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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독특한 분위기의 SF액션스릴러 <베일>(가제)을 준비중인 정윤수(39) 감독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집안’과 ‘집 안’의 내력을 모두 따져봐야 한다. 우선 ‘집안’의 배경을 살피자면, 초등학교도 가기 전부터 영화광이었던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극장을 수시로 들락거렸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극장을 은은하게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공 숀 코너리가 나오는 007 시리즈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 등을 보며 영화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또 현대음악가이자 서울대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한 부친 정회갑씨는 <피아골> 등 한국영화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해 유명 배우들이 집안을 들락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 꿈꾸게 된 것은 ‘집 안’에서 시작됐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집 안에 놓인 TV를 통해 거의 매일 의 심야영화를 ‘독파’했다. 당시 그는 줄이 벅벅 가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정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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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이시명 감독은 일명 ‘한양대 필름 르네상스’를 주도한 영화학도 중 하나였다. 정지우, 김용균, 김영준 등 88학번 동기들은 모두 70∼80편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었고, 애니메이션, 액션, 코미디 등 장르도 전례없이 다양했다. 그중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일상에 법칙처럼 적용되는 해프닝을 다룬 코미디 <말이 씨가 되면>도 있었다. 80년대 학생 작품으로는 드물게 대중성과 감각을 갖췄다고 평가받은 이 작품으로, 이시명 감독은 상도 타고 후배들 사이에 ‘스타’가 됐다. 중학교 때 비디오카메라로 도둑 잡는 액션영화를 찍은 이래, 이시명 감독은 재학 시절 거의 모든 장르 영화를 직접 만들었다. 하고 싶은 영화, 할 수 있는 영화를 찾고, 착실히 공부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장길수 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연출부로 시작, 강우석 감독의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2>의 조연출을 거쳤고, 98년 <여고괴담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이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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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김영(34) 감독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무대예술에 대한 동경에서부터 시작했다. 오페라, 연극, 발레 등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그는 어린 시절부터 폭넓게 감상하며 무대 위에 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주’가 모자란다는 생각에 무대 위에 오르는 대신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로 가 여러 가지 장치며 의상을 만져보는 데 만족하곤 했다. “나는 항상 스탭이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는 스탭의 기질이 있었노라고 말한다. 무대를 사랑하던 소녀는 대학 3학년 때 1년을 휴학하고 떠난 장장 8개월의 유럽 배낭여행에서 영화의 매력을 ‘발견’한다. 케임브리지 ABC 시어터에서 본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와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에 그는 그 어느 것보다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또 하나의 문화’의 어린이캠프에 교사로 참여해 변영주, 홍효숙 감독과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들의 소개로 들어간 독립영화집단 ‘바리터’에서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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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육상효(38) 감독은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까지 꽤 멀다면 먼길을 돌아온 셈이다. 몇개의 직장을 전전하다 스포츠 신문의 연예부 기자로 활동했고, 서른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직장 문을 걷어차고 나와 단편영화 <슬픈열대>를 만들어 자신의 ‘영청’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몇년의 세월이 흐르고 유학까지 감행한 끝에 <아이언 팜>이라는 첫 장편작품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그가 기억하기로 그에게 지울 수 없이 강렬한 인상을 준 첫 영화는 고등학교 때 TV에서 본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이었다. 그는 이 영화를 봤을 때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등 예술적 감동의 최고치, 그러니까 그 스스로 ‘예술적 공포’라 부르는 세계를 느꼈다. 대학에 들어가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의 영화와 안성기, 김명곤이 출연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시나리오를 써 영화진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육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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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박봉곤 가출사건>의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장항준(33)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남들 흉내까지 내면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면 실제 있었던 일인 줄 알고 다들 깜쪽같이 속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훈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영화포스터만 보고 보지도 않은 영화스토리를 읊어대면 친구들은 그걸 진짜로 믿곤 했다. 서울예대 연극과에서 그는 졸업 전까지 학교 도서관에 있는 시나리오, 희곡 2천여편을 전부 읽었다. 극작에 흥미를 느껴 영화과 수업도 듣고 틈틈이 습작을 했다. 졸업할 무렵 영화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찾아간 곳이 <비상구가 없다>를 제작중이던 영화사 모가드 코리아. 이때 영화세상 대표인 안동규씨와 인연을 맺었고 연출부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연출부 생활을 계속하기엔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방송사 FD로 시작한 지 석달 만에 방송작가로 발탁됐고 <깜짝 비디오쇼> <좋은 친구들&g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장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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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1990년 5월 파리의 공기는 불온했다, 이미연(38) 감독과 그 일행한테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몇년째 활동하던 연극판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던 때였고, 어찌어찌하다 칸영화제에 갔던 때였다.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들렀다. 한 1주일쯤 머물렀나. 공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프랑스어 통역차 함께 갔던 친구는 그해 가을, 한국에서의 잘 나가던 직장을 접고 훌쩍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미연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파리로 가겠다.’ 몇달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해서 떠듬떠듬 입을 뗄 수 있을 정도로 익혔고, ESEC(실기 위주로 진행되는 프랑스 사립 영화학교)에 등록하고 친구를 통해 살 집도 구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 부모님께 “저 내일 프랑스로 떠나요” 했다. 꽤 나이가 드셨던 부모님은 기절할 듯 놀라셨지만 이미 저지른 일. 파리에 도착한 날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하녀방’이라고 부르곤 했던 월세 1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이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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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대학 졸업을 앞둔 88년, 김대현(36) 감독은 신촌의 영화사랑 우리, 동국영화연구소 등을 드나든다.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수록, 영화는 도피처라기보다 또다른 가능성이었다. 가슴을 치던 <오발탄>을 비롯해서 <돈> <박서방> <마부> <바보들의 행진> 등 유년 시절 보았던 60, 70년대 한국영화의 잔상들이 한없이 피어올랐던 시기이기도 했다. 누구 하나 길잡이 해주는 이가 없어서 일단 영화과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지만, 불과 시험이 3주 뒤인지라 영화관련 서적 다섯권을 챙겨 독서실로 잠수한 것만으로는 불안했다. 일주일 남기고서 동국대 유현목 감독을 찾아가 “영화만들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몽타주 이론은 아나? 네오리얼리즘영화는 본 적 있어?” 유현목 감독이 툭툭 던진 질문이 당일 시험문제였을 줄이야. ‘운좋게’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수업보다는 졸업을 앞두고 8mm 영화 작업을 하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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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스무살 언저리에 김진한(33) 감독은 ‘길’에서 맴돌았다. 87년 대구의 한 사회단체에서 걸개그림을 도맡아 그렸던 그는 수시로 짱돌과 꽃병도 들어야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 캠퍼스라는 ‘퇴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대는 뭉크를 흠모했던 우울한 소년을 그렇게 만들었다. “카메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고, 그걸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건 강제징집 당한 군대에서 처음 했다. 제대한 뒤 1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챙겨 무작정 상경했지만, 서울 어디에도 영화를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홍익대 부근 선술집에서 신세타령하다 영화제작소 ‘현실’ 멤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찌 시작했을지 모를 정도로 갑갑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현실’ 작업실에 테이프 빌리러 자주 들락거리던 이현승 감독을 만나게 됐고, 92년 <그대안의 블루> 연출부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만들었던 단편 <경멸>이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뿐 아니라 해외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부터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김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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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이 되기까지송일곤(31) 감독이 폴란드로 유학을 떠난 건 당연했다. 그를 매료시킨 도스토예프스키의 후예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더 거슬러 그에게 필름의 마력을 가르쳐준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무대였으니 말이다. 물론 전령사는 따로 있었다. <이방인>의 문승욱 감독. 먼저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우츠에서 수학중이던 문승욱 감독은 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만난 송일곤 감독에게 그곳의 영화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35mm 카메라로 단편영화를 맘껏 찍을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 걸작들을 직접 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그로 하여금 2주 만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동유럽으로 날아가게 할 만큼 솔깃한 것이었다. 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잉마르 베리만, 페데리코 펠리니만이 아니었다. 직접 확인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사람을 세밀히 관찰하는 지긋한 시선’을 일러줬고, 채플린의 부담없는 시선들 또한 행복한 시간을 안겨줬다.졸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송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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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기까지단편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에겐 윤종찬(39)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플레이백> <메멘토> <풍경> 등 미국 시라큐스 영화과 대학원 재학 시절 찍은 단편영화 3편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기억과 운명에 관한 단편 삼부작’이라 불릴 만한 이들 영화를 만들고 국내로 돌아온 그는 99년 <수호戰>이라는 영화로 데뷔할 뻔했다. 그러나 한 젊은이가 폭력배들의 싸움에 얽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이야기인 <수호戰>은 제작여건상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고 2년이 지난 현재 장편데뷔작을 찍고 있다.그는 최근 신인감독들과 비교할 때 꽤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 82년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전공에 별 의욕이 없어 87년 다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기 때문. 졸업 뒤 하명중영화사에서 충무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원치 않던 외화수입, 번역 등 기획실장 일만 하다 92년 김영빈 감독의 <비상구가 없다>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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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예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다. 1998년, 제3회 부산영화제를 준비중이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제1회 PPP프로젝트 신청작 중 <패션게임>의 로우예를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의 데뷔작 <주말연인>을 보며 알 수 없는 신선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부산을 통해 만난 투자자들과 <수쥬>를 만들고 난 지난 2000년, 로우예는 제3회 PPP에서도 차기작 <여름궁전>이 부산상을 획득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긴 여행이었다고 했다. <수쥬>의 개봉에 앞서 중국에서 한국까지 한나절을 날아온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1년 전 친구가 선물한 ‘바리깡’ 덕에 돈 안 들이고 유지하고 있다는 까까머리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를 배반하고, 그를 20대의 영화청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김지석(이하 김) 늦었지만 도쿄 필름엑스영화제에서 대상받은 것 축하한다.■로우예(이하 로우) 고맙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걸로 안다.■
[로우예]`국제시장에서 몸으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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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I심사위원 대상I극영화 <빌리버>(The Believer) 헨리 빈다큐멘터리 <서던 컴포트>(Suthern Comfort) 케이트 데이비스I관객상I극영화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Hedwig And The Angry inch) 존 카메론 미첼다큐멘터리 <독타운과 Z 보이즈>(Dogtown And Z-Boys) 스테이시 페랄타, <스카우트의 영예>(Scout's Honor) 톰 셰퍼드월드시네마 <집으로 가는 길>(The Road Home) 장이모I감독상I극영화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Hedwig And The Angry inch) 존 카메론 미첼다큐멘터리 <독타운과 Z 보이즈>(Dogtown And Z-Boys) 스테이시 페랄타I촬영상I극영화 <딥 엔드>(The Deep End)다큐멘터리 <라리의 친척>(Lalee's Kin)I표현의 자유상I<
2001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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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영화제가 이래저래 침체된 가운데 신이 난 곳은 바로 올해 새로운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한 안티-선댄스의 원조 슬램댄스영화제. 올해부터 슬램댄스는 선댄스영화제 메인관인 이집션 극장 건너편의 트레져마운틴호텔에서 메인스트리트에서 차로 5분가량 떨어진 실버마인이라는 널찍한 옛 은광터로 둥지를 옮겼다.일단 새로운 슬램댄스영화제가 열린 실버마인이란 곳은 장소자체가 명물이다. 은을 채취하던 광산기슭의 공장내부를 거의 실내 놀이공원을 연상시키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인테리어가 빛나는 공간으로 개조한 것이다. 곳곳에 소파와 컴퓨터, 각종 조형물들을 늘어놓고 심지어 마사지센터까지 설치해 한번 찾은 관객은 이른바 ‘죽때리면서’ 계속 영화보고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새로 마련한 200석 남짓 주상영관도 예전에 비하면 일취월장. 선댄스쪽의 보이지 않는 방해공작(?)인지 파크시티의 운수회사들이 도통 협조를 해주질 않아 10인승 밴 한대로 셔틀버스를 대신 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일주일 동안
[슬램댄스]한국영화 인기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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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선댄스영화제와 그해 파크시티 날씨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영화제 기간중 날씨가 좋으면 영화들이 별볼일 없고, 날씨가 춥고 눈보라가 치는 해에 나온 영화들이 좋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어 보이지만 공교롭게 지난 5년간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되짚어, 특히 올해의 경우엔 날씨이론이 제법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날씨는 너무 좋았지만 볼 만한 영화가 너무 적었다는 게 이곳에 온 평론가, 배급자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들리던 이구동성.하긴 선댄스에서 나온 영화들 자체를 놓고 작품성을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만듦새는 다소 미숙하지만 발견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던 영화들보다는, 갈수록 든든한 제작·배급사를 끼고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앞세운 이른바 제도권 독립영화들로 채워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듯 어정쩡한 과도기의 여파인지 이렇다 할 화제작이 별로 없어, 영화보기 팍팍하기로
[선댄스]발견은 없었다, 발전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