남자 로렌스(멜빌 푸포)와 그의 연인 프레드(쉬잔느 클레망)는 주변의 시선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갈등한다. 두 배우는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캐릭터의 감정을 표출하며 놀라운 흡입력을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