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할리우드에 루카스 헤지스만큼 탄탄한 필모를 빠르게 쌓아 올린 배우가 있을까. 라이징 스타 목록에 올렸던 이름이 채 마르기도 전에 굵직한 작품들만을 선택해 연기력까지 인정받은 그. <벤 이즈 백>으로 돌아온 루카스 헤지스는 베테랑 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모자 관계로 만나 약물 중독에 빠진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금 필모그래피를 보유한 배우 루카스 헤지스의 놀라운 행보를 찬찬히 짚어봤다.
별명은 오스카 메이커
1996년생의 루카스 헤지스. 지금 가장 뜨거운 할리우드의 90년 대생 신성들 가운데 루카스 헤지스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뛰어난 작품 선구안이 괄목할 만하다는 점. 비중 있는 출연을 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레이디 버드>, <쓰리 빌보드> 세 작품 모두 그해 오스카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른 화제작이었다. 거기다 카메오 출연을 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포함시키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진출한 작품을 총 네 편이나 보유한 셈이다.
(왼쪽부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레이디 버드>, <쓰리 빌보드> 포스터
이 기록이 완성된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22세. 이렇게 루카스 헤지스에게는 '오스카 메이커'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특히,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등극한 것은 90년 대생 배우의 연기 부문 최초 노미네이트였으며(같은 해 <라이언>으로 후보에 오른 90년생 데브 파텔과 동일한 기록이다), 25세 이하의 나이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제이크 질렌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벤 이즈 백> 촬영 현장의 피터 헤지스 감독(왼쪽), 루카스 헤지스(오른쪽).
감독 피터 헤지스의 아들
지난 5월 9일 개봉한 루카스 헤지스의 영화 <벤 이즈 백>은 그의 아버지 피터 헤지스가 연출, 각본, 제작을 겸한 작품이다. 피터 헤지스는 각본가이자 소설가면서 영화감독이다. <어바웃 어 보이>와 <길버트 그레이프>의 시나리오를 쓴 장본인인 그는 <길버트 그레이프>의 원작 소설가이기도 하다. 루카스의 어머니도 시인이자 여배우인 수잔 브루스. 영화감독 아버지는 <벤 이즈 백>의 벤 역할을 곧장 루카스 헤지스에게 맡길 생각이 없었다. 점 찍어둔 다른 배우들의 목록을 줄리아 로버츠에게 가져가자, 그녀 쪽에서 오히려 루카스 헤지스가 어떠냐는 역제안을 강력히 어필했다고.
웨스 앤더슨 감독과 인연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촬영 현장을 접한 루카스 헤지스는 11세 때 아버지 피터 헤지스의 연출작 <댄 인 러브>에서 첫 연기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루카스의 촬영분은 편집됐다. 이후 중학교에서 연극을 하던 그는 공연장에서 캐스팅 디렉터의 눈에 들게 된다. 디렉터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문라이즈 킹덤>에 출연할 아역 배우들을 물색 중이었다. 루카스 헤지스는 이 영화에서 사라진 친구들을 찾으러 나선 카키 스카우트의 당찬 대원 레드포드 역을 맡았다. 웨스 앤더슨에게 좋은 인상을 심겨주었던 헤지스는 그 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카메오로 출연하는 영광도 누렸다.
가장 주목할만한 신인
이후 <아서 뉴먼>, <제로법칙의 비밀> 등의 작품에서 콜린 퍼스, 에밀리 블런트, 크리스토프 왈츠, 틸다 스윈튼과 같은 명배우들과의 호연으로 입지를 다진 루카스 헤지스는 2017년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작품으로 신인상을 휩쓸게 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이혼 후 사고로 아이들을 잃은 리(케이시 에플렉)가 친형까지 잃게 되자,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 함께 상실을 받아들여가는 이야기다. 루카스 헤지스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조카 패트릭 역으로 삼촌과의 어정쩡하고 느슨한 관계를 차분히 그려나갔다. 이 작품으로 헤지스는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각종 시상식에 호명된 그는 제22회 크리틱스 초이스 신인상을 거머쥐고 수상소감을 통해 "제 자신을 더욱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각별한 작품이에요. 이 작품 때문에 저를 더 사랑하게 됐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레이디 버드>의 첫사랑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인상 깊게 본 배우 그레타 거윅은 자신의 첫 연출작 <레이디 버드>에 루카스 헤지스를 대니 역으로 점찍어 두었다. 극 중 레이디 버드의 첫 남자친구 역할로, 주인공 레이디 버드에게나 그 스스로에게나 진폭이 큰 사건을 겪는 역이었다. 실제로 루카스와 오디션장에서 자주 마주치며 친구가 된 티모시 샬라메도 이 영화에서 카일 역으로 출연했다. 처음 그레타 거윅이 루카스 헤지스에게 하고 싶은 배역을 물었을 때 그는, '카일은 너무 섹시한 역할이라 어울리지 않는다'며 대니를 선택했다고 한다.
<문라이즈 킹덤>의 프란시스 맥도먼드(왼쪽에서 두 번째).
프란시스 맥도먼드, <쓰리 빌보드>
그 무렵 선택한 차기작은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 영화의 강렬한 메시지와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명연기로 뜨거웠던 작품이었다. 루카스 헤지스는 살해된 딸의 범인을 찾기 위해 대형 광고판의 메시지로 항변한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아들 로비로 출연했다. 가족을 잃는 큰 사건을 겪고 시련을 견디는 처지이지만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꾹꾹 눌러 담는 연기로 맥도먼드의 곁을 지키며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맥도먼드와는 첫 스크린 데뷔작인 <문라이즈 킹덤>으로 만난 적이 있다.
줄 이은 차기작들
꽉 다문 입술과 반항기 어린 눈빛. 그러나 선한 인상의 캐릭터도 곧잘 어울리는 그는 선악을 넘나드는 다양한 얼굴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표현해낸다. 루카스 헤지스는 감정 소모가 큰 연기에 애를 먹으면서도 줄곧 규모가 큰 대중영화보다도 작가성이 짙은 인디영화에서 까다로운 역할들만 고집해 왔다. 아직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그의 다양성 영화 세 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세 편 모두 각종 영화제에서 선공개돼 호평 일색을 불러온 작품들.
1) 보이 이레이즈드가장 먼저 조엘 에저튼이 연출 및 주연을 겸한 <보이 이레이즈드>가 있다. 호화 캐스팅으로도 기대를 모은 이 영화에는 니콜 키드먼, 러셀 크로우, 자비에 돌란, 그리고 트로이 시반까지 출연한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보이 이레이즈드>에서 루카스 헤지스는 동성애 치료 프로그램에 보내진 목사의 아들을 연기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절친인 티모시 샬라메가 직접 물었던 인터뷰가 있다. 루카스 헤지스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목소리를 느꼈다"라며, "관습적으로 남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뀌었다. 연약함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일 때가 많다고 느꼈다. 인생에 대해 뭔가 알게 된다면 이런 캐릭터를 통해 알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답했다.
또 <보이 이레이즈드>에 관한 다른 인터뷰를 통해서는 본인의 성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들려줬다. "나는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스펙트럼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며, "완전히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반드시 양성애자도 아닌 무엇"이라고 말했다. <보이 이레이즈드>를 통해 자비에 돌란과 만난 루카스 헤지스는 그의 다음 영화에 티모시 샬라메와 자신을 함께 출연시켜 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2) 미드 90얼마 전 치러진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선공개 된 <미드 90> 역시 반응이 뜨겁다. 2019년 7월 중 국내 개봉을 앞둔 이 영화는 배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 관객 신뢰도가 높은 제작사 A24의 작품으로 루카스 헤지스는 물론 <킬링 디어>의 아역 배우 서니 설직의 출연도 화제였다. 격동하는 청춘의 시대, 1990년대 보드를 타던 청년들을 조명하며 그 시절의 방황을 그려낸 영화에서 루카스 헤지스는 서니 설직과 형제로 만났다.
3) 허니 보이또 한 편의 기대작은 배우 샤이아 라보프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허니 보이>. 샤이아 라보프는 실제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아역 배우였던 자신의 관계에 착안해 각본을 썼다. 그도 직접 출연했지만 아버지 역할을 맡았고, 본인 역할은 루카스 헤지스에게 맡겼다. 아버지와의 지난한 관계 속에서 혼란과 회복을 겪는 이야기를 담았다. <허니 보이>는 제35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거머쥐며 기대작으로 부상했다. 그 밖에 촬영을 마친 <웨이브스>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있는 <프렌치 엑시트> 등 루카스 헤지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