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미이케 다카시·곤 사토시·하라다 마사토·사카모도 준지 - 일본감독 5인이 본 일본열도와 신주쿠의 오늘
1월20일 도쿄에는 눈이 내렸다. 활발하게 문제작을 만들어내고 있는 일본감독 5인 구로사와 기요시, 미이케 다카시, 사카모토 준지, 하라다 마사토, 곤 사토시를 만났던 센츄리호텔 35층에서는, 십여개의 철도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신주쿠역이 내려다보였다. <큐어>의 구로사와 기요시를 보내고 <퍼펙트 블루>의 곤 사토시를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내다본 창 밖에는 어지럽게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창 밖 신주쿠 미나미(南) 지역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보다 기온이 높은 도쿄에서는 여간해서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도쿄에서, 게다가 유난히 기온이 높을 것만 같은 신주쿠에서 탐스럽게 쌓인 눈을 보다니.
신주쿠, 일본의 지금 여기
신주쿠를 한국에 대입시킨다면, 종로쯤 될까. 아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청량리를 끼워넣고, 다시 이태원의 일부분을 떼어다 옆자락에 붙여놓으면 어느 정도 모양이 맞는다. 신주쿠는 일본 최고의 번화가인 동시에 융성하는 환락가이고, 세련됨과 촌스러움이 공존하는 가상공간 같은 거리다. 도쿄라는 도시의 성과 속을 한번에 들여다보려면, 우선 신주쿠에 가야 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맛은 덜하지만, ‘지금 이곳’의 일본을 만나기에 신주쿠만한 곳도 없다. 신주쿠는 일본의 예술가들이 보기에도 기묘한 곳이다. 신주쿠를 배경으로 <마계도시> 연작을 쓴 소설가 기쿠치 히데유키는 신주쿠를 모든 범죄자와 나락에 떨어진 인간들이 모이는 종착점으로 그려냈다. 알 수 없는 지진으로 외부와 격리된 신주쿠는, 세상의 모든 악이 존재하는 별천지가 된다. 그건 현실에서도 비슷하다. 신주쿠 상어라는 별명의 형사가 등장하는 범죄소설 <소돔의 성자>나 최양일의 <개 달리다>는 신주쿠의 일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개 달리다>의 신주쿠는 한국인, 중국인, 동남아인, 중동인들이 육체와 마약을 팔고, 야쿠자가 모든 것을 관리하는 복마전이다. ‘X같은 일본’이라고 내뱉으면서도, 그들은 개처럼 달려야만 살아남는다.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밟히고, 당장이라도 밀려난다. ‘다국적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일본의 현실은 신주쿠가 가장 잘 보여준다.
미이케 다카시 - "계획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좋아"
<신주쿠 흑사회>란 제목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미이케 다카시는, 그런 신주쿠의 마력을 가장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일본에서 1월에 개봉한 <표류가>의 무대는 무국적의 신주쿠다. 브라질에서 온 한 남자가 중국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신주쿠에서 일본인 야쿠자, 중국인 갱과 격전을 벌인다. 그들의 사랑과 싸움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신주쿠, 오키나와, LA를 떠돌아다녀도 그들의 존재조건은 동일하다. 욕망이 우선하고, 누구나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사기도, 배신도, 의리도 하나의 생존방식일 뿐인 정글이다. 신주쿠는 날것의 욕망이 만들어낸 절대공간이다.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들끓고 있는 곳이 신주쿠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비난할 수 없다. 누구나 인정하며 산다. 도쿄는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주쿠에는 여러 가지 범죄와 지저분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주쿠의 뒷거리를 가면서 사람들은 그런 더러운 곳도 즐기게 된다, 디즈니랜드처럼.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다. 무신경?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보는 게 재미있다.”
미이케 다카시는 이마무라 쇼헤이 등의 조감독을 거쳐 91년 감독으로 데뷔했다. <신주쿠 흑사회> <극도흑사회> <일본흑사회> 흑사회 연작과 10대 야쿠자가 주인공인 <후도> 등을 만들었던 미이케 다카시는 일본의 야쿠자영화와 희극, 미국의 B급영화를 뒤섞은 기상천외한 영화를 만들었다. 미이케 다카시의 가장 놀라운 점은 1년에 V시네마(비디오용영화)를 포함하여 7, 8편의 영화를 양산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도쿄의 극장가에서는 <표류가>와 <데드 오어 얼라이브2 도망자>를 함께 만날 수 있고, V시네마도 계속 나온다. “나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다. 그냥 그럴 능력과 스케줄이 되니까 받아들이는 거다. 그게 도달점이다. 다른 장르를 만들다보면 나 자신도 신선해지는 걸 느낀다. 자기 안의 테마는 언제나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을 만들어도 감독의 세계는 투영된다.” <타임>과 <카이에 뒤 시네마> 등에서 미이케 다카시를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다. 과거와 현재, 비극과 희극, 고상함과 비속함, 비장함과 초라함 등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영화가 바로 미이케 다카시의 작품이다. “B급영화에는 의외의 만남이 있다. 우연에 의해, 계획도 추측도 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있다. 그런 것들이 좋다. B급영화에도 명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한컷, 하나의 표정, 내리는 비 같은 일부분에 흥미를 느낀다. 중고교 시절 나에게 영화란 우연을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였다.”
미이케 다카시는 지금의 일본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는 느낀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공기 같은 것. 그러나 상대가 없다, 구조적이니까. 그러나 고통은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딘가에 끼어들려고 한다. 누구나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며 만족한 상태로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의문이다. 그게 옳은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일상적인 가치관을 깨뜨리며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들.” 미이케 다카시가 신주쿠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과거에는 도쿄와 그 이외의 지방이 달랐다. 하지만 이제는 다 똑같다. 지방마다 개성이 없다. 문화적 개성없이 확산만 되고 있다. 나는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무척 질나쁜 동네였다. 문제도 많았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안에서 뭔가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점점 같아져 간다. 도쿄 사람의 대부분은 타지에서 왔다. 사실 그들 대부분이 무국적이다. 신주쿠에는 그런 무국적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런 게 바로 본성 아닐까. 자기 안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나는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서로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고 해결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감독이 ‘안 된다’라고 할 권리는 없고, 다만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 나는 남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내 영화에서는 옳다, 그르다를 표현하지 않는다. 내 영화를 본 관객이 악인에게 애정을 갖는 경우도 있다. 인간 자체는 원래 불안한 존재다. 큰 돌을 들어내면 그 아래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 영화는 그걸 부감으로 보는 거다. 스스로 판단이나 결론을 내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본사회는 이상하게 흘러간다. “일본은 모두가 보고 즐기는 것을 중시한다. 서로 봤니? 하고 물어보고 나도 봤으면 안심을 한다.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같은 영화를 봐도, 나는 아니야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세상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때로는 정반대로 꼬이기도 한다. B급영화와의 우연한 만남처럼, 미이케 다카시가 바라보는 세계란 불가해한 존재다. 로테르담영화제에 나갔던 <오디션>은 미이케 다카시 영화 중에서 의외로 정갈한 영화다. 중구난방으로 내용과 형식을 접합하고 뒤집어버리는 미이케 스타일이 아니라, 아주 정교하고 깔끔한 ‘잘 만든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자식이 성장한 뒤 한 여인을 만난다. 그는 진심으로 그 여자에게 다가가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있던 여인은 그 남자를 끔찍한 경험으로 몰고 간다.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오디션>을 본 한 관객은 미이케 다카시를 ‘변태’라고 힐난했지만, 일본에서는 의외로 중년의 남성들이 <오디션>을 많이 찾았다. 고통받는 남성에게 자신을 동일시한 것일까.
“<오디션>은 남자가 본 여자의 이야기다. 거기에서 척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다. 그냥 지나쳐버리면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그가 좋아하기 때문에 관계를 맺게 되고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인간인가에 따라 인생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진다. 그에게도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다 특수한 여자를 만난 것뿐이다. 길에서 지나가면 그냥 보통 여자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니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남자는 호의였고, 여자도 그 남자에게 한이 맺혔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서로 만나 손잡고 나아가는 미래를 생각한다. 그렇게들 믿는다. 검증된 것도 아닌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리 원해도, 전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우연한 만남이 있고, 우연한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미이케 다카시는 그런 우연한 조우를 원한다. “영화는 나의 것이고, 내 방식대로 만든다”는 미이케 다카시의 다음 작품은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 리메이크다. 한참 생각을 하다가 뮤지컬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대로 옮길 예정이다. “미리 가치관을 만들면 안 된다”는 지론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의 10대가 영화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다고. 이제 웬만큼 성공하여 ‘큰’ 영화도 만들 여력이 있는 미이케 다카시는 그동안 꼭 만들고 싶었던 시대극에 도전한다. 미리 싸구려로 훈련을 해보고, 내년쯤에는 규모가 꽤 큰 시대극을 만들 계획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 "죽음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B급영화로 잔뼈가 굵은 미이케 다카시와 달리 구로사와 기요시는 정통파다. 젊은 시절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이론에도 정통한 유럽영화광이었다. 영화감독으로의 출발점인 로망포르노 <간다천 음란전쟁>(1983)은 당시 일본의 사회 문제로 떠오른 수험생의 근친상간을 계급 문제와 얽어맨 야심적인 작품이었다. 그뒤 <스위트 홈> <지옥의 경비원> 을 거쳐 97년의 <큐어>까지 주로 공포영화에 천착해왔다. 유럽영화광이 공포영화에 매혹당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어릴 때부터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고지라>에서 고지라가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을 보고 무척 놀랐다. 또한 예전부터 죽음에 흥미가 있었다. 그걸 테마로 하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공포영화였다.” 1월에 개봉된 구로사와 키요시의 신작 <회로> 역시 공포물이다. 이번에는 통신을 매개로 유령이 도쿄 시내에 출몰한다는 섬뜩한 이야기다. “지금까지의 귀신영화와는 포지션이 약간 다르다. <링>에서 보이듯 주로 한이나 복수를 위해 유령이 나타나지만, <회로>에서는 끝까지 귀신의 목적을 알 수 없다. 도쿄에 점점 귀신이 늘어나고, 인간은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가 붕괴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자신의 영화를 말하면서 ‘신주쿠’를 예로 든다. “신주쿠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유령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는 결코 죽음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포영화에서 귀신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한 10년 전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귀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상 속의 귀신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옛날에는 무덤이나 폐가 같은 특정 공간에서만 귀신이 나왔지만, 이제는 일상에서 출몰한다. 나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게 더욱 공포심을 자극한다. 유령이 에일리언이나 몬스터 같은 존재라면 취하는 행동은 간단하다.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인간적인 행동을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모습의, 우리 주변의 유령은 그럴 수가 없다.”
”유령은 곧 죽음이다. 유령을 본다는 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과 직면한다는 뜻이다. 일상의 공포이며 세상 자체가 공포라는 것.”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공포영화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죽음’에 대한 환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영위하는 것들에 대한 ‘일깨움’인 것이다. 유령은 단지 악이 아니고, 인간은 선이 아니다. <큐어>에서 연쇄살인범은 인간의 마음속에 아주 작게 자리잡고 있던 불만과 분노를 증폭시켜 타인을 살해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결코 예외의 법칙이 없다.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오듯이, 누구에게나 살의는 존재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다. 함께 존재하고, 변해간다. 오늘은 선이지만 내일은 악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히어로는 그렇지 않다. 나의 영화에서는 처음과 끝의 주인공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건 주로 추락의 과정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나와 비슷한 인물’이었다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잘 살아가다가 어딘가로 떨어져가는 인물. 누구나 부인, 동료 등 여러 가지 관계로 얽혀 있다가 하나하나의 관계에서 멀어지며 별개가 된다. 소외가 되는 것이다. 누구는 그걸 비극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비극도 불행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리되었을 때 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법률, 상식, 도덕 등에서 분리되면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일본사회는 바로 그 과정을 거쳐왔다. 모든 것이 극도로 과장되었던 80년대의 거품경제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고 끝까지 유지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대기업 도산, 명예퇴직, 옴진리교 등등의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누구에게나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게 90년대 일본 공포영화의 부흥을 불러온 한 가지 이유다. “어느 날 깨닫지 않을까, 불안하다고.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대기업이 도산하면서 모든 것이 깨졌다.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던 것이 과거에는 허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늘 불안하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위탁하는 이들을 바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사회는 세계에서 대표적으로 ‘싸우지 않는’ 사회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불공정한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일본영화도 마찬가지다. 예리하게 인생이나 세계의 의미를 통찰하는 영화는 많지만 구체적인 사회의 모순과 맞서지는 않는다. 이타미 주조가 <장례식> <마루사의 여자> <민보의 여자> 등에서 보여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나 공격성은, 요즘 일본영화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모순 뒤에 중첩된 모순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일본은 그 ‘숨겨진 뒤’가 많다. 그래서 구체적인 테마를 다루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일본은 구체적인 모순 같은 것이 있어도 그걸 고발,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게다가 영화는 더더욱 만들지 않는다. 일본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영화 오타쿠다. 돈도 안 되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다. 그런 문제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든다.” 선진국이 된다고, 문명이 발달한다고 반드시 좋은 쪽으로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숨기거나 잊으려고 현대문명이 쓰일 때에는 문제가 된다. 그것을 알기 위해 쓰이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주로 전자로 활용한다.”
곤 사토시 - "허구가 흐르면서 현실이 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모든 영화가 어떻게든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좋건 싫건 현실을 반영한다. 거리나 배우들이 모두 현실이니까. 현실이 바뀌면 영화도 바뀌게 마련이다. 그게 싫다면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된다. 그런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이 혼돈스러우니까 영화도 혼돈스럽다. 영화는 21세기에 더욱 혼돈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에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퍼펙트 블루>의 곤 사토시는 반발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애니메이션은 손으로 그리는 불편함이 있는 대신,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퍼펙트 블루>를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걸 실사로 했을 때 애니메이션만큼의 리얼리티가 나올 것인지는 의문이다.”
지금 곤 사토시는 1억4천만엔 예산으로 <천년여우>라는 작품을 준비중이다. 한때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여배우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데,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의 장면들이 하나씩 연결되는 독특한 형식이다. 아이돌 여배우가 현실의 자신과 조작된 이미지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던 <퍼펙트 블루>와 유사하게 <천년여우>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와 에피소드는 다 허구다. 허구가 흐르면서 현실이 된다. 그런 모자이크 같은 느낌. 그게 실재면 된다. 거짓으로 엮어 이은 진실이라고나 할까.” 곤 사토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장르에서, 다시 실재와 가상을 뒤섞는다. 장르 자체의 허구성이 다시 이야기의 허구성, 형식의 허구성과 뒤섞여 묘한 느낌을 전달했던 <퍼펙트 블루>는 일본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느낌을 환기시킨다. 서구에서 바라볼 때 일본은 과거와 미래, 전통과 혁신,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상한 곳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모든 이야기와 표현이 가능하듯이, 일본이란 나라 역시 ‘허구’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일본의 영화 역시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부천영화제에서 <상어 피부의 남자와 복숭아 소녀>라는 기괴한 제목의 영화를 선보였던 이시이 가쓰히토의 신작 <파티7>의 예고편은 미국풍의 애니메이션과 미이케 다카시풍의 B급액션활극과 코미디, 조잡한 사이버펑크 스타일의 세트와 의상이 어울리며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보는 순간 황홀한 느낌이 들 정도로 현란하고 활기넘치는데, <파티7>에서 ‘무국적’이란 의미는 분명 긍정적이다. 신주쿠가 그렇듯이. 미이케 다카시가 “누구도 적극적으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최근 10, 20년간 일본영화는 사양이라고 하는데 만드는 입장에서는 그것도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이렇듯 동서고금의 잡다한 것들이 난교하는 ‘자유’로운 영화들이 만들어진다. 신주쿠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욕망을 분출하며, 뒤죽박죽으로 살아가듯이.
사카모토 준지 - "모든 이와 소통할 필요 있나"
그러나 그 자유로움에도 절도는 있다. <멍텅구리 천사> <얼굴> <신 의리없는 전쟁> 등으로 매년 부산을 찾았던 사카모토 준지가 대표적이다. <때려줄까보다>로 데뷔한 사카모토 준지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자가 ‘폭력’으로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다. “누구나 좌절하게 마련이고 바닥에 떨어졌을 때 부활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고 거친 말을 쓴다. ‘재생’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이다. 그런 고전적인 영웅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보다 조금 강한 남자를 고른 것이다. 하지만 <신 의리없는 전쟁>에서 에쓰시가 맡은 남자는 약간 ‘약해졌다’, 전과는 달리.”
사카모토 준지는 일본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약을 먹거나 계단에서 구르기도 했다. “좌절감에서 시작”한 사카모토 준지는 “분함, 억울함을 극복하려 영화를 만들었다. 내 안을 보여주고 싶어서 만든 거다. 관객 이전에 내가 중심이었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이유없이 타인을 살해하는 범죄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일본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힘이 지배하는 일본사회를 싫어한다. “조직 속에서 권력다툼을 하는 인간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인간인가. 정치가나 병원 같은 데서 이전투구하는 인간들. 그들은 욕망, 권력, 돈으로 움직이는 인간들, 작은 개인들이다.” <신 의리없는 전쟁>도 그들을 영웅시하기보다는 냉정한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다. “야쿠자영화의 폭력묘사는 아주 싫다. 폭력은 애정과 연관되어 있고, 표리일체다. 야쿠자의 폭력은 싫고 그 쾌감을 관객이 느끼게 하는 것도 싫다. <신 의리없는 전쟁>은 부정하는 야쿠자영화라고나 할까.”
일본사회, 문화에 폭력이 과다한 것을 사카모토 준지는 “사람들이 정부나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영화를 통해 스트레이트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에는 일반인의 폭력도 많아졌다. 일본사회의 병이 표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사카모토 준지의 영화가 폭력을 예찬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폭력’을 중심에 두고 내면에 침잠해 있었던 면이 많았다. 하지만 사카모토 준지는 이제 도약을 준비중이다. “나에게는 아웃사이더적인 면이 많다. 솔직히 좀더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스트레이트하게 가지 않고, 조금 침착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폭력만을 다루지 않고, 사회를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전에 필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다. “일본인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습관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영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대화다. 그것은 반드시 다수가 될 필요도 없다. “모든 이와 꼭 소통이 될 필요가 있는가. 아웃사이더의 태도가 오히려 필요하다. 11살 여자아이가 <얼굴>을 보고 앙케트에 바로 접니다, 라고 썼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영화가 인생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 그게 ‘영화의 힘’ 아닌가.”
하라다 마사토 - "언제나 전투적인 자세로"
사카모토 준지가 자신의 의지를 앞세우며 끈질기게 조금씩 ‘사회’ 속으로 파고들었다면, <가미가제 택시> <바운스> <금융부식열도 주바쿠>의 하라다 마사토는 노골적으로, 공격적으로 ‘시스템’을 부정한다. 하라다 마사토는 일본의 감독도제 시스템이 싫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고, 영화평론가로 시작하여 영화감독이 된 특이한 케이스다. <건헤드> <하트브레이커 야쿠자> 등 다양한 장르영화를 만들다가 역이민한 일본계 남미인의 문제를 다룬 <가미가제 택시>, 10대의 원조교제 문제를 그린 <바운스> 등으로 유명감독 반열에 올랐다. 하라다 마사토의 영화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메이저영화 <금융부식열도 주바쿠>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금융부식열도 주바쿠>는 부패한 금융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보통’ 샐러리맨의 투쟁을 그린 영화다. “<금융부식열도 주바쿠>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를 많이 의식했다. 흉내라기보다는 지금 일본에서는 이런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군중신 같은 경우는 구로사와 아키라에게서 많이 따왔다. <천국과 지옥>의 캐릭터를 그대로 빌려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70년까지의 할리우드영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하라다 마사토는 보통의 일본인과 달리, 타인이나 구조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을 한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부패한 리더다. 신작인 <이누가미>는 부패한 리더 때문에 사회가 어떻게 멸망해가는가를 보여준 영화다. 일본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데 비해, 국민들이 분노하는 레벨이 낮다. 자민당에 화도 잘 내지 않는다. 국민들이 계속 말을 해야 한다. 나는 그걸 영화로 하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비판능력이 없다. 그들은 깨우쳐 주기를 기다리는 상태”라는 말은 지나치게 계몽주의적으로 들리지만, 하라다 마사토의 작품은 말보다 앞선다. <바운스>는 원조교제 문제를 다루면서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선정주의적으로 끌고 가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일본영화다. “<바운스>는 위에서가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젊은 세대와 커뮤니케이션하면서 만든 영화다. 젊은이들이 <바운스>를 좋아한 것은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 자신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바운스>는 10대의 원조교제를, 그들의 관점에서 솔직하게 다룬다. 소년범죄를 다룬 <피스톨레로>도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분명하게 담”을 생각이다.
“영화가 크게 사회를 움직일 수는 없어도 2, 3명만 움직인다면 의미가 있다. 감독은 언제나 전투적인 자세로 맞서야 한다”고 말하는 하라다 마사토는, 일본에서는 여전한 외국인이다. “나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한다. <주바쿠>를 만들면서도 영화사와 계속 싸웠다. 나는 아직도 외국인이고, 시스템에 속해 있지 않다.” 일본에서 사회와 구조적인 모순과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와, 나 자신과 싸운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 역시 ‘유령’과 싸우는 일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벽을 돌아가고, 유령을 못 본 척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때로 감탄할 일이 아닐까? 특히 신주쿠, 이 저속하게 들끓는 지옥도에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도쿄=김봉석 기자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