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추억을 찾아서<아홉살 인생> | 윤인호 감독-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마요네즈> 이후 윤인호 감독이 영화의 소재를 건져올린 건 번번이 소설에서였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계획들이긴 하지만, 윤인호 감독은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 신경숙의 중편 <그가 모르는 장소>의 각색작업을 거의 마친 상태다.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문인들이다. <마요네즈>를 좋게 봤다며 연락을 줘서 알게 된 김운경 작가와는 그새 네팔 여행까지 다녀왔고, 틈만 나면 장터 여행을 함께 가곤 한다. “나이 들어서 책을 열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책에서 소재 찾고 작가들과 어울리고… 그렇게 되네요.” 황기성사단에서 <아홉살 인생>을 맡아달라며 윤인호 감독을 부른 것도 우연치곤 기막히다. 90년대 초반에 출간된 <아홉살 인생>은 10여년간 꾸준히 인기를 모았지만, 지난해 MBC의
12명 감독의 야심만만 뉴프로젝트 [6]
-
어떤 일그러진 ‘스위트홈’의 기억현대가족의 이면을 그린 또 하나의 공포영화 <아카시아> 그리고 감독 박기형가족은 괴물이다. <장화, 홍련>이나 처럼 박기형 감독의 신작 <아카시아>도 가족의 폐부에 기생하는 비극을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그려낸다. 화사한 꽃무늬로 단장한 집이 기괴한 사이코드라마의 무대가 됐듯, 단란한 가족을 위해 마련한 4인용 식탁에 죽은 아이들의 냉기가 자리하듯, 앙상했던 아카시아 나무가 꽃을 피울 때 그 속에선 죽음의 향기가 배어난다. 2003년의 가족호러 3부작라 불러도 좋을 세편 가운데 <아카시아>는 못지않게 불온한 영화다. “내 쉴 곳은 오직 집, 내 집뿐”이라고 노래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가족의 초상은 뒤틀리고 일그러진다. <아카시아>는 가족이 괴물이 된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는 영화다. <여고괴담>에서 우리의 학창 시절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들추어냈던 박기형은 이 영화에서 가족의 포근함 속에 깃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1]
-
박기형 감독 인터뷰소통이 단절되는 순간이 바로 두려움의 시작“제발 호러 전문 감독이라고 쓰지 말아주세요. 다음엔 코미디 하고 싶어요.” 다소 의외지만 박기형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1996년 단편 <과대망상>에서 올해 <아카시아>까지 7년간 어두운 상상력에 짓눌렸던 탓이다. 어쩌면 <아카시아> 이후 한동안은 박기형의 공포영화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오랜 시간 공포영화를 고민했던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아카시아>는 <여고괴담>의 제목이 될 뻔했다고 들었다. 오래전부터 아카시아에 대한 공포영화적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다. 아카시아에 대한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다. 아카시아향이란 게 따로 방향제로 팔 만큼 향기롭고 꽃이 피면 예쁘고. 어릴 때 노래 있었잖나.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그런 식으로, 아련하고 예쁘고 추억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2]
-
분열된 시인의 초상사망 40주년 시인 장 콕토의 ‘빛의 잉크’로 쓴 시(詩) 영화세계 조명홍성남 / 영화평론가장 콕토의 영화들 속에서 시인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그 어둠의 세계로부터 귀환하는 존재로 종종 그려진다. 그의 마지막 영화 <오르페의 유언>에서 콕토 자신이 연기한 시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식의 부활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었는지 1963년 10월의 어느 날 콕토는 절친한 친구였던 가수 에디트 피아트에게 자신들의 좋지 않은 건강 상태에 대해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우리의 의사들은 아는 게 없어. 우리가 죽고 난 걸 보고 나서야 우릴 되살려내려나봐.” 며칠 뒤 두 사람은 같은 날 몇 시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초현실적 혹은 몽상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콕토의 영화에서 일어난 일이 현실에서도 발생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와 달리 죽음은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무심하게 시간만 흘렀을 뿐인 것인데 바로 그렇게 지
영상시인 장 콕토 Jean Cocteau(1889~1963)
-
-
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새>부터 <디 아워스>까지, 음향으로서의 음악의 정체성현대음악의 대표적 장르인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라스가 그의 앙상블을 이끌고 처음으로 내한해 공연을 갖는다. ‘필립 온 필름’이란 이름으로 10월14∼15일 LG아트센터(02-2005-0114)에서 열리는 이 공연은 컬트 다큐멘터리로 꼽히는 고드프리 레지오의 3부작 중 <균형 잃은 삶>과 <변형 속의 삶>이 상영되는 무대 위에서 열린다. 필립 글라스와 고드프리 레지오의 ‘합작품’은 현대사회의 삭막함과 기술에 점령당한 참상을 ‘눈으로 듣는 음악, 귀로 보는 이미지’로 드러내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 3부작은 글라스가 레지오의 영상에 맞추어 곡을 작곡하고 레지오가 음악에 맞추어 영상들을 다시 쪼개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필립 글라스는 이후에도 <디 아워스> <쿤둔> <트루먼 쇼> 등의 영화음악을 통해 영상과 음악의
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 [1]
-
새로움이란 무엇인가이처럼 음악을 음향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영화의 하나가 히치콕의 고전인 <새>이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다. <시민 케인>의 스코어 작곡가이기도 한 전설적인 버나드 허먼이 맡은 사운드트랙은 합성된 전자음을 통해 새의 끔찍함, 비명, 히치콕이 나중에 ‘전자음향적 정적’이라고 부른 아스라한 바닷소리 등을 표현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음향들은 그 어떤 음악보다도 극명하게 상황적이고 또한 음악적이다.또한 음향적 전위음악은 수많은 사이-파이필름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할리우드의 영화음악가인 제리 골드스미스는 1968년작 <혹성탈출>(Planet of Apes)에서 당시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전위적 사이-파이 일렉트로닉 음악을 선보였는데, 이 전자사운드는 지금까지도 사이-파이 사운드트랙의 전범으로 남아 있다.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실험영화들이 전위음악의
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 [2]
-
상처받은 영혼에게 스크린의 빛을 투사하노라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케이-펙스>(9월19일 개봉)가 똑같이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가장 다른 점은 환자들의 상태일 것이다. 자신이 ‘케이 펙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케빈 스페이시를 비롯해 맨해튼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아주 흐릿하게 만들 정도로 ‘안전’하다. 그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안고 있을 정신적 외상들, 예컨대 가족의 붕괴, 애정결핍, 강박증, 소심증 등을 조금 과하게 앓고 있을 뿐이다. 이 기획은 여기서 출발했다. 누구나 앓고 있을 마음의 고통을 손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길로 가는 실마리를 조금만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는 소망. 영화평론가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심영섭씨가 그 수고로움을 맡아주었다. 자신의 실제 경험과 각종 상담 사례로 ‘영화치료’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무작위로 선택한 감독, 프로듀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1]
-
상담자의 눈높이에 맞춰 영화 선택해야 효과적그러한 측면에서 영화치료를 위한 영화들은 개인적인 지능과 관심, 맥락에 따라 고려되어야 하고 오히려 상징과 은유로서의 영혼의 수준에서 의미를 찾게 하는 영화들일 것이다. 이렌느 골든버그 박사의 다음 회고담을 들어보자. “전 알코올중독이었던 내담자에게 <술과 장미의 나날>을 추천했죠. 도움이 될까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치료 도중 내담자는 자신이 열렬하게 보았던 포르노영화로 주제를 바꾸면서, 제가 왜 이 영화를 추천했는지 의아해하더군요.” 일단은 영화치료를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는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내담자의 눈높이에 맞는 영화가, 내담자를 계몽하는 영화보다 더 중요하다.<타인의 취향>‘아니, 내가 저 사람처럼 비현실적이고 즉흥적인 면이 있단 말이야?’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아요.’ 자동차도 보충액이 필요하듯 사랑에도 서로를 쇄신하는 재충전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스토리 오브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2]
-
여러분의 파랑새는 뭔가요?영화인 4명, 임상심리학자 심영섭과 <케이-펙스>를 보고 집단상담하다심영섭 지금 이 자리는 집단상담치료의 한 섹션으로 마련된 거예요. 원래는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많다거나 해서 치료를 받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동기가 있는 분들과 없는 분들이 어떤 차이를 보일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평소에 상담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이 기회에 나누면 좋겠어요. 제가 영화평론가라는 건 생각하지 마시고 상담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거고,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질집단이면 좀 힘든데 영화를 한다는 공통점이 상당히 크게 작용할 듯싶기도 하네요. 그럼, 하나 정하고 가죠. 이 프로그램은 항상 익명으로 해요. 자기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사물이나 자연물로 별칭을 정하자고요.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권력관계를 없앨 수 있어요. 나이나 직책, 치료자, 환자 같은. 전 향기로 할게요.박경수 (가명·시나리오 작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3]
-
콜라= 케이 펙스라는 존재가 있으면서 없는 것 같아. 케빈 스페이시도 프롯이었다가 아니기도 하고.향기=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죠.콜라= 각자 선택의 문제죠. 제가 보기에 케이 펙스는 그 병동이에요. 가족은 없는데 관계는 있거든요. 전 자꾸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되네요. 전 관계를 일부러 끊을 정도로 가족과 상처가 많아요. 같은 일을 하는 형제와도 관심을 끊고 지내요. 아주 가끔의 전화통화로 생사만 확인하는 정도? 가족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아주 잘됐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가족이란 살과 피로 나눈 게 아니라 관계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타인에게서 그 절실함을 느꼈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관계라는 것만 이뤄질 수 있다면 또 다른 케이 펙스가 내 안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사람= 동감입니다. (나무를 가리키며) 우리 둘이 섹스를 했어요. 그러면 부부의 관계는 아니지만 가족이 되는 거죠. 혈연이 아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4]
-
향기= 이해가 가네요. 너무 화가 났을 것 같아요. 거꾸로 그렇게 작은 것에도 감수성을 발휘해서 자신의 삶을 통합시킬 수 있는 게 콜라님의 능력이죠.콜라= 전 여전히 아픈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잊어버려요.향기= 전 제가 쓴 20자평을 까먹는데, 감독들은 그거 안 까먹어요. 무섭고 미안해요.콜라= 그런 사람들 아주 밉죠. 그래서 여전히 가족이 힘드네요.향기=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가족 때문에 힘들어해요. 나이 50이 넘어도 얽힌 가족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봤어요.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향기= 콜라님은 일종의 우주여행을 다녀온 듯해요. 케빈 스페이시가 외계인과 지구인으로 분열된 건데,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런 사람도 실제로 봤어요. 어떤 환자는 어린 시절을 하나도 기억 못해요. 본인은 기억력이 나쁜가보다 하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사람은 그렇게 상처에 취약해요.콜라= 전 고등학교 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면 그 다음날 일어나 이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5]
-
세상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싶은 모럴리스트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아직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한번도 국내 극장에서 개봉된 적이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결코 낯선 이름이 아니다. 지난번 광주영화제에 초청된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가장 주목할 일본의 영화작가로 구로사와 기요시를 손꼽았다. 최근 몇년간 미이케 다카시와 함께 해외영화제가 가장 선호하는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미 데뷔한 지 20년이 된 ‘중견’감독이다. 국내에도 다양한 경로로 소개된 적이 있다. 2001년 전주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한 적이 있었고, 부산영화제와 부천영화제에서도 몇 작품이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이미 수입되어 있는 <큐어>와 <카이로> <강령>은 좀처럼 대중과 만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어째서일까.비주류 매체의 비주류 감독<큐어> <카이로> <강령>의 장르를 굳이 말하자면,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1]
-
이타미 주조가 제작한 <스위트 홈>은 할리우드의 SFX팀을 불러들여 할리우드풍의 공포영화를 실험한 영화였지만, ‘상업성과 작가성의 이항대립을 무효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지옥의 경비원>에서는 어느새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영화를 발견하고 여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큐어>를 통하여 정점에 오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큐어>를 발판으로 하여 <카리스마> <카이로> 등의 걸작들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적인 것들을 만들어낸다. 구로사와의 영화적 특징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는 작가주의와 B급영화의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아니 그것들이 하나의 건축물로서 견고하게 결합되어,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낸다.“B급영화를 좋아한다고 인정하지만, B급영화에야말로 굉장한 A급이 있다, 이쪽이야말로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2]
-
영화? 세계의 터무니없음을 드러내는 표현수단<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인터뷰2년 전 인터뷰를 한 뒤, <밝은 미래>와 <도플갱어> 두편을 보았다. 당신의 영화에는 자신의 사상을 다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카리스마> <인간합격> <밝은 미래> 유형과, 장르의 틀을 허물고 부수면서 새로운 지형으로 나아가는 <큐어> <카이로> <도플갱어> 유형이 있는 것 같다. 당신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당신을 창작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 * * 나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자기자신과 영화 자체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과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영화라는 틀이 서로 어우러져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밝은 미래>는 영화의 역사성보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실감쪽에 좀더 강하게 뿌리를 두고 만들었다. 한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