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 2월7일 개막, 개막작 <문 앞의 적>
체념한 염세주의자의 눈동자 같은 회색 하늘과 그로부터 묵묵히 땅을 향해 수직을 긋는 빗줄기. 무뚝뚝한 바람을 베어낼 듯 모서리를 살벌하게 벼른 마천루와 사방 공사장에서 날아든 흙모래로 혼미한 그 발치의 보도블록. 베를리날레 팔라스트로 향하는 포츠담 광장 역에서 둘러보는 베를린 신도심의 풍경은 하릴없이 거대한 세트의 그것이다. 한편의 영화가 남긴 자취를 거둬내고 다른 영화를 찍기 위한 망치질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하긴, 굳이 반세기 모퉁이를 돌아서가 아니더라도 22년간 영화제를 꾸려온 집행위원장 모리츠 데 하델른을 올해로 떠나보내는 베를린영화제로서는 이번 51회 행사는 정말 새로운 ‘필름’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다.
출품작 600여편, 라틴과 일본영화 강세
옛 포츠담 거리를 따라 포럼, 파노라마, 특별전 부문 상영관으로 쓰이는 시네맥스 극장을 지나면 무엇인가 간절히 갖고 싶어하는 듯 앞발을 치켜든 노란 곰의 깃발이 펄럭이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 지난해 전통의 초 팔라스트를 떠나 새 보금자리를 튼 베를린영화제는 2월7일 저녁 7시 이곳에서 포츠담 광장 시대 두 번째 페스티벌의 묵직한 커튼을 걷었다. 호스트로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은 협찬사 메르세데스 벤츠의 리무진을 타고 속속 도착한 개막작 <문 앞의 적> 팀과 아르민 뮐러슈탈, 마리아 슈라더, 재클린 비셋 등 영화인과 정계 인사 등을 문간에서 일일이 악수와 포옹으로 맞았다. 황금곰상 수상자 로만 폴란스키를 제외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 게스트는 거의 없어 할리우드 배우조합 파업으로 스타들이 스케줄에 박차를 가해 베를린영화제 초청 전선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는 소문에 믿음을 더했다. 휴대폰으로 주드 로의 일거수 일투족을 친구에게 중계하는 10대 소녀부터 휠체어를 탄 노인까지 모여 든 시민들은 비교적 점잖게 손님들을 환대했다. 이어진 개막식에서 감기로 불참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대신해 참석한 줄리안 니다-뤼벨린 연방 문화 미디어 장관과 에버하르트 디프겐 베를린 시장은 나란히 베를린을 세계적 영화도시로 만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을 치하하기에 바빴다.
올해의 600여 출품작 중 3500여 기자단의 ‘스토킹’ 속에 귀족 대우를 받을 장편 경쟁작은 모두 스물세편. 영국 및 아일랜드 국적 영화가 네 자리를 차지했고 근래 베를린이 소홀했던 이탈리아,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 라틴계영화와 일본영화를 각별히 챙겼다. 칸과 베니스의 자국 중심주의와 차별화된 성숙함을 보이려는 제스처인지 독일영화는 다문화 정체성을 다룬 그리스 합작 저예산영화 <마이 스위트 홈> 단 한편이 선정됐다. 대신 할리우드에 맞장을 뜨는 독일의 저력을 과시하는 사명은 9500만달러라는 유럽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가 든 독일 국적의 개막작 <문 앞의 적>의 몫으로 돌아갔고, 사이드 섹션에도 50여편의 풍성한 독일영화 프로그램이 배치됐다. 스티븐 소더버그, 거스 반 산트, 스파이크 리 등 미국 인디 신 출신 감독의 영화로 미국 경쟁작 엔트리를 채움으로써 생긴 할리우드에 대한 허기는 비경쟁 특별 상영작인 <한니발> <퀼즈> 이 보충한다. 1961년 은곰상을 수상한 <마부>와 <땡볕>(1985), <길소뜸>(1986), <화엄경>(1994), <태백산맥>(199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6)에 이어 장편 경쟁작으로 선정된 한국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 감독과 다섯명의 주연배우가 자리한 가운데 12일 기자회견과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공식 시사를 갖는다. 이들에게 트로피를 배분할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사장 출신으로서는 전례없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단을 이끌게 된 20세기폭스 전 사장 빌 메카닉. 폭스 재직시 <타이타닉>부터 <소년은 울지 않는다>까지 다양한 규모의 영화를 성공시키고 현재 팬데모니움이라는 독립제작 배급사 설립을 추진중인 메카닉은 공식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돈을 버는 흥미로운 영화”가 만들고 싶은 영화임을 밝혔으며 “블록버스터와 ‘부티크’ 영화를 분리시켜 생각지 않는” 자신의 판단기준이 베를린영화제 인선의 원인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JSA>는 장편 경쟁작,<눈물><반칙왕>도 소개
경쟁부문 외곽에서 그해 유럽의 아트하우스 극장에 상영될 영화를 발굴하는 노릇을 하는 파노라마 부문은 올해 42개국의 작품을 소개한다. 우리 영화로는 임상수 감독의 <눈물>이 파노라마 부문에서 상영 뒤 관객, 기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도 포럼 부문에서 소개된다. 이 밖에 올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영화사상 두명의 악명높은 완벽주의자를 회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메트로폴리스> 복원판을 비롯해 독일영화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모든 영화를 상영하는 프리츠 랑 회고전과 스탠리 큐브릭의 인간적 면모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스탠리 큐브릭- 영화 속의 삶>(톰 크루즈 내레이션) 공개가 그것. 특히 <스탠리 큐브릭- 영화 속의 삶>은 베를린영화제 주상영관에서 최초로 상영되는 비디오 작품으로 기록되면서 디지털영화 시대 국제영화제의 변화된 미래상을 짐작케 하는 하나의 신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큐브릭은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제에서 열리는 커크 더글러스 오마주전에도 <영광의 길> <스파르타커스> 등의 연출작을 포함시키고 있어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에는 영화제 내내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전망이다.
영화제가 3일째로 접어들면서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프레스 구역은 미비한 시설에 대한 기자들의 불평, 소더버그의 <트래픽>에 대한 호평 그리고 담배연기로 점점 더 자욱해지고 있다. 분주한 것은 일반 관객도 마찬가지. 사흘 전 예매만 가능한 상영장 옆 쇼핑몰 아르카덴에 설치된 일반 매표소에는 <문 앞의 적> <트래픽> <초콜릿>을 필두로 회고전의 <닥터 마부제>, 베를린의 역사를 짚은 파노라마 상영작 <베를린 바빌론> 등의 매진을 알리는 가위표가 차곡차곡 늘어나고 있다. 매표 게시판 앞에서 만난 20대 청년 시미온은 “경쟁부문 영화는 어쨌거나 몇달 뒤면 개봉을 하니까 사실 카펫 밟는 행사 이상의 의미는 없다. 파노라마가 잘 보면 보물창고다”라면서도 <초콜릿>과 <클레임>의 표를 구한 것이 꽤 즐거운 눈치다. 기대가 이루어지는 기쁨과 황당한 실망을 맛보는 재미, 복병에 습격을 받는 스릴. 생각해보면 축제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앞으로 열흘간 이 광장에서도 누군가는 영화예술의 죽음을 개탄할 것이고 누군가는 어느 날 밤 문득 ‘내 인생의 영화’를 만날 것이다.
베를린=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경쟁부문 출품작
<베이징 자전거> (Beijing Bicycle)(중국, 왕샤오슈아이)
<베틀넛 뷰티> (Betelnut Beauty)(대만/중국, 린쳉셍)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한국, 박찬욱)
<클로에> (Chloe)(일본, 리주 고)
<이누가미> (Inugami)(일본, 하라다 마사토)
<늪> (La Cienaga)(아르헨티나, 루크레시아 마르텔)
<리틀 세네갈> (Little Senegal)(알제리/세네갈, 라키드 부카레프)
<내 누이에게> (A Ma Soeur)(프랑스, 카트린 브레야)
<펠릭스와 로라> (Felix et Lola)(프랑스, 파트리스 르콩트)
<인티머시> (Intimacy)(프랑스, 파트리스 셰로)
<무지한 요정> (Le Fate Ignoranti)(이탈리아, 페르잔 오즈페텍)
<말레나> (Malena>)(이탈리아, 쥬세페 토르나토레)
<초콜릿> (Chocolat)(영국, 라세 할스트롬)
<클레임> (The Claim)(영국, 마이클 윈터보텀)
<파나마의 재단사> (The Tailor of Panama)(영국, 존 부어맨)
<위트> (Wit)(영국, 마이크 니콜스)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 (Italiensk for Begyndere)(덴마크, 론 셔피그)
<바로 당신이야> (Una Historiade Entonces)(스페인, 호세 루이스 가르시)
<바이저> (Weiser)(폴란드, 보이첵 마르체브스키)
<마이 스위트 홈> (My Sweet Home)(독일/그리스, 필리포스 치토스)
<뱀부즐드> (Bamboozled)(미국, 스파이크 리)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미국, 거스 반 산트)
<트래픽> (Traffic)(미국, 스티븐 소더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