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봉준호, 이병헌, 배두나 등 할리우드에 진출한 여러 한국 감독, 배우들이 있다. 이들 외에도 할리우드에는 여러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있다. 개봉 8일 만에 570만 관객을 동원,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겨울왕국 2>의 윤나라 애니메이터도 그중 한 명이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기 않으려 군대까지 다녀온 그는 <겨울왕국>, <모아나>, <주토피아> 등 여러 디즈니 작품들로 활약하며 입지를 굳혔다. <겨울왕국 2>에는 이효진, 최영재, 이현민 애니메이터 등 10명이 넘는 한국인 스태프가 참여했다. 그들처럼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한국인들은 또 누가 있을까. 연출, 연기를 제외한 다양한 분야의 6인을 알아봤다.
<스타트렉 : 디스커버리> 단체사진 속 김보연 작가(가운데, 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 김보연 인스타그램(@extspace)
김보연 작가
첫 번째는 각본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김보연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덕분에 영어에 익숙했으며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졸업, 대학은 미국으로 건너가 고고학을 배웠다. 평소에도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시나리오 공모전에 도전하고, 2위를 차지하며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UCLA)에서 시나리오 창작 수업을 수강, 석사 과정을 수료해 TV 시리즈 <레인>의 작가로 첫 경력을 장식했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인기리에 방영 중인 <스타 트렉 : 디스커버리>의 메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집필을 맡은 시즌1 에피소드9(미국 TV 시리즈는 에피소드마다 작가가 달라진다)은 작품 흐름을 전환, 이후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높이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정훈 촬영감독
김보연 작가가 미국에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면, 정정훈 촬영감독은 이미 국내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후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한 사례다. 1990년대부터 활동을 사직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 박찬욱 감독과 자주 콤비를 이뤘던 정정훈 촬영감독. 그의 할리우드 진출작도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스토커>다. 정정훈 감독은 ‘순수의 타락’이라는 작품 주제에 걸맞게 간결하면서도 파격적인 화면을 완성하며 할리우드에서도 실력을 입증했다. 이후 그는 2014년 <블러바드>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에 단독 진출, 안드레시 무시에티 감독에게 직접 제안을 받아 <그것>의 카메라를 잡았다. <그것>은 엄청난 흥행을 기록, 이에 힘입어 정정훈 촬영감독은 화려한 액션을 내세운 <호텔 아르테미스>, 최근 개봉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좀비랜드: 더블 탭>의 촬영을 맡았다. 현재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신작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의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임창의 조명기술감독
흔히 말하는 ‘영상미’를 좌지우지하는 요소 중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조명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술에서 화려하게 촬영을 한다 해도 조명이 엉망이면 소용없다. 이렇듯 빛을 통해 영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작업을 임창의 조명기술감독(Lighting Technical Director)이 하고 있다. 그는 <아바타>, <혹성탈출> 시리즈 등에 참여했다. 그가 조명감독이 아닌, 조명기술감독인 이유는 피사체에 직접 조명을 쏘는 것이 아니라, CG를 통해 창조된 그래픽에서 조명을 구사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한국에서 시각 효과 업무를 하던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아바타> 작업 소식을 접해 세계 최고 수준의 그래픽 스튜디오 웨타 디지털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바타>에 참여했으며, 모션 캡처 기술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주인공 시저(앤디 서키스)의 털 하나하나까지 명암을 조절하며 캐릭터를 구현했다.
정두홍 무술감독
이 포스트에 소개하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가 아닐까. 무술감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두홍이다. 무술감독과 함께 배우 활동도 이어가고 있는 그는 2016년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 출연했다. 이병헌이 연기한 정채산의 대역으로 영화에서 정채산인 척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의 첫 할리우드 진출 계기도 이병헌의 권유로다. 1편에 이어 <지.아이.조 2>에 출연한 이병헌은 제작진에게 자신의 무술 대역 배우로 정두홍 감독을 추천, 영화에서 스턴트와 무술 지도를 담당했다. 이후 <레드: 더 레전드>, <제 7기사단>에서 무술감독을 맡았으며 배두나가 출연한 TV시리즈 <센스 8>에도 한국 로케이션 스턴트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그는 지침을 따르지 않을 시 위험할 수 있으므로 처음 본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에게도 불호령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현장에서는 ‘크레이지 두’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바네사 리(이미경) 패브리케이터
할리우드 영화 속 히어로들이 그렇게 멋질 수 있었던 것은 바네사 리의 몫도 컸다.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패브리케이터(특수의상 제작자) 바네사 리는 <아이언맨>, <토르>, <스파이더맨>, <배트맨 vs 슈퍼맨>,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여러 블록버스터에서 의상 제작을 맡아왔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두 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잘 가누지 못하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상 포기, 메이크업 학원을 다녀 백화점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렇게 바네사 리는 한국에서 상처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 속 특수 의상 제작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고 현재는 할리우드의 대표 패브리케이터로 자리매김했다. 2018년 바네사 리는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바늘 하나로 할리우드를 접수하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김상진 애니메이션 감독
유독 한국인들이 할리우드에서 많이 분포한 분야는 앞서 말한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인들의 네트워크도 형성돼 있으며 대다수가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등 쟁쟁한 스튜디오에 소속돼 있다. 그중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애니메이션 부흥을 바란 이가 김상진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그는 1990년대부터 피사체의 움직임을 설정하고 캐릭터의 감정을 연기하는 애니메이터(캐릭터를 그리는 일이 아니다), 캐릭터의 생김새를 그려내는 캐릭터 디자이너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2D 애니메이션 <타잔>, <헤라클레스>, 3D 애니메이션 <볼트>, <빅 히어로>, <주토피아> 등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20년 넘게 여러 작품을 작업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홍성호 감독과 3D 애니메이션 <레드슈즈>를 제작했다. 홍성호 감독이 각본과 전체적인 연출을 맡았으며 김상진 감독이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모든 부분을 담당했다. 김상진 애니메이터는 “<레드슈즈>의 제작비는 할리우드로 치면 독립영화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