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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은 스톡홀름의 한 평론가를 직접 대면하게 되자, 쌓인 분노를 모아 주먹을 날린 일이 있다고 전해진다. 오슨 웰스의 거의 모든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형식이 너무 앙상하다, 너무 장식적이다, 너무 연극적이다 등의 다채로운 험구를 들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와 평론가들은 자신의 판단을 마음대로 유포할 수 있는 반면, 기록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복수는 언제든 그들의 현관문을 노크할 수 있다. 그러고보면 세월의 시험쯤 간단히 통과하는 거장들에게 몇몇 악평은 경력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후일 한 영화의 미덕으로 칭송받는 요소가 당대에는 악평의 근거로 인용되는 경우. 아서 펜의 <보니와 클라이드>(1967)는 <버라이어티>로부터 “살인과 대공황은 코미디의 소재가 못 되고 캐릭터는 일관성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타임>은 “사실과 허풍의 뒤범벅이 희가극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주인공들처럼 좌충우돌 끝에 구멍투성이로
악평세례를 받은 걸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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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9월13일 개봉, 정지영 감독
정지영 감독은 “이번엔 돈 벌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품어봄직한 희망이었다. 최민수, 강수연의 투톱에다, 섹스와 음모가 교차하는 축축하고 숨가쁜 이야기. 사회파로 나선 뒤 좋은 평판을 얻었으나 정작 관객의 큰 박수는 못 받았던 정 감독에게 이 프로젝트는 흥행을 완벽하게 정조준한 것처럼 보였다. 화살은 어이없이 빗나갔다. 97년 추석에 개봉했으나, 1주일을 고비로 간판이 떨어졌다. 언론도 외면했고 비평적 주목도 받지 못했다. 비디오로 출시되면서 <블랙 잭>의 진가를 비로소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너무 늦었다.
<씨네21>이 틀렸다고 말하긴 힘들다. “미스터리 장르의 걸작 계보에 오르진 못하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이 장르의 한국영화 중 가장 수준 높은 상품”(122호)이라고 이미 개봉 당시에 평했다. 그러나 우리는 <블랙 잭>이 좀더 후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영화에서
<씨네21>이 틀렸다 - <블랙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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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21일 개봉, 조지 후앙 감독
“사랑으로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는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의 원제는 ‘악어들과 헤엄치기’(Swimming with Sharks). 악어는 생존 경쟁의 단련된 투사들, 구체적으로는 냉혹한 할리우드 제작자들을 은유한다. 그러니 이 헤엄은 생사를 건 투쟁이 된다. 자리 하나를 위해 살인도 경쾌한 플롯의 리듬에 묻어버리는 잔혹한 투쟁.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는 그걸 비판하는 척하면서, 그 스스로 살인을 플롯의 즐거움으로 이용해버린다. 이건 자기모순인가, 아니면 자기폭로인가. 호의를
가진 관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후자의 편을 들고 싶다. 걸작도 아니고, 개척자적 시도도 아니며, 기발한 아이디어로 중무장한 화제작도 아니지만,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는 애착이 쉽게 거둬지지 않는 소품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이 영화는 별다른 주목
<씨네21>이 틀렸다 -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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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27일 개봉,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
(이 영화가 좋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그게 1페이지였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다시 거론하지 못했다. 그것도 걸린다. 다시 봐도 이 영화는 우리가 2페이지로 소개한 많은 영화들보다, 그리고 재론하면서 더 많은 페이지에 걸쳐 이리저리 뜯어본 몇몇 영화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영화에 대한 뒤늦은 찬사를 작성하는 일에 동원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영화 글쟁이가 쓴 해설을 읽고 싶은 기분은 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하는 삶의 피로와 허기,그를 실어나르는 시적 운율은 그 자체로 너무 명료해서 어줍잖은 주석을 초라하게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즐거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을 쓴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 쓰고 연출한 영화다. 그
<씨네21>이 틀렸다 - <그녀를 보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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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청첩장’부터 잘못 읽은 영화였다. 우리말 제목이 붙기 전, 영화 원제와 광고 사진을 본 나는 무심코 카메론 디아즈가 줄리아 로버츠의 ‘베스트 프렌드’려니 짐작했다. 한술 더 떠, 단짝 친구의 예비 신랑과 벼락 같은 사랑에 빠진 줄리아 로버츠가 우왕좌왕하는 코미디겠지 넘겨짚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문제의 베스트 프렌드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였다. 저런, 헛짚었군. 그렇다면방랑 끝에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친구에게서 참사랑을 발견한다는 ‘파랑새’ 스토리?
음식평론가 줄리안(줄리아 로버츠)에게 옛 애인이자 9년지기 친구인 마이클(더모트 멀로니)이 결혼 소식을 알려온다. 우정이 사랑으로 승화되리라 믿는 줄리안은 결혼식 딴죽걸기에 나선다. 어딘가 귀익은 이야기다. 그런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볼수록 이상하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발치에 펼쳐진 주단 깔린 평탄한 꽃길을 슬쩍슬쩍 피해간다.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줄리안은
<씨네21>이 틀렸다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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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10월31일 개봉, 감독 김기덕김기덕에 대한 오해는 유서깊다. 데뷔작 <악어>나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평자는 많지 않다. 그의 두 영화를 지지했던 나는 김기덕의 세 번째 영화가 불만스러웠다. <파란 대문>에 관해 “주인공들은 너무일찍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아는, 죽음 앞에 자위할 수 있는 도발적인 김기덕을 다시 보고 싶다”고 썼다. <섬>이 개봉한뒤 김기덕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파란 대문>에 대해 썼던 문장을 기억하며 낚싯바늘을 삼키거나 질에 넣는 가학과 충격의 영상이“너무 일찍 화해하지 않은 증거”라고 말했다. <섬> <실제 상황> <수취인불명>에 이르는 김기덕 영화를경험하고 <파란 대문>을 다시 봤다.그의 말이 옳다. <파란 대문>이 보여준 화해의 제스처는 타협이 아니다. <악어>에서 <수취인불명&g
<씨네21>이 틀렸다 - <파란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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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5월4일 개봉,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미션 투 마스>(2000)는 너무 느리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배우가 만들어낸 SF가 이처럼 속도의 계율을철저히 거스른다는 건 믿기 힘들다. “조용할 필요가 없는 장면에서도 왜 이렇게 조용한가”라고 불평한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대원들이 파손된우주선을 수리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마치 주어진 시간을 몽땅 써버리겠다고 작심한 것처럼 천천히 움직인다”고 썼다. 이건 물론 의도된것이다. 보급선이 화성에 착륙하는 대목처럼, 다른 SF에서라면 흥행포인트가 됐을 긴박한 장면들이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도할리우드 SF치곤 꽤 차분한 편이지만, <미션 투 마스>에 미치진 못한다. <콘택트>가 또박또박 걷고 있다면, <미션투 마스>는 게으르게 헤엄치고 있다.독창성은 늘 의심받았지만,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엔
<씨네21>이 틀렸다 - <미션 투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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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4월5일 개봉, 앤서니 월러 감독한편의 영화를 볼 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때로는 오락이나 쾌락이고, 때로는 성찰이나 자각이고, 때로는 그저 위로다. <무언의 목격자>에서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서스펜스’다. 그런 점에서 <무언의 목격자>는 후안무치하고, 또한 그 이유로 매혹적이다. <무언의목격자>는 장르의 심연에 파묻힌 것을 끌어내기보다는, 장르의 표면 위에서 위험한 서핑을 즐긴다. 파도가 덮치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여,찰나의 순간 자신의 근육을 긴장시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다. 그 절묘한 타이밍과 숙련된 테크닉은 충분히 만점을 받을 만하다.앤서니 월러는 거장이 아니고, 선댄스 키드처럼 재기넘치지도 않는다. <파리의 늑대인간>은 공포영화의 단골 캐릭터인 늑대인간을 즐거운상상력에 기반하여 매끈한 액션을 선보였지만, <더 길티>는 ‘우연적인 운명’을 요령부득으로 다루고 있다. 앤서니 월러의 영화는 별다른심층이 없다
<씨네21>이 틀렸다 - <무언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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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12월30일 개봉, 서극 감독서극은 오우삼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 오우삼이 할리우드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해외에서는 오우삼을 훨씬높게 평가했지만, <영웅본색>의 기획자였던 서극은 <동방불패>와 <황비홍> 등 홍콩영화의 흐름을 바꿔놓은 위대한히트작을 꾸준하게 만들어냈다. 그는 프로듀서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일류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서극은 많은 영화를, 그것도 너무 다양한 장르와스타일로 걸작에서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졸작까지 무차별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만 10여편이 훨씬 넘는다. 단지 유행이 바뀌었기때문에 새로운 장르로 옮겨가는 왕정 같은 감독과는 다르지만, 서극의 영화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의도’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서극의 영화를 특징짓는 하나는 ‘재현’이다. <촉산>에서 전통적인 중국 무협지의 휘황한 액션을 ‘재현’하려 했던 서극의 시도는 할리우드의특수효
<씨네21>이 틀렸다 - <서극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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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는 개봉 당시 그리 평가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감수성의 영화’라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씨네21>에서도 '웃기지만 아리송한 질문을 남기는 이상한 코미디'라고 평했다. 현실과 영화를 진지하고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만화적 상상력’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단하는 시선은 분명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단한가? 단지 다르게 바라본다는 것이? <플란다스의 개>는 자신이 서 있는 ‘지금 이곳’에 천착하는 구세대와는 달리, 지금 이곳을 이탈하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력에 기울어져 있다. 범인을 잡으려는 현남의 시선 혹은 상상력에서 요동치는 가공의 관중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새로운 세대의 이상향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만은 주인공이,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망. <플란다스의 개>는 그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인물들을 몰고 간다. <
<씨네21>이 틀렸다 -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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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압니다. 영화 주간지의 일주일은 비교적 행복한 1/2과 비교적 불우한 1/2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수요일 밤은 <씨네21>의 일주일 중 불면과 한숨의 1/2이 문을 여는 순간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개봉작 리뷰 기사와 함께입니다. 관객과 상견례를 앞둔 영화를 한발 먼저 만나 품평하는 작업. 그것은 <씨네21>에 온갖 형식으로 담기는 영화 저널리즘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영화기자로서 갖는 기쁨과 곤혹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씨네시사실’ 기사를 위해 영화를 보고 쓰는 시간만큼은, 우리는 삶이 영화보다 몇배 중요하고 흥미롭다는 진리를 잠시 잊습니다. 시사회에서부터 딱한 안간힘은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배우의 눈가에 맑은 물기가 번질 때, 감동적인 음악이 스크린에 출렁일 때, 정교하게 디자인된 시퀀스에 숨이 막힐 때에도, 영화의 타고난 본성인 미혹에 지지 않으려 자세를 추스르며 기억해야 할 대사와 프레임을 머릿속에 베껴냅니다. 그러나 뱃사람이라고해서 바다의
<씨네21>이 틀렸다-미안해, 영화야 늦은 사과를 받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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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증가에서 질적 도약으로.”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유길촌)가 ‘2001년 한국영화 진흥사업’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지난 4월20일 영진위는 제13차 위원회 회의를 열어 ‘2001년 영화진흥사업계획 및 시행공고’안을 출석위원 7인의 찬성으로 수정·의결했다. 영진위가 펼친 사업들이 한국영화의 편수를 늘리는 등 양적 지원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면 올해는 금융자본을 비롯 영화계에 흘러들어오는 자본이 늘어난 시장상황을 고려해서 투자 자본을 안정화하고 독립, 단편영화, 애니메이션 등 기존 상업영화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분야에 역점을 두기로 한 것이 특징. 매번 문제가 됐던 판권 담보 융자 사업은 폐지됐으며, 장편 애니메이션 개발 지원 사업이 추가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용관 부위원장, 김홍준 위원 등이 지난 회의에서 긴급 제안한 미디어센터 설치 운영에 관한 안건도 상정되어, 올해 미디어센터 사업을 영진위의 정책 사업으로 확정하고 위원회 내에 소위원회의 기능을 담당하는 (가)영상미디어
새로운 계획, 질적 도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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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올 여름 체코의 보헤미안의 중심지역에서 한국영화회고전이 크게 열린다. 프라하공항에서 버스로 두 시간 남짓 북서쪽으로 가자면 온천장과 생수로유명한 카를로비 바리가 몇 세기에 걸쳐 쌓아올린 건축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에서 한국영화회고전이8일에 걸쳐 열릴 참이다.인구 10만도 못 되는 카를로비 바리에는 수도 프라하에도 없는 전통 깊은 재즈 음악주간과 영화제가 있다. 올해 36회를 맞는 세계 8대 A영화제의하나인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가 그것이며 행사 시기는 7월5일부터 14일까지다. 그리고 7월6일부터 13일까지 한국영화회고전이 ‘최근 한국영화의역동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8일간 열린다.올해 서른여섯 번째로 치러진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의 시작은 194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2년 뒤 공산주의 정권이 등장하면서 정부나당의 선전기구가 됐고 1953∼55년에는 영화제가 단절되기까지 했다.그럼에
한국영화의 향기, 동유럽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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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회고전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을 말할까 한다. 앞으로 외지에서 나처럼 개인 차원으로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다. 카를로비 바리 회고전은 내가 개발한 세 번째의 프로젝트다. 처음 것은 1994년 “독어권 지역의 한국영화 순회상영”이었다. 독어권 지역은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를 뜻하며 각국에서 2개월씩 상영기간을 가져 6개월 동안 3개국을 돌면서 스위스 16개 도시, 독일 14개 도시, 오스트리아 4개 도시에서 12편의 한국영화가 ‘새로운 물결’이란 주제로 상영됐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를 한번도 상영한 바 없는 도시가 대부분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쪽의 옛 영화진흥공사(이하 영진공)와 해외공보관의 후원과 스위스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가능했고 스위스 시네클럽의 전국 조직체인 시네리브르의 실무자들의 협조로 한국영화를 알리는 기초작업에 성공했다. 더불어 한국영화에 대한 독어판 책자도 하나 출간했다. 취리히에서 있었던 개막식에는 영진공의 윤탁
회고전 가는 길의 몇 가지 문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