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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보다는 폭력을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
로버트 A. 하인라인은 폐결핵 진단을 받고 젊은 나이에 제대한 해군장교였다. 그는 6년 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지원했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 다시 한번 거절당했다. 밀리터리SF라는 장르를 확립한 <스타십 트루퍼스>는 군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하인라인이 한을 푸는 것처럼 치밀하게 써낸 소설이다. 군대와 우주, 한몸처럼 행동하는 집단과 미지의 공간. 하인라인은 소년들이라면 마음 설레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소재를 선택해서 우직한 성장담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폴 버호벤이 영화로 만들었을 때 비판을 불렀던 것처럼, <스타십 트루퍼스>는 파시즘에 가까운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곳에선 군인으로서 복무 기한을 마치지 않으면 시민권을 얻을 수 없다. 눈에 띄는 차별을 받는 건 아니지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조니 리코는
그 영화가 소설이였다고? 영화를 낳은 원작소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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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부터 <태양은 가득히>까지, 영화를 낳은 원작소설 10選
이건 정말 해묵은 이야기다. 영화와 문학이 피를 섞은 것은 영화가 줄거리를 갖게 된 무렵부터니까 말하나 마나다. 두 장르가 엮이는 방법도 시대와 더불어 가지를 쳤다. 각색은 기본. 잉마르 베리만, 크리스토퍼 햄튼, 장 콕토, 데이비드 마멧 같은 ‘투잡스’도 많았고, 비슷한 시기 탄생한 모더니즘 문학과 영화는 시간과 이미지를 편집하는 법을 서로에게 배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영화가 세를 불린 뒤로는 새로 나온 영화의 사진으로 표지를 갈아치운 고전의 개정판이나, 시나리오의 행간을 메워 이야기를 얽은 ‘영화소설’까지 서점 한 코너를 번듯이 차지하게 됐다. 그렇지만 “영화는 영화이고 문학은 문학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냉정한 관전평이 여전히 우세하다. 만약 정말 위대한 문학이라면 언어라는 매체에 꼭 들어맞는 내용을 지녔다는 뜻이니 숙명적으로 좋은 영화로 냉큼 변신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있다.
그 영화가 소설이였다고? 영화를 낳은 원작소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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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문식(37)은 ‘김밥족’을 경멸했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요, 차량으로 이동하며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요, 징징대는 스타들을 대할 때마다 그는 “부귀영화를 얼마나 보겠다고 저러느냐”며 혀를 찼다. 그런데 요즘엔 그 말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꼬들꼬들한 밥에, 뜨듯한 국물을 대한 지 그 또한 오래됐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2002)에서 ‘강동서 강력반 강 형사’를 몰라보고 “자신의 직업은 양아치”라고 깝치다가 강철중에게 죽어라 엊어맞는 산수 역으로 얼굴을 알린 지 1년. 이후 올해 개봉한 출연작만 <역전에 산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나비> <오! 브라더스> <황산벌> 등 5편이다. <다모>와 <죽도록 사랑해> 등 드라마 2편도 겸한데다, 뒤이어 <범죄의 재구성>과 <어깨동무> 촬영차 전국을 누비는 탓에 좋든 싫든 그도 ‘김밥족’의 일원이 됐다. 잡혀 있던
`거시기` 이문식의 산전수전 스토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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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수전 3 | 카메라 앞에 서기
이 무렵 알음알음 지인들의 소개로 영화촬영장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카메라가 어딨는지도 모르고 뛰라면 뛰고, 서라면 서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아는 후배의 소개로 단역으로 출연했다 수모를 당한 <러브스토리>(1996)와 <초록물고기>(1997)를 잊지 못한다. “비디오점 주인이었는데, 배창호 감독님은 보폭이나 손높이까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안 나오면 다시 가야 해요.” 연극을 했다면서 그것 하나 단박에 못해낸다고 타박을 먹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구박이라면 이창동 감독 또한 뒤지지 않았다. 심혜진에게 수작 걸다 한석규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양아치 중 한명으로 나왔던 그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집단 구타하는 장면에서 멈칫거리다 감독으로부터 “니네 뭐하다 온 새끼들이냐?”는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참다 못한 이 감독은 직접 시범을 보이기까지 했고, 상대배우인 한석규가 “우리 한번에 갑시다. 괜찮
`거시기` 이문식의 산전수전 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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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아>는 노년의 칼 드레이어가 컬러- 그가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영화의 한 영역- 이용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하고 싶다는 큰 포부를 갖고서 시나리오 작업에 돌입했으나 결국엔 성사되지 못하고 만 프로젝트였다. 유리피데스의 비극에 영감을 받아 쓰여진 드레이어의 그 시나리오를 가지고 나중에 영화(TV용)로 만든 것은 같은 덴마크인 영화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였다. 이건 드레이어에 대한 폰 트리에의 흠모를 생각하면 사실 거의 자연스런 일처럼 여겨진다. 폰 트리에는 드레이어를 대단히 경배하다 못해 그와 텔레파시를 통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인물이니까 말이다. 그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그 정도의 지나침이 거의 ‘광신’의 경지에 이르러 처음에는 우스꽝스럽다가 어떤 순간 이상한 경건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예컨대 폰 트리에는 자신이 기르는 개 역시 드레이어와 영적인 교분을 나누고 있어 드레이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짖는다고 주장했다. 언젠가 그는 드레이어가
회고전 열리는 칼 드레이어의 영화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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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의 열정>부터 <사탄의 책>까지 칼 드레이어 회고전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 11편
재판장 | Praesidenten
이전까지 시나리오를 쓰거나 혹은 시나리오 자문 일을 하던 칼 드레이어가 처음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고서 연출한 작품. 멜로드라마로 부를 수 있는 데뷔작 <재판장>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정에 서게 된 젊은 여자와 그녀의 재판을 맡게 된 판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판사는 그 젊은 여자가 오래전 자신이 버린 여인의 딸임을 알게 된 뒤 고뇌에 빠진다. 명예/의무와 사랑의 대립, 그리고 고통받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드레이어적인 서명을 찾아볼 수 있다.
사탄의 책 | Blade af Satans Bog
드레이어는 <인톨러런스>를 비롯한 D. W. 그리피스 영화들이 자신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탄의 책>은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의 주제나 구조, 규
회고전 열리는 칼 드레이어의 영화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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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부작의 액션, SF, 철학 이야기 그리고 오시이 마모루의 코멘트
1999년, 세기말에 등장한 <매트릭스>는 충격과 탄성을 자아냈다. 검은 가죽옷을 입은 트리니티가 공중에 붕 떠서 우아하게 발차기를 하는 순간, 관객은 이전에 만나지 못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홍콩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광적인 마니아였던 워쇼스키 형제는 실사영화가 미처 손대지 못했던 원시림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매트릭스>는 보통의 대중오락에서도 고상한 철학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오랫동안 비주류로 남아 있던 동양 무술을 순식간에 할리우드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허물었고, 몸과 기계를 이용한 갖가지 액션의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액션영화광이건 철학자이건 <매트릭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트릭스>는 21세기의 영화가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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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에서 쿵후(功夫)하기
20세기 말에 등장해 요란하게 세기를 이어온 <매트릭스>. 암울한 SF영화이자 철학적 논란까지 일으키는 이 거대한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액션장면의 가장 큰 특징은 적극적으로 ‘쿵후’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도 무수히 많은 미국영화에서 쿵후 파이터들을 볼 수 있었으며, 서양인들이 보기엔 별 차이없는 동양 무술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비디오 가게 진열장 한벽을 다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매트릭스> 이전까지는 ‘쿵후’가 할리우드 주류영화를 이끌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풍토 속에서 탄생한 <매트릭스>가 새로웠던 점은 할리우드의 누구도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던 ‘쿵후’의 세계를 그들과 다르게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저 운동 좀 했다고 설치는 배우들 몇명 데려다가 카메라 앞에서 펼쳐놓고 좋은 동작들 몇개 건지면 그만인 그런 게 아니었다. <매트릭스>를 보고 있노라면 감독이 얼마나 ‘쿵후’의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2] - 류승완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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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로서의 <매트릭스>, 그리고 속편들의 쇠락 요인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만큼 21세기 영화판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른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많은 <매트릭스> 팬들은 기존 SF 장르 독자들이 영화에 보내는 덤덤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에 울화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내 개인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도 여러 번 있었던 일이다. 사실 장르 독자들의 이런 냉소엔 사람 속을 긁는 얄미운 면이 있긴 있다. 터줏대감의 심술이랄까.
SF팬들은 왜 <매트릭스>를 인정하지 않는가?
이들의 심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SF 문학계에서 사이버펑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초반. <매트릭스>가 할리우드 장르 세계에 사이버펑크 장르를 본격적으로 이식한 것은 1999년. SF 문학계에서는 벌써 사이버펑크의 유행을 접고 그 다음을 모색하는 동안 영화계에서는 뒤늦게 한물간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3] - 듀나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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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신들이 보고 싶은 걸 찍은 거겠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는 네트라고 하는 가상공간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뿐 아니라 화면구성 등 많은 면에서 <매트릭스>에 영향을 끼쳤다.
>> 실사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마침내 그걸 시작한 남자가 나타났다는 점이 매우 감개무량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는 연출이나 특징이 어떠한 것인가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거기서 얻을 게 있었고, 워쇼스키 형제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확실히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 <매트릭스>는 딱히 싫어하는 영화는 아니다. 좋아한다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싫어하는 영화는 아니고 본인들하고도 만났으니까. 하지만 사실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달까, 그들에게 영화란 일종의 사업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업 얘기에 더 열심이었고. 어떤 영화를 좋아햐나고 했더니 홍콩영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4] - 오시이 마모루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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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블록버스터의 철학하기
“어떤 인간이 사악한 과학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 신경조직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다. (…)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힐러리 파트남, <이성, 진리, 역사>)
실재론과 관념론
<매트릭스> 1편에서 거대한 수조 속에서 배양되는 인간 클론들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곧바로 미국 철학자 파트남의 사유실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과학적 공상”은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론이라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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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르네상스, 여기서 싹텄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20년을 맞았다. 1984년 남산 영화진흥공사 건물(현 영화감독협회)의 구석진 방에서 출발한 영화아카데미는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올해까지 배출한 296명의 영화인 중 대다수가 충무로 현장을 바쁘게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햇수로 20년 영화아카데미의 역사는 곧 한국영화의 최근사와 동의어나 다름없다. 2000년 만하임-하이델베르그영화제, 2001년 발라돌리드국제영화제 등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 특별전’이 열리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영화아카데미의 20년을 돌아본다.
얼마 전 토론토영화제에 들른 임상수 감독은 이곳 프로그래머로부터 다소 엉뚱한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영화아카데미가 뭐하는 곳이냐”는. 이 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감독들은 임 감독을 비롯해 장준환, 봉준호, 박경희, 김기덕 감독이었는데, 이중 김기덕 감독을 제외하곤 모두 아카데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아카데미 2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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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깨우친 영화의 '어른' 들
“촬영을 나가서 무심코 카메라를 땅바닥에 놓았는데, 유영길 촬영감독님이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영화 하는 놈이 이것밖에 못하냐고. 영화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카데미를 다닌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시려 했던 것 같아요.”(박기용 감독·3기)
교수진이 취약하다는 점은 현재까지도 영화아카데미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지만, 그 와중에 학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 ‘어른’들이 있다. 우선, 고 유영길 촬영감독. 그는 영화아카데미의 초창기 때부터 실습수업을 진행했다. 유 감독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영화에 대한 자세를 심어줬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허진호 감독은 “황영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날 유 감독님과 술을 함께 마셨다. 새벽인데, 유 감독님이 쓰레기통을 앞에 가져다놓더니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빛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그때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구나, 하고 느꼈다”고 말한다.
또 한명의 스승은 유재형
영화아카데미 20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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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은 아카데미를 다니던 1년 또는 2년을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시간’으로 기억한다. 영화아카데미 출신 5명의 영화인이 회고하는 ‘나는 왜 영화아카데미에 갔는가’, 또는 ‘아카데미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나’, 혹은 ‘아카데미는 현장 생활에 어떤 도움을 줬나’.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다
조근식 | 13기·<품행제로> 연출
내가 속한 영화아카데미 13기는 변화의 시대를 살았다. 우선 우리 기수들은 남산에서 홍릉으로 이전한 뒤 뽑힌 첫 번째 기수인데, 덕분에 나는 페인트 냄새 채 가시지 않은 새 건물과 새 책상, 그리고 새로 구입한 실습장비들을 마음껏 흠집내며 다닐 수 있었다. 또 우리 기수 때부터 1년에서 2년으로 교육기간이 늘어났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원래는 1년 반 정도의 3학기였던 것 같은데 우리가 졸업작품을 6개월 넘게 찍는 바람에 그냥 2년으로 정리됐던 것 같다. 세 번째는 12기까지 12명 정도를 뽑다가 우리 기수부터 정원이 18
영화아카데미 20년 [3] - 졸업생들이 회고하는 영화아카데미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