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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생각이 같았지”-안판석
주면 받고, 받으면 주고. 궁합 좋은 인연이라고 부부싸움 한번 안 하는 건 아닐 텐데. “선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고 입을 모으는 두 사람은 어땠을까. <국경의 남쪽>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듯이, 디테일에 신경을 쓰던 안판석과 ‘십장’처럼 배우들을 다독이던 차승원은 촬영 기간 내내 ‘행복한 동거’ 혹은 ‘즐거운 분업’을 만끽했을까?
차승원: 캐릭터가 이런 인물이다, 뭐 그런 이야길 나눈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안판석: 네가 즉흥연기를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잖아. 커피 마시면서도 벌떡 일어서서 이거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하는데 내 입장에선 다 그럴듯하니까. 말하지 않아도 캐릭터에 대한 생각이 나랑 같군 했던 거지. 근데 현장에서 슥슥슥 하는데 그게 잘 맞아서 첫 테이크에 오케이했는데 네가 한번 더 가겠다고 하면 그땐 신경질나더라. 맞는 거 했는데 왜 다른 걸 해야 하나 싶어서.
<국경의 남쪽> 차승원 vs 안판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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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4일 개봉을 앞두고 <국경의 남쪽> 감독 안판석과 배우 차승원이 만났다. 촬영장에서 매일 만나 뒹굴었던 두 사람이지만, 새벽 기술시사를 보고 난 뒤인지라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에 바빴다. 브라운관에서 맺은 인연을 스크린으로 힘들게 옮겨오기까지의 스토리를 짧은 대담으로 묶었다.
안판석과 차승원은 드라마 <장미와 콩나물>(2000)에서 함께 작업했다. 그때 안판석은 MBC의 간판 드라마 프로듀서였고, 차승원은 가능성에 머물던 모델 출신 3년차 배우였다. 6년 뒤, 두 사람이 다시 영화 <국경의 남쪽>에서 만났다. 이번엔 반대. 브라운관에서 잔뼈 굵은 베테랑 PD 안판석이라고 할지라도 신인감독이었다. 반면, 차승원은 어느새 10편 넘는 출연작을 거느리고 있는 흥행배우가 돼 있었다.
안판석: 드라마를 했던 건 일종의 저축이었다고 봐. 나중에 영화해야지 하는 맘으로 한 거지. 그래도 신인감독인 건 사실이잖아. 네가 경험자이니까 많이 기대면 되겠구나
<국경의 남쪽> 차승원 vs 안판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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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표현하면 의아하겠지만, ‘음악을 하려고 사진과에 입학했다’. 보컬로 밴드 활동을 하고 싶다는 꿈을 부모님이 반대해서 사진과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사진 찍는 취미를 갖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사진이 낯설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사진동아리(역시 음악동아리가 없어서 든 것이었다)에서 찍은 사진이 큰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도 하나의 계기였다. 음악과 사진의 길 사이에서 갈등하다 군대에서 내린 결론. “사진은 내가 원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기록이고, 남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는 감정이다. 음악은 그 순간의 감정이 남지 않으며, 음악을 하는 순간 함께 즐기는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강요해야 한다.”강렬함은 덜해도 오래 남길 수 있는 사진을 선택하게 되었다.
경성대 사진학과 졸업 전부터 잡지, 광고 등의 사진을 프리랜서로 찍어오다가 <연애소설>을 계기로 스틸작가 길에 들어섰다. <연애소설> 이후 한동안 일감이 없어 영화 스틸을 포기할까도 했었다고. “인터뷰 사진은 어
스틸작가 5인의 미공개 화첩 [6] - 손익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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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현장. 생짜 초보 배우들과 감독과 스탭들의 땀 비린내가 물씬 퍼져온다. 그리고 생짜 초보 사진작가가 그 옆을 함께 뛰어다닌다. 그곳이 바로 “카메라 2대 메고 뛰어다니는 게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는 이상욱 작가의 첫 번째 현장이었다. 죽거나 혹은 찍거나. 감독도 사진작가도 만만치 않은 현장으로 시작한 셈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났던 이 작가는 올해 갑자기 세편(<데이지> <짝패> <중천>)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정우성과 류승완이라는 형제 같은 남자들과의 작업을 마다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지금껏 류승완 감독과 세 작품, 광고 촬영으로 의를 맺은 정우성과 두 작품을 함께했다. “작품의 규모나 보수가 아니라 인간에 끌려 현장을 선택한다”는 철학이 그를 고된 현장으로 인도하는 탓이다. 이상욱 작가는 대세가 된 디지털을 마다하고 여전히 필름 카메라로 작업하고 있다.
스틸작가 5인의 미공개 화첩 [5] - 이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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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준은 많이 찍는다. 못 찍어서 많이 찍는 게 아니다. 찍을 게 많아서다. 감독과 배우들 찍기도 바쁠 텐데, 그는 ‘이름없는’ 스탭들까지도 애정 담아 찍는다. 영화 속 한 장면을 단지 재현하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찬다. 그는 촬영장에서 서로 부대끼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오롯이 담아야 한다는 원칙의 소유자다. 그의 쉼없는 카메라는 한때 집회장을 오가며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었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다 “사람 찍는 일이 재밌어서” 취미였던 사진을 결국 업으로 삼았고, “사회가 진보하는 데 사진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큐멘터리 사진에 열을 올렸던 그는 구본창, 오형근 두 작가의 추천으로 <축제> <해피엔드> 등을 찍게 되면서 충무로와 인연을 맺었다. 스틸 작업이 마냥 만족스럽진 않았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은 뒤에 회의가 들더라. 돈벌이 때문에 시작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었다.” 고민은, 그러나 잠깐의 망설
스틸작가 5인의 미공개 화첩 [4] - 한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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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영화였고, 인물사진을 찍고 싶었다.” 영화 월간지 <스크린>의 사진기자 출신인 전혜선 작가가 영화 스틸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다. 3년간 사진기자로서 영화와 함께 살다가 프랑스에서 약 4년을 지낸 뒤 귀국했다. 첫 작품은 <불후의 명작>. 일 자체뿐 아니라 기자와 스탭이라는 판이한 입장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스틸작가 8년차에 접어든 중견작가 전혜선씨는 새로운 현장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배우 관찰이다. 1∼3회차 때까지는 배우들의 얼굴, 배우들의 버릇을 눈여겨본다. “그래야 어느 순간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안다.” 두 번째로는 감독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 그러고나서 스탭들과 친분을 쌓고 사진촬영에 돌입한다. 영화 스틸은 어디까지나 영화 홍보에 필요한 소스이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팀원에게도 “너의 예술작업이라는 착각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내 작품활동 같지 않은 스틸촬영을 8년째 해오는 까닭은 “영화의
스틸작가 5인의 미공개 화첩 [3] - 전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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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훈의 카메라는 ‘제멋대로’다. 기록을 위해서만 스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다. 촬영감독 곁에서 피사체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라는 세간의 직업률은 그에게 부차적이다. 그는 언제나 최상의 느낌을 건져올릴 수 있는 곳에 카메라를 세워둔다. “다른 곳에 서서 바라보면 더 재밌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포기할 순 없잖아요.” 그의 고집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꿈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영화학과에 진학했지만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싫어서” 졸업 무렵 사진으로 선회했던 그는 스틸 작업도 엄연한 연출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파이란>의 스틸을 우연히 찍게 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20편 가까운 작업을 해온 그는 현장에서 뜻밖의 사부(?)를 만났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설득력이 있어요. 인물의 감정을 따라 공간 이동하는 걸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죠. 이모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기본에 충실해요. 어떻게 인물과 공간을 잡아야 효과가 극대화
스틸작가 5인의 미공개 화첩 [2]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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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백영호 선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40년 넘게 영화현장에서 스틸 작업을 한 분이다. 1960년대 충무로 풍경 하나쯤은 기록해뒀으려니 싶어 찾아뵀는데 헛걸음이었다. 그의 소중한 앨범을 몇번이고 뒤적였지만, 다방과 여관과 식당이 그득한 과거의 충무로를 담아둔 사진 한장 없었다. “그럴 겨를이 있었어야지. 나도 아쉬워….” 현장 사진이라고 다를까. 배우들의 얼굴만 클로즈업한 사진들에서 과거의 흔적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돌아왔고, 얼마가 지났다. 하지만 영화사에 쌓인 스틸북을 뒤적일 때마다 그때의 낭패감이 되살아났다. 지금이라고 뭐가 달라졌나. 몇 십년 지나 누군가 이 사진들을 들춰본다면, 그는 2천년대의 한국영화 현장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궁금했다. 뒤따라 이런 추측도 일었다. ‘그들’이 찍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다, 하는. 카메라 들고 슬레이트 치는 과거는 아니잖나. 현장의 스틸기사들이 편당 찍는 사진의 수는 수
스틸작가 5인의 미공개 화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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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영화의 부상에 주목한다”
이현승: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과 한국영화에 대한 해외의 긍정적 반응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 그리고 세계영화의 흐름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한말씀 해주시지요.
마틴 스코시즈: 저는 영화라는 매체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대단히 낙관적입니다. 젊은 세대의 영화에 대한 도전은 제게 일종의 설렘마저 줍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랄 수 있는 디지털의 발견과 발전이 특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반기든 그렇지 않든, 젊은 세대들은 손에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만듭니다. 젊은 세대에게 정열이 있다면, 자본의 압력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것입니다. 자본을 비롯한 여러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최악의 경우, 디지털로 간다”라는 신념으로 영화를 만드는 거죠. 자본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유를 품고 말이지요. 디지털로 만든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야기가 중요하고, 동시에 영상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본질은 동일한 것이니까요. 특정 나라나 문화권
마틴 스코시즈를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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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 감독은 한국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올드보이>와 <나쁜 남자>를 스탭들과 함께 보며 영화 스타일에 관해 의논하고, <질투는 나의 힘>을 좋아하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자막 번역이 잘된 35mm 필름으로 꼭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가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지지 서한을 한국영화감독조합으로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현승 감독이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지지 서한을 보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작 <디파티드>의 편집에 한창인 스코시즈 감독을 찾았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진오 감독의 통역 속에 이루어진 만남은 스코시즈 감독은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한국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들에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냈고, 홍콩영화 <무간도>의 리메이크인 <디파티드>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월13일, 이현승 감독이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 미국감독협회(DGA: Dir
마틴 스코시즈를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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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징후로 살펴본 <사생결단>
<사생결단>은 그 시작과 함께 ‘IMF 직후’를 배경으로 한 허구적 창작물임을 자막으로 제시한다. 이를 징후적으로 읽는다면 두 측면에서 접근 가능한데, 하나는 IMF 전후로 본격화된 현재의 한국영화의 특징과 관련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와 관련하여) 장르영화의 힘이 IMF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한국사회의 공기를 담아내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1987년 무렵 발생한 ‘코리안 뉴웨이브’는 광주항쟁에 의해 촉발된 시대정신을 ‘리얼리즘’의 형식 속에 새기려는 시도였다. 물론 이들 영화에 내재된 한계와 그에 따른 가치판단의 분지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대중오락에 머물던 한국영화를 시대정신과 맞닿게 하려는 야심찬 시도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IMF를 전후로 리얼리즘적 양식은 장르적 상상력을 앞세운 영화들로 본격적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사생결단> 3인3색 [3] - 안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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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적 똥폼을 깨버리다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를 중심으로 본 <사생결단>
모든 것들은 <첩혈쌍웅>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에 남성 중심의 버디영화나 안티-버디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한국 관객이나 감독들의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는 ‘버디영화’의 이미지는 대부분 <첩혈쌍웅>에서 나온 것이다. 궁금하면 최근에 나온 곽경택의 <태풍>을 보라. 이정재의 ‘어머니, 만약 다음 세상에서 또 그를 만난다면’ 어쩌고 하는 들쩍지근한 대사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첩혈쌍웅>은 하나의 장르를 완성하는 훌륭한 영화였지만 그 영화가 끼친 부작용은 간과하기 어렵다. 과대포장된 남성 가치, 거의 보는 사람의 위장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느끼한 감상주의,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즘 같은 뻔한 단점들은 아무런 필터를 통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모방됐다. <태풍>은 그 뻔한 예들 중 가장 다루기 쉬운 영화일 뿐이다.
<사생결단&g
<사생결단> 3인3색 [2] - 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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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 준> <후아유>의 최호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사생결단>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기 드문 힘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마약반 형사 도진광(황정민)과 마약판매상 이상도(류승범)가 서로를 이용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사생결단>은 친근한 도시 부산을 누아르영화의 낯선 공간으로 옮겨놓았고, 그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남으려는 두 남자의 싸움을 집요하게 담아냈다. 이 지독한 이야기를 보고 난 세명의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개성과 관심이 드러나는, 세 가지 관점의 평론을 보내왔다. 김봉석은 후카사쿠 긴지를 모범으로 자처한 <사생결단>이 어떤 점에서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과 비슷하고 다른지 분석했고, 안시환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사생결단>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듀나는 자기 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두 배우 황정민과 류승범의 연기와 캐릭터를 중심으로 <사
<사생결단> 3인3색 [1] - 김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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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감을 형성하라
“모든 일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유니프랑스는 중국에서 프랑스영화를 소개하고 있지만, 반대로 프랑스에서 중국영화가 소개되는 것을 돕고 있다. 파리에서 중국영화제도 열고, 중국 감독을 프랑스 영화계에 소개해주기도 한다.”(크리스틴 페르냉 유니프랑스 중국 사무소 대표)
한국영화의 중국 진출과 관련해서 영화와 간접적인 관계를 맺지만, 결과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방송이다. MK픽처스는 지난 3월17일 중국 CCTV-6와 <YMCA야구단> <해피엔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방영권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CCTV-6는 중국 최대의 영화채널로 12억 시청자를 확보한 전국 시청률 2위의 방송사다. 이은 대표는 “편당 2만2천달러로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중국시장에서 적지 않은 돈이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CCTV와 협력관계를 다졌다는 점과 한국영화를 중국에 대중적으로 알릴 통로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설명
한국영화 중국 진출 원년 [4] - TV 및 민간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