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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장면들온다체: 윌라드가 킬고어 대령의 서핑보드를 훔치고 보트로 뛰어들어가 어린아이처럼 웃어대는 새로운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많이 바꿔놓았다. 여기서 윌라드는 사춘기 소년과 다를 바 없다. 전체 스토리를 통틀어 윌라드가 가장 행복한 대목이기도 한 이 장면은 우리가 품고 있는 윌라드라는 인물의 초상에서 다른 부분까지 흔들어놓는다.머치: <니노치카>를 어떻게 홍보했던가? `그레타 가르보가 웃었다!`라는 카피였다.온다체: 수상스키장면을 뒤쪽으로 옮기면서 흥분과 희열이 생겼다. 현실적인 필요가 충족되면서 좀더 강력한 느낌이 생겨난 것이다.머치: 1979년판에서 수상스키장면은 킬고어 대령이 나오는 시퀀스들 전, 그러니까 훨씬 앞부분에 나온다. 우리는 <…리덕스>에서 이 신을 원래 시나리오가 배치한 자리, 플레이보이 바니 쇼 다음 순서로 옮겼다. 1979년 버전에는 `이 보트, 이 병사들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사납고 미쳐 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랜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탄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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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 나란히 누운 여인에게 속삭이듯온다체: 윌라드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마이클 헤르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있었나? 아니면 나중에 추가된 것인가.머치: 내레이션은 존 밀리어스의 원본 시나리오에 있었다. 윌라드는 본디 내면의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77년 8월에 내레이션을 삭제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우리는 본래 12월 개봉을 위해 4개월 안에 영화를 마치게 돼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영화가 처한 상태를 고려할 때 비현실적인 스케줄이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12월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보았다면 유일한 방법은 내레이션을 되살리는 거였다. 앞서 말했듯 윌라드는 소극적이고 불명료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보이스오버는 더 필요했다. 그가 관객에게 대놓고 말하지도 않고 별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내레이션의 매개를 통해서니까. 결국 내레이션 아이디어가 채택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온다체: 마이클 헤르는 뒤에 내레이션을 수정하도록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탄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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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기사 월터 머치가 소설가 마이클 온다체에게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탄생을 이야기하다 월터 머치는 할리우드의 진짜배기 괴짜다. 진정한 지식인이며, 영화 창작의 다채로운 폭풍 중심에 서 있는 지혜롭고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머치는 <청춘낙서> <도청> <대부> 시리즈와 <프라하의 봄> <잉글리시 페이션트> <리플리> 같은 영화에서 음향과 편집, 또는 둘 중 하나를 맡았다. 2년 전에는 오슨 웰스가 스튜디오에 보냈으나 무시된 58쪽짜리 메모에 기초해 <악의 손길>을 재편집했으며 `선(禪)과 편집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 <눈을 깜박이는 동안>(In the Blink of an Eye)이라는 제목의, 영화 만드는 이와 관객 못지않게 글쓰는 사람들과 독서가들의 관심도 끌 만한 책을 내기도 했다.작가인 나는 한권의 책을 만드는 작업의 마지막 2년은 편집에 투자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바 있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탄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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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DVD를 출시할 때 삭제되었던 장면을 집어넣는다든가 다시 편집하는 게 유행처럼 되었지만(계약서에 DVD를 만들 때에는 감독의 요구대로 재편집한다는 규정을 넣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디렉터스 컷’을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작사가 마음대로 편집을 하거나, 소수 관객의 반응이 너무나 뜨거워서 뭔가 새로운 팬서비스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 잘린 장면 등을 추가하여 ‘디렉터스 컷’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이유는 제작사의 간섭이다. 상영시간이 너무 길거나, 관객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리면 따로 편집기사를 불러다가 독자적으로 편집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에 격분한 감독이 제작사와 너무 심하게 싸우다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할 경우에는 ‘감독 앨런 스미디’라는 타이틀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찍기는 했지만 ‘이건 내 작품이 아니오’라는 뜻이다. 이 정도까지 악화일로를 걸었을 때에 감독이 다시 ‘디렉터
영화사에 등재된 디렉터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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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의 씨앗은 남가주대(USC) 동창인 조지 루카스와 존 밀리어스가 뿌렸다. 베트남전쟁을 무대로 한 강박적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던 그들에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조셉 콘래드의 1902년작 소설 <암흑의 심장>을 각색하라고 권했다. <암흑의 심장>은 오슨 웰스도 영화화를 기획했던 소설. 웰스는 연출은 물론 커츠와 말로우(<지옥의…>의 윌라드에 해당하는 인물)를 1인2역으로 연기하고 영화 전체를 말로우의 1인칭 시점 숏으로 찍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했다. 밀리어스는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코폴라의 조감독이었던 루카스는 코폴라가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고 느끼고 <스타워즈>를 연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옥의 묵시록>은 결국 코폴라의 손에 안착했다.<지옥의 묵시록>의 필리핀 촬영은 ‘피크닉 가듯 해치우자’고 생각한 코폴라의 예상과 달리, 제작진 전체를 파월된 미군
오리지널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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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오리지널에서 49분 추가, 코폴라의 예술적 야심을 보다 완벽하게 담아낸 걸작 어느 영화 감독의 고백에 따르자면, 영화를 완성하는 감독은 없다. 감독들은 다만 어떤 단계에 이르러 영화를 ‘포기’할 뿐이다.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아마 역사상 누구보다 어렵게 영화를 ‘포기’한 감독일 것이다.1979년 봄 코폴라는 16개월에 걸친 전쟁과도 같은 촬영과 2년여의 편집을 마치고 오리지널 <지옥의 묵시록>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묵시록은 종말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결말 처리에 대한 고민을 “손톱으로 유리벽을 기어오르는 것 같다”고 표현할 만큼 코폴라는 고통받았다. 한편의 영화가 그토록 엄청난 시간을 삼키고 많은 스캔들을 토하는 괴물이 된 광경을 본 경험이 없었던 1970년대 말의 언론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와중에, 코폴라는 경솔하게도 결말에 대한 불안을 외부로 흘렸고 아니었으면 아무 생각 없었을 평론가들은 눈에
<지옥의 묵시록> Now and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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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강행군이라 스탭들의 불만도 많았을 텐데.= 불만이 많이 쌓였을 텐데 밖으로 표출한 적은 없다. 촬영분량 중에 진립이 별장 가남에게 “그토록 고향에 가고 싶은데도 막상 고향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그저 이 끝도 없는 행군이 어서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보고 있던 스탭들이 눈시울을 적셨을 정도로 힘들긴 했다. 사막의 경우 기온이 50도 정도 되는데 더위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하니 탈진한 스탭도 많았다. 많이 지쳤을 것이다.+ 그럴 땐 잘 다독이고 그랬나.= 절대 그렇지 않다. 다독여서 어떻게 영화를 찍겠나.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다독인다며 시간을 낭비한다면 일 끝나고 오히려 그들이 잘못했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힘들 때, 독려한다고 뭘 하는 게 아니라 조 이사와 내가 먼저 뛰었다. 사실 아닌게아니라 꼭 그래야만 했나 하는 반성도 든다. 좀 심하긴 심했는지 나이 50쯤 된 중국 제작부장이 우리 스탭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하더라. “너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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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비트>의 편집실에서 출발한 <무사>는 김성수 감독이 그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프로젝트였다. 그가 당시 프로듀서였던 조민환 싸이더스 이사에게 펼쳐보인 이 영화의 내용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극한 상황에서 조그마한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3년하고 몇달이 지난 뒤 김성수 감독은 극중 주인공들처럼 중국 대륙에서 500명이 넘는 남자, 그리고 여자들과 함께 <무사>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가며 험난한 5개월의 여정을 버텨냈다. 이후 6개월이 넘는 후반작업까지 포함하면 <무사>는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눈물과 환희의 반복 속에서 그와 동고동락했던 셈이다. 개봉을 앞둔 그의 표정에서 긴장이나 기대 외에 허전함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성된 작품을 보니 어떤가. 애초의 생각과 비교한다면.= 처음 시작할 때는 항상 걸작을 꿈꾸는데 나올 땐 늘 졸작이 된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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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감독 정두홍한국영화의 액션이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은 정두홍 감독이지만, <무사>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의 액션스쿨 멤버 17명 전원이 참여해 수많은 부상에 시달려야 했던 <무사>의 촬영은 두배로 힘든 작업이었다. 워낙 빡빡한 스케줄에다 거의 모든 장면이 액션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당연한 일. “아무리 액션영화라 해도 보통 15번에서 20번 정도 촬영하면 되는데 이번엔 112회 촬영 중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하지만 이보다 그를 괴롭혔던 문제는 액션의 스타일이었다. 그와 김성수 감독이 애초 설정했던 액션 스타일은 와이어를 쓰지 않고, 임팩트가 있으면서 힘이 넘치는 것이었다. “일본의 , 미국의 <벤허>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스타일을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액션이 그대로 담겨 있는 <글래디에이터>를 본 뒤 모든 계획을 틀어야만
<무사> 스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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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제작과정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규모다. 무사가 남기고 간 숫자만 살펴봐도 비용과 제작진이 흘린 땀이 얼마쯤인지 짐작이 간다.5=기상시간.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야 했던 스탭들에겐 지옥 같은 숫자.20=다음날 아침까지 촬영이 이어진 날짜 수. 이렇게 24시간 작업한 다음에도 휴식은 반나절도 채 주어지지 않았다.149=2000년 8월6일 크랭크인, 12월22일 크랭크업할 때까지 촬영기간의 일수. 사막의 모래바람과 엄청난 더위, 그리고 혹한이 동반했다.300=최대 스탭 수. <무사>의 스탭은 적을 땐 120명, 많을 때는 300명에 이르렀다. 웬 중국 여인이 촬영장을 한동안 따라다녔는데 모두 그녀가 스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얼굴들을 익히지 못한 현장상황이 빚어낸 촌극.4,000=촬영해온 총 컷 수. 1초라고만 잡아도 66분40초에 달한다.14,900=아침식사 대용 컵라면 개수. 200명의 스탭 중 절반만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
숫자로 본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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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영하회족자치구 중웨이(中衛) : 2000년 7월5∼7일. 테스트 촬영.② 베이징시 베이푸퉈(北京市 北普陀) : 8월6∼7일. 크랭크인. 난징가도 세트. 명으로 향하던 고려 무사들 간첩 누명쓰고 저지당하다.③ 베이징 근교 샹산퇀청(香山團城) : 8월9일. 사신단 및 무사, 무장해제당하다.④ 영하회족자치구 중웨이 : 8월14∼21일. 명에 의해 귀양 떠나던 사신과 무사 행렬, 원군에게 습격당하다.⑤ 영하회족자치구 인촨시 수이둥거우(水洞構) : 8월23∼29일. 무사 일행, 고려를 향해 사막을 횡단하기로 하다.⑥ 인촨시 타오러(陶樂) : 8월30일∼9월8일. 무사 일행, 사막에서 객잔을 발견하다. 부용 공주를 납치해가는 원군도 만나다.⑦ 인촨시 빙거우차오(兵構橋) 계곡 : 9월10∼18일. 부용 공주를 구출하다. 무사 일행, 난징으로 향하다.⑧ 내몽고자치구 싼관(三關) : 9월19∼27일. 원군, 부용 공주를 되찾기 위해 뒤쫓다. 원군과 무사 일행의 대추격전 펼쳐지다.⑨ 타오러 : 9
<무사>가 달려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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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 여솔(사신단 부사인 이지헌의 노비)김성수 감독의 영화 속 자아 격인 그는 <무사>에서 폭발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는 스탭들의 흉내를 내는 등 쾌활한 청년이었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며 보는 이를 오싹하게 할 정도로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강한 연기를 펼쳤다. 중국 프로듀서 장샤도 그를 두고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진지한 연기태도를 보여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주진모 / 최정(왕실 경호대 용호군의 장군)독선적인 성격으로 무사 일행을 고난에 빠뜨리지만, 부용공주를 향한 뜨거운 애정이 밉지 않은 최정 역의 주진모는 다른 배우들보다 늦게 캐스팅돼 촬영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현장에서 장군옷을 입고 에어로빅춤을 추거나 고글을 쓰고 마징가 흉내를 내는 등 분위기메이커를 자임했다.안성기 / 진립(평민으로 구성된 주진군의 하급무사)무사 일행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진립 역의 안성기는 촬영장에서도 큰형 같은 존재였다. 가장 일찍 나와 가장
<무사>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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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6일<무사>의 마지막 촬영지인 씽청으로 간다. 베이징에서 차로 6시간. 후팅샤오가 지은 토성은 수백년 시간의 손길이 쓸고 지나간 듯 거기 서있다. 고려의 아홉 무사들이 고향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해안토성에 도착했듯 우리 스탭도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덜덜 떨리는 이 추위에 우리는 비까지 뿌려가며 촬영을 해야 한다. 다들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물러설 곳이 없다.2000년 11월10일눈이 와서 이틀간 촬영을 못했다. 눈이 오는 걸 보며 스탭들이 술렁인다. ‘올해 집에 돌아가기 힘들겠구나’ 하는 표정이다. 스케줄이 말썽이다. 장쯔이와 우영광(몽고군 장군 람불화 역)을 내년까지 붙잡을 수 없다. 둘 다 12월에 다음 영화 스케줄이 시작된다. 날씨도 문제다. <무사>에는 눈오는 장면이 없는데 12월 들어가면 눈 때문에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년에 다시 와서 찍는다? 있을
<무사> 제작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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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5일밤장면을 찍을 때 보통 촬영 종료시간은 새벽 5∼6시. 그런데 오늘은 3시30분에 끝나버렸다. 일찍 끝났다는 사실에 좋아하며 정리하려고 하는데,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촬영감독님, 한번만 더 가죠.” 분명 OK사인을 내렸는데 다시 찍자는 감독의 말에 김형구 촬영감독이 왜 그러는지를 묻자 감독이 악동 같은 얼굴로 대답한다. “너무 일찍 끝났어….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 찍기로 한 시간까지는 찍어야 되잖아.” 어이없어하는 촬영감독, 조명감독 그외 모든 스탭, 배우들. 감독은 여전히 애처럼 떼를 쓴다. “촬영감독님, 한번만 더 가자니깐…. 가야 돼∼.”2000년 9월6일새벽에 촬영이 조금 일찍 끝났다고 오전에 다시 기상해서 오후 촬영에 들어갔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스케줄이 밀리고, 제작비는 초과하고, 그러다보니 강행군을 멈출 수 없고….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다. 내일은 또 5시 기상이다. 한달이 지났는데 30%도 못 찍었다.2000년 9월12일추석이다.
<무사> 제작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