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그러나 순수한 리얼리즘에 경배
감독, 시나리오...이창동
올해의 영화순위에서 근소한 차이로 1, 2위를 기록한 <박하사탕>과 <오! 수정>은 감독 선정에서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창동 감독을 꼽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끈질기고 집요하며 사유의 힘을 담아내는 미장센”(유지나), “시대증언, 그 치열한 리얼리즘의 작가정신”(박평식). 이창동 감독은 80년 광주의 기억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80년 5월에 휴교령이 떨어졌을 때 난 4학년이었다. 친구집에 가서 세명이 고스톱을 쳤다. 그중 한명이 나중에 혼자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잡혀갔다. 우리가 고스톱 치고 있을 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뒤에 알았다. 어떻게 우린 그랬으며 어떻게 광주에선 그랬을까. 몇 시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상처를 짊어진 사회에 이상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 잔인성을 직접 말하지 않고 이걸 거쳐가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박하사탕>을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또는 곤혹스럽게 만드는 ‘잔인한 형식’의 내러티브”라고 평한 홍성남씨의 말은 이창동 감독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한 청년이 철저히 망가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거슬러올라가며 보는 일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것이 가장 우회적이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그 시대를 증언하는 일이라는 것을 <박하사탕>은 여실히 보여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전업한 그는 전통적 이야기체 영화를 고수하며 리얼리즘 미학의 믿음을 실천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가장 낡은 방식으로 영화 만드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 속에 진정성을 담는 게 내 일이라고 믿는다”는 그의 말은 시대에 뒤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아니라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굳은 의지를 확인하게 한다. 올해의 시나리오로 <박하사탕>이 선정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문학의 뿌리깊은 전통에서 뽑아낸 시적 감성과 서사적 유장함이 살아 있다. 그것은 아무리 영화가 첨단영상으로 덧칠된다 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일 것이다.
프로듀서 부문에서 심재명, 이은을 지목한 숫자는 압도적이다. 그만큼 올해 명필름은 두각을 나타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엄청난 흥행도 흥행이지만 <공동경비구역 JSA>와 <섬>은 각기 베를린과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프로듀서로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꿈인 흥행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한해였던 셈이다. 둘의 성공은 흔히 마케팅과 제작능력의 조화가 낳은 결과로 평가된다. 일찍이 <결혼이야기> <그대 안의 블루> <게임의 법칙> 등을 흥행시키며 마케팅의 귀재로 소문난 심재명과 장산곶매 출신 감독 겸 프로듀서 이은의 결합은 <접속>의 성공부터 승승장구였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 기대만한 결과를 낳지 못했지만 <조용한 가족> <해피엔드> 등은 명필름의 안목과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결과만 놓고보면 철저한 기획영화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사실 명필름의 영화들이 단순히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로 나온 작품으로 보긴 힘들다. <조용한 가족>이나 <해피엔드>는 묻혀 있거나 무산될 뻔한 시나리오와 감독을 발굴한 경우이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영화인 대부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기획이었다. 심재명, 이은 두 프로듀서의 강점은 영화를 보는 정확한 판단력과 기본기를 지키는 합리적 제작시스템에 의존하는 바 크다. 심재명, 이은의 올해 성공을 예외로 볼 수 없는 이유도 그들의 이런 재능이 여러 차례 작품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기획, 마케팅, 제작능력을 고루 갖춘 명필름의 행보는 이제 싸이더스 우노필름이나 강제규필름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촬영... 정일성
<춘향뎐>의 정일성, <반칙왕>의 홍경표, <오! 수정>의 최영택, 세 사람이 각축을 벌인 촬영감독 부문에선 <춘향뎐>이 최고로 뽑혔다. 오랜 세월 임권택 영화의 카메라를 잡아온 정일성 촬영감독은 <춘향뎐>에서 한국적 빛과 색의 조화를 잡아냈다. “낙조의 여유롭고 은은한 빛이 만져진다”(박평식), “은은하고 격조있는 이미지의 힘”(유지나), “유려한 한복의 곡선미같이 구비구비 흐르는 빛의 향연”(심영섭) 등 <춘향뎐>의 화면이 보여준 한국적 아름다움에는 장인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하고도 깊이있는 우아함이 있다. 90년대 후반 급격한 세대교체를 겪으면서 입지가 좁아져가는 노장 촬영감독 가운데 정일성 촬영감독의 건재는 반가운 일이다.
<춘향뎐>은 급격한 카메라 움직임 없이 느리게 움직이며 처마, 기와, 대들보, 섬돌을 어루만지듯 보여주고 단오에 그네타러 나온 처녀들을 넋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춘향을 잡으러 가는 포졸들을 비출 때는 유머러스하게, 태형장면에선 아픔과 코믹함이 병존하게, 암행어사가 출동할 때는 격정적으로 움직이면서 빛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정일성의 촬영은 에로틱한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병풍과 미닫이문을 살린 춘향과 이도령의 정사신은 배우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며칠간 되풀이된 걸로 알려졌다. <르 몽드>의 기자 장 미셸 프루동은 “<춘향뎐>은 한국적 미감을 극대화한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이전의 어떤 한국영화도 이만큼 총체적으로 한국인의 미감을 전해준 사례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정일성 감독의 카메라가 한국적 미감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강호와 <박하사탕> <단적비연수>의 설경구는 공동으로 올해의 남자배우로 선정됐다. 오랫동안 가난한 연극배우로 실력을 다진 두 사람이 올해의 감독으로 꼽힌 이창동 감독의 파트너였다는 사실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쉬리>에서 다소 부진했던 송강호는 <조용한 가족>에 이어 두 번째 같이 작업한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에서 코믹연기의 정수를 보여줬다. 혼자 드라마를 끌고 가는 부담이 무색하게 그는 <반칙왕>의 무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 섞인 발성은 배우로서 치명적 단점이 될 수 있는데 역으로 송강호는 그것을 고유의 장점으로 바꿔놓았고 기꺼이 우리 시대의 광대가 됐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그가 연기한 노련하면서도 인간미넘치는 북한군인은 송강호의 소탈한 이미지와 자연스러움 없이 동화되기 힘든 인물이다. 철통 같은 반공이데올로기도 송강호 앞에선 맥을 못 추는 듯 보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송어> <유령> 등에서 빛나는 조연을 했던 설경구는 <박하사탕>에서 온몸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는 인간의 이중적 면모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배우로 보인다. <박하사탕>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는 한 장면에서도 악마와 천사의 표정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연기자인 것이다. <단적비연수>에서 그가 맡은 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그에겐 <박하사탕>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설경구의 발견은 올해 영화계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다.
여자배우...이미연
올해 <주노명 베이커리>와 <물고기자리>에 나온 이미연은 두 작품 모두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외면당하는 바람에 빛을 못 봤지만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영화계에 단비가 된 연기자다. <물고기자리>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향한 열정 때문에 영혼에 치명적 상처를 입는 여인 애련으로 등장했다. 온전히 애련의 쉽게 내색할 수 없는 감정적 떨림에 의존하는 이 영화에서 이미연은 창백하고 무료한 여인의 일상을 과장없이 그려낸다. 그리고 격정으로 치닫는 후반부에선 깨진 유리를 서슴없이 밟으면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걸어가는 광기까지 보여준다. 단순히 예쁜 배우로 인식되던 선입견을 여지없이 허무는 것이다.
사실 연기경력 13년인 베테랑 배우이면서도 이미연은 과거 하이틴 스타의 이미지와 결혼 뒤 주어진 배역 사이에서 정당한 몫을 찾지 못했다. <물고기자리>가 영화적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한다 해도 이미연 개인에겐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현재 출연중인 영화 <인디언썸머>에서 그녀는 사형을 목전에 둔 여인으로 나와 변호사와 시한부 사랑을 나눈다. 이미연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점이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연기하게 될까봐, 멈춰 있게 될까봐 그게 겁난다”고 말했다. 이미연이 지금 성큼성큼 앞으로 내딛고 있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