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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라! 내 인생에서 가장 재밌게 본 영화? 아니면, 내 인생을 바꾼 영화? 그것도 아니면 내 인생과 영화에 대해? 그건 더 아닌 것 같은데.....
여하튼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영화와 내가 인연을 맺은 게 언제였던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곤 내 인생에 영화가 중요하게 개입하기 시작한 지난 6년, 즉 ‘시네마천국’과 함께 한 시간을 집중적으로 되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면 어떤 식이든 답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 세상엔 영화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영화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있는 영화들이란 실제로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 우리 사회에 오래 전부터 만연해 있는 문화적 편식, 그 중에서도 영화는 더욱 심하다. 어쩌면 오락적인 문화와는 체질적으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더더욱 영화와는 일찍부터 인연을 맺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네마천국’과 함께 한 6년의 시간 동안 다소나마 영화의 편식을 해소할
[내 인생의 영화]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명멸하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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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하고 사람을 울리겠다는 데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럴 셈으로 <성원>은 가슴저미는 사연들을 퍽도 많이 들려준다. 우선 주인공 양파의 존재가 그렇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양파에겐 ‘그녀의 얼굴을 단 한번만 봤으면’ 하는 게 살아 생전의 소원이다. 하지만 죽음으로써 양파가 초란을 볼 수 있게 됐을 땐 초란이 양파를 알아보지 못한다. 죽음조차 두 사람의 사랑을 막지 못했지만, 어긋난 사랑의 운명은 죽음보다 더 가혹해서 이들의 재회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홍콩에서 <첨밀밀> 이래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멜로드라마인 <성원>의 뜨락에는 온갖 슬픔의 수사들이 만발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사어의 대부분이 최루성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용어’라는 데에 있다. 할리우드영화 <사랑과 영혼>을 떠올릴 것도 없이 산 자와 유령의 사랑은 <천녀유혼> 시리즈에서 익히 본 것이다. 사랑의 갈피를 채운 작은 사연들에서 이 영화만의 감성을
홍콩산 멜로 영화,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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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카이틀, 로버트 드 니로, 실베스터 스탤론, 레이 리오타라는 화려한 배역진은 이 영화를 조금은 궁금하게 만들다. 어두운 뒷골목을 누비던, 아니 영웅, 반영웅을 자처하던 스타들이 경찰이 되어 모두 한 마을에 산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해비>라는 저예산 영화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탁월하게 묘사해 내는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캅 랜드>에서도 주요한 세 인물을 각각 다른 위치에 배치시킨다.
스탤론이 연기한 프레디는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사고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바람에 그토록 갈망하던 뉴욕시경 시험에 낙방한 인물. 레이의 배려로 캅 랜드를 돌보는 보안관 일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쪽 귀를 희생하면서 살려낸 여자는 다른 경찰관의 아내가 되어 있는 상태. 그에게 경찰은 인생의 목표인 동시에 거부의 대상이다. 캅 랜드를 지배하고 있는 레이 역의 하비 카이틀은 자신의 조카를 숨기기는 했지만 마을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캅’ 그들만의 세계를 바라보는 진지함, <캅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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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빵을 만드는 것은 좋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 영화 첫머리에 소개되는 주인공의 신조는 <주노명 베이커리>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빵 배달을 갔던 주노명이 몰래 집에 들어가 잠든 아내의 몸을 더듬는 장면에선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아내의 신음소리에 맞춰 수십겹의 페스츄리로 이뤄진 빵이 달콤하게 부풀어오른다. 점점 커지는 빵처럼 사랑은 만족감에 취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싶은 순간 주노명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결혼한 지 10년된 부부, 매일 빵집 카운터에 앉아 아파트로 둘러싸인 풍경만 바라보는 여자에게 늘 빵처럼 부풀어오르기를 요구할 순 없을 것이다.
<주노명 베이커리>는 주노명에게 닥친 위기에서 본격적인 드라마를 시작한다. 흔히 불륜이라고 또는 중년의 로맨스라고 말하는 그것을 주노명의 아내 역시 체험한다. 그 대상이 고릴라같은 남자 박무석이지만 이 남자는 보기보다 괜찮다. 아무도 몰라주는 주노명의 빵 만드는
불륜도 살짝 구으면 로맨스가 된다, <주노명 베이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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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엔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신나간 마약중독자들, 임신한 창녀들, 칼과 총으로 구멍난 시체들,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는 부랑자들이 구급요원 프랭크를 기다리고 있다. <비상근무>에 담겨진 90년대 초 뉴욕 뒷골목의 밤풍경은 단연코 아비규환이다. 영광의 도시 뉴욕은 지옥의 그늘을 감추고 있다가 밤이 되면 끔직하고 흉칙한 맨살을 이렇게 드러낸다. 프랭크도 이 악몽의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자신의 미숙으로 죽은 한 소녀의 혼령이 그에게 치유불능의 불면증을 심은 뒤로 그의 얼굴은 말기 암환자처럼 변했다. 죽어가는 인간들의 호출에 몽유하듯 끌려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독백대로 “죽음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는 것”뿐이다. 그럴수록 프랭크의 안색은 더욱 검게 변해간다.
뉴욕시의 병원에서 10년간 구급요원으로 일한 조 코넬리의 원작소설이 폴 슈레이더의 각색과 마틴 스콜세지의 연출을 거쳐 다시 태어난 <비상근무>는 스콜세지적인
세속도시에서의 영적 구원, <비상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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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만 해야지, 그런 생각은 마흔 가서나 할 거다”
능청스럽다. 촬영 소품으로 컵을 하나 내밀자 유심히 살피더니 “이거…, 컵 닦으신 거죠? 뭐, 얼룩도 있고…” 한다. 촬영장소로 이동할 때 이미 “저랑은 처음이신 거 같은데… 어쩌다 저처럼 말 못하는 배우랑 인터뷰하게 되셨어요” 하는 농담을 거리낌없이 던졌더랬다. 까만 유리컵에는 ‘no more war’라는 문구가 하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참 의미있는 잔이네요, 노 모어 워…. 이게 보여야 될 거 같아.” 촬영은 모 기자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에서 이뤄졌다. 홈 스튜디오 안이 너무 조용하다고 느껴졌는지, 카메라를 의식하는 듯 안 하는 듯 묘한 태도로 촬영에 임하던 강혜정이 또 입을 열었다. “저, 이 집이 음악도 나오는 시스템인가요?”
이 정도 되는 능청스러움은 노련한 30대 배우들, 그것도 남자배우들한테서나 보게 마련이다. 자신이 대놓고 자리를 주도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태도는 연기경력 10년을 넘는 여배우들도 잘 보여
강혜정의 발견 [2]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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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원 줘요.” 당신과 자줄 테니 돈을 달라고 스물일곱의 여교사 최홍이 손을 내민다. 그녀의 얼굴 위론 기억하기 싫은 사랑의 상처가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내가 팔을 이렇게 움직여, 그럼 내가 저기 가 있어, 나 참 빨라”하고 ‘미친년’ 여일이 괴상한 목소리로 실없는 얘기를 한다. 열여섯, 열일곱쯤 돼 보이는 소녀의 얼굴 위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깨끗하고 바보 같은 표정이 어려 있다. 둘 다 강혜정이다. 최홍과 여일의 나이차는 어림짐작으로도 10살이고,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타 섹스할 줄 아는 여자의 세상과 남한군-북한군도 구분 못하는 소녀의 세상은 서로에게 별천지다. 그러나 그 둘은 모두 진짜 같다. 최홍과 여일을 연기한 올해 만 스물셋의 여배우 강혜정은, 작은 체구와 정반대로, 묵직하다.
이국적이고 선이 굵은 마스크만 들여다봐도 강혜정은 평범한 사랑, 무난한 성격과 거리가 있다. 강혜정의 얼굴은 서구인의 그것처럼 굴곡이 심해서 각도와 조명에 따라 나오는 느낌들이 큰
강혜정의 발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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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클래식이 없는 첫 해, 2005년.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디즈니 클래식'이 무엇인지 먼저 짚어보고 가자. 디즈니 클래식(Disney Classics)은 플래티넘 에디션이나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란 단어들과 연관은 있으나, 다른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디즈니'사에서 '자체 제작'된 '전통적인 스타일(손으로 그린 셀 방식)'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뜻한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합작으로 제작된 작품, 속편, 극장판이 아닌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은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다. 첫 작품은 1937년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였으며, 마지막은 44번째 작품이었던 2005년의 <카우 삼총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노키오>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고전부터, 디즈니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었던 <인어공주> <라이온
김성희의 터치 디즈니 '2005년, 디즈니 클래식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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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막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를 찾아 대비시키는 것이 상책이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분별지’ 아니던가?) 외계인/사이보그/복제인간/괴물/귀신 같은 ‘사이비 인간’을 등장시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과 ‘아닌 것’을 구분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SF나 호러는 본래 ‘인간존재론의 열린마당’이다. 때문에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가 기억과 감정에 대해 발언하거나, <프랑켄슈타인>이나 <디 아더스>가 타자성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 상상력이 발휘된 텍스트 안에 인간사회의 질서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판타지적 존재를 인간사회의 유비로 차용한 것이다. TV시리즈 <혹성탈출> 속 저급노동을 하던 유인원들은 인종문제를 발언하는 장치였고, <바이센테니얼 맨>은 ‘백인남성의 시민-되기 과정’을 담고
인간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아일랜드>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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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셔의 <슈퍼맨> 시리즈 이후 가장 생생한 액션만화였고 미국에 재패니메이션 관객을 만들어낸 오토모 가쓰히로의 1988년 <아키라>의 열성팬이라면 21세기 들어와 가장 기대를 모은 만화영화, 오토모의 제작비 많이 든 <스팀보이>에 만족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오토모는 컬트 고전이 세운 전통을 잘 만들어진 기사도 영화로 가려버리고 있다, 과거로 돌아가면서. <아키라>가 도시 환경의 반이상향과 묵시록적인 포스트 <블레이드 러너> 분위기를 살리며 사이버펑크 테크노 신비주의를 일으켰다면 <스팀보이>는 고의적으로 시대가 맞지 않는 배경을 보여준다. 오토모가 윌리엄 깁슨을 <아키라>에 영향을 준 소설가라고 밝혔듯이 <스팀보이>에서도 깁슨이 1991년 브루스 스털링과의 공동작업이었던 스팀펑크, <차분기계>(“The Difference Engine”)를 통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대체역사를 보여줬
파괴의 미학은 뭉게뭉게, <스팀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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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로 전체적인 관객이 증가했던 지난 주말 일본 극장가에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가 개봉과 동시에 가뿐히 1위에 올랐다. 주말 이틀동안 2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3억엔의 수입을 올렸는데 이는 역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고의 성적이며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일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도 처음이다. <마다가스카>의 오프닝은 지난 3월에 개봉했던 <샤크>보다도 높아서 <샤크>의 최종 수입 20억엔을 넘어 30억엔까지 바라볼수 있는 상황이다.
<스타워즈3>가 6주차에도 굳건히 2위를 지키며 흥행수입 선두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중위권 영화들은 전주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지난주 1위로 데뷔했던 <나루토, 대격돌! 환상의 지하유적>은 6위까지 미끄러졌고 <로봇>도 3계단이나 하락해 낙폭이 크다. 그밖에 10위 밖으로 밀려났던 <별이 된 소년>은 이번주 8위로 탑10에 재진입하는
<마다가스카> 일본 박스오피스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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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삼각 구도를 탈피하여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던 여성의 ‘내면’에 대해 그려보려고 했다는 감독의 변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 복수극이지, 여성에 관한 영화는 아니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야기와 캐릭터의 동력으로 가는 영화도 아니었다. 이야기만을 따지자면 내러티브 구조는 산만해 보였고, 반전도 약한 편이었다. 심지어 집단 복수극은 뜬금없고. 그러나 감독이 원래 의도했던 것이 금자의 주변 인물들을 생장점 삼아 산지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장미 넝쿨 같은 이야기 구조라면 그것을 탓할 수는 없을 터. 그보다는 왜 처음 봤을 때 재미가 없었을까(이 영화는 두 번째 보았을 때 가장 재미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복수의 계획치고는 예외가 너무 없었다. 영화 속의 금자씨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병헌처럼 자살로 끝을 맺지도 않고, <올드 보이>의 오대
죄의식이란 날개를 단 천사, <친절한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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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이후 이렇다할 영화를 내놓지 않고 있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 화끈한 액션 작품을 기대하는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한동안 바다에 매료되어 있었다. 9월 출시될 <에이리언 오브 딥> 역시 그러한 작품으로 제임스 카메론이 디스커버리 채널과 함께 제작했던 <비스마르크> 이후 세 번째로 연출한 해양 다큐멘터리 영화다.
<에이리언 오브 딥>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비롯해 해양 생물학자, 우주 생물학자, 우주학자 등 과학자들과 기술진들이 함께 모여 만든 작품으로, 심해탐사를 통해 바다 속의 신비를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척의 배와 유인 잠수정 4척을 동원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40회나 탐사하면서 촬영했는데, 심해에 사는 생명체들을 통해 앞으로 있을 우주 생명체 탐사의 청사진을 제공하고자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할리우드의 특수효과보다도 흥미롭고 감동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78:1
제임스 카메론의 해양 다큐멘터리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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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다. <웰컴 투 동막골>과 같은 영화의 평을 쓰는 일은 노심초사, 그 심정에 가깝다. 우선 난 어른을 위한 동화와 같은 장르가 종종 성년의 동심을 일깨우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렇게 희비극을 오락가락하는 영화는 진지 모드로 정색을 하고 써나가기도 어렵고 , 희희낙락으로 일색하기도 어렵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 영화의 예의 희비극성이 역설을 자아내고 삶의 패러독스를 실감케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처럼 노골적으로 역설적 환영인사를 하는 예가 아니라면 난 이러한 영화의 장르적 관행 속으로 흡인되는 것을 좀 불편하게 여긴다. 모든 것이 내겐 언웰컴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라. 남동철 편집장은 이 영화를 특별 언급할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여기는 태세로,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며 권하고 있고, 현재 시사 뒤의 반응도 영화사로 보아서는 ‘웰컴’ 분위기인 듯싶다.
다른 한편, 매우
무릉도원에 스미스는 왜 있는 거야요? <웰컴 투 동막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