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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라, 그러면 그들이 올 것이다.”
방콕행 비행기 좌석에 비치된 기내지는, 제4회 방콕국제영화제(2월17∼27일)가 새로운 터전으로 정한 거대 쇼핑몰 시암 파라곤의 건축 이념을 <꿈의 구장>의 케빈 코스트너가 받은 계시에 빗대고 있었다. 시암 파라곤이 솟아오른 방콕의 라마 1세 대로는 웬만한 백화점 한채 지어서는 아마존 밀림에 나무 한 그루 보태는 격이 될 쇼핑몰 밀집 지역. 두 유통 재벌이 손잡고 150억바트(약 4500억원)를 들인 3년 공사 끝에 지난해 12월9일 개장했다는 시암 파라곤은 8만제곱미터의 백화점과 레저 시설, 복합 상영관을 거느린 쇼핑의 신전이다. 인근 쇼핑몰들의 개축 경쟁을 평정할 코끼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라마 1세 대로에는 벌써 시암 파라곤보다 더 넓은 또 다른 쇼핑몰이 연내 준공을 목표로 망치질이 한창이었다. 하긴 이들의 경쟁 상대는 어차피 서로가 아니라,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이웃 동남아의 쇼핑 도시일 터다. 소비의 신한테 경배할
제4회 방콕국제영화제 견문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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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편: 미국 현대사를 꿰뚫을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꼽아보자.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했고, 내전을 통해 평등을 구축한 미국. 20세기는 결국 미국의 전쟁광 기질이 만개한 시기다. 어쩔 수 없이 끼어든 1차 대전 이후. 군수산업을 통해 짭짤한 이들을 챙기는 한편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까지 확실히 확보한 2차 대전에 이르러, 미국은 급기야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이어졌던 베트남전은 미국이 패배한 최초의 전쟁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군수산업이 핵심산업으로 자리잡은 미국, 냉전시대가 끝난 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전쟁을 향한 구애는 식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분쟁에서 큰형님 노릇을 도맡느라 여념이 없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 일어난 전쟁들만 꿰어도 미국 현대사, 절반은 아는 셈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정당한 전쟁_ 2차대전
<진주만>
Good Job: 미국이냐, 일본이냐. 어쨌든 기분
영화로 배우는 미국 현대사 [3] - 정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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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편: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인간이다. 실명으로 영화 속 주인공으로 채택되는 인물들은, 조금은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남들보다 한발 먼저 그 흐름을 이끌었거나, 사회적 함의를 좀 더 많이 부여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거나.
대놓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혁명이다
性을 부르짖은 사람들/ <킨제이 보고서> <래리 플린트> <부기 나이트>
아직도 미국은 섹스 어필하는 영화에 대한 검열이 폭력영화나 전쟁영화에 대한 그것보다 엄격한 나라다. 짐짓 보수적이고, 소수자에 대해서는 대놓고 예의가 없어서,// 피임의 필요성을 말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시기. 다양한 연력, 직업, 인종의 1만2천명을 심층인터뷰하여 남성 성기 중심의 성문화에 속하지 않는 사례가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 출간됐다. <킨제이 보고서>는 이를 작성한 앨프리드 킨지가 자신이 제시한 노골적인 성담론으로 사회의 표적이 되는 과정을 담았다. 킨지가 보
영화로 배우는 미국 현대사 [2] - 심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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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영화의 공통점. 첫째, 대부분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진다. 둘째, 어느 한쪽의 말만 듣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강한 만큼 잔인한 나라 미국의 역사, 그리고 미국영화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역사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쳐왔고, 미국영화는 전세계인들이 보아왔다. 당신이 알아야 할 미국 역사의 모든 것…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것들이 이미 영화에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영화 속, 우리가 미처 주의깊게 살펴보지 못했던 미국 현대사의 다양한 빛과 그늘이 그곳에 있다. 배우 조지 클루니가 감독으로서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굿 나잇 앤 굿 럭>도 자국의 뒤틀린 역사를 냉정하게 들쑤신다. 알면 알수록 재수없게 느껴진다고? 그래도 아는 게 힘이다.
입문편: 다음 영화들과 미국의 특정시대를 연결해보자.
어떤 식으로든, 영화는 사회를 반영한다. 대개 미국의 현재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보여주는 다음의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이란 곳은 날 때부터
영화로 배우는 미국 현대사 [1] - 입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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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보니 일장춘몽이어라
영호충은 무예에 능하긴 하나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는 인물이다. 이연걸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신과 매우 다른 성품(그는 말 많은 영화계에서 스캔들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지금의 아내가 재혼을 통해 만난 상대임을 공개한 일이 유일한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이다)을 지닌 영호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를 찍는 내내 감독에게 “어떻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한 여성을 희롱하고, 남몰래 다른 여자의 기분을 맞추다가, 또 다른 이에게 구애하다니요?” 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감독은 “영호충은 뜬구름처럼, 또 방탕아처럼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고지식한 이연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 잘 날 없는 영화계에서 보낸 26년의 세월은 이연걸로 하여금 영호충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했다. 과거의 한 인터뷰에서 했던 “이제 다시 영호충이 된다면
무림의 고수 이연걸을 말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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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대결이란, 승패를 가려 지위 고하를 나누는 데 목적이 있다. 갖은 노력 끝에 얻은‘무승부’는 당연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파이터들은 비록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대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기고도 또 도전하고, 지고도 다시 일어선다. 중국 최고의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배우 이연걸을 통해 태어난 고수들도 그랬다. 그들은 사부의 복수를 위해 싸우고(<정무문>), 부를 위해 싸우고<리쎌 웨폰4>), 명예를 위해 싸우다(<무인 곽원갑>) 담담하게 죽어갔다.
한데 2006년 실존인물 ‘곽원갑’으로 분한 이연걸은 “그런 것들(승리)이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고 고백했다. “몸으로 이기는 것보다 마음으로 누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무인은 싸움질만 해선 안 된다”는 곽원갑 선생의 말씀이 오버랩되던 순간, 이연걸은 곽원갑이 바로 자신이라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끝으로 ‘무술’이 중심이 되는 작품에는
무림의 고수 이연걸을 말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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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째: 6월11일
오후에 우리 영화의 실질적 마지막 장면인, 비를 피해 광고판 아래 모여든 혜영과 박의, 정우 그리고 장 형사를 촬영했다. 광고판 아래 서로를 모른 채 서 있다가 비가 멈추면 각자의 갈 길을 간다. 날씨는 유난히 쌀쌀하고 비까지 뿌리니 한기가 몸을 감싼다. “No Matter What, Feature can be Changer!” 하지만 지나온 운명 같은 시간을 누가 저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박의가 꽃밭이 있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정우가 데이지를 들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운명처럼 느껴지는 지나온 시간은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 네덜란드의 하늘은 여전히 아름답고 가깝기만 하다.
33일째: 6월13일
광장의 한쪽 허가받은 곳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박의가 정우의 차로 다가가고 주변에 장 형사를 비롯, 형사들이 잠복해 있고 광장은 암스테르담 한복판에 있는 ‘DAM SQ’이다. 많은 관광객과 행인들로 분주하다. 완전통제는 불가능하고 카메라와 배우 주
정우성의 <데이지> 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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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째: 5월24일
홍콩 스탭은 한국말로, 우리는 만다린이나 광둥어로 인사를 한다. 슬슬 서로를 이해하고 더 알아가려 하는 것 같다.
골동품 가게를 찍은 뒤 광장으로 옮겨 총격신의 잔여 촬영을 했다. 성재 형(정우)이 내(박의)가 쏜 총알을 어깨에 맞은 뒤 계단에 넘어지고 총을 쏘며 다시 올라오는 장면이 멋지게 찍혔다. 촬영 중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로 감독님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신 때문에 스탭들이 한바탕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19일째: 5월 30일
이틀 전 시내의 한 중식당에서 진짜 킬러가 식사를 하던 남자를 총으로 쏘고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진짜 킬러가 있는 곳…. 오늘은 극장과 호텔에서 박의가 살인을 하는 두신을 찍었다(각주: “내가 실제 킬러가 있는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킬러 역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지요. 특히 킬러 사건이 난 이후 스탭들이 그 시간에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캐묻는 등 꽤 재밌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실제 킬러 박의로 생활하고 싶었던 나에게 꽤 인상
정우성의 <데이지> 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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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이 <데이지>의 제작일지를 공개했다. 배우가 일지를 써서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는 먼 이국땅 네덜란드에서 49일(35회차 촬영)의 촬영기간 동안 거의 매일 일지를 썼다. 촬영이 끝날 즈음, 늘 품고 다니며 틈틈이 썼던 일지는 어느새 노트 한권 분량이 됐다. 극중에서 그는 차가운 킬러 박의 역을 맡았지만, 일지 속에 나타난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깊고 섬세한 감성과 열정을 지닌 배우였다(참고: 각주에서 “”로 표시된 부분은 정우성이 직접 한 말이다).
첫 촬영: 2005년5월12일
오후 1시. 주차장 한쪽에 고사상이 차려졌다. 이곳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온 지 6일이 지난 뒤다. 그동안 배우들은 시차적응과 현지의 분위기를 익혔고 의상 피팅과 헤어 컨셉 등 캐릭터로 들어가기 위한 작업 등을 진행했다.
감독님은 말한다. 6개월간의 긴 준비기간을 둔 작품은 <데이지>가 처음이라고. 이틀 전 회식자리에선 장문의
정우성의 <데이지> 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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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내내 괴롭히던 치통까지 잊게 해준 배우들
“엔딩을 찍던 날인데 무지 이가 아파서 이를 짱돌로 깨버리고 싶더라고. 태어나서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야. 현장에 나가서 진영이한테 딱 한마디 했어. ‘니가 울면 관객도 울고, 니가 건조하면 관객도 건조할 것’이라고. 여섯, 일곱 테이크 가니까 진영이도 속으로 ‘저 씨발놈 오늘도 열번쯤 가겠구나’ 하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진영이가 놀랍도록 잘한 거야. 이 아픈 걸 잊어버릴 정도로. 그리고는 승우 순서가 돼서 ‘제작부가 배우를 현장에 갖다놔야지 개새끼들아’ 이 지랄하다가, 승우가 연기하는 걸 모니터로 보는데 눈물이 죽 흐르더라고. 그 순간에 이가 씻은 듯이 안 아픈 거야.”
촬영 내내 김 감독을 괴롭히던 치통은 엔딩 촬영에 맞춰 극에 달했다.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이를 싸안고 감독의자에 앉은 그에게 주연배우들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보답했다. 김승우는 “배우 출신이라 그럴까. 이틀 정도 감정적으로 힘든 장면
김해곤의 감독 데뷔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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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사람이라면 1964년생 시나리오 작가 김해곤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일반 관객이라도 <장군의 아들>의 단역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김해곤이 <파이란>과 <블루>의 작가인 사실은 모를지언정 <게임의 법칙> <파이란> <라이방> <태극기 휘날리며> <달콤한 인생>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에서 조폭과 군인으로 등장했던 그 얼굴만은 낯이 익으리라. 영화계에선 육두문자의 달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가 드디어 메가폰을 잡았다. 3일간 부산 수영만 스튜디오와 통도사를 오가며 목격한 김해곤 감독의 몸놀림은 예상대로 진막에 앉아 군선을 휘두르기보다는 화살 속을 헤치고 부하들을 독려하는 맹장에 가까웠다. 주위 사람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는 리듬감 넘치는 욕설도 여전했다. “몸무게가 7kg이나 빠진” 날렵한 얼굴은 영화감독이 겪는 제작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
김해곤의 감독 데뷔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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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도 비밀은 있다
성형미인의 좌충우돌 인생역정 그린 코미디 <미녀는 괴로워>
원작 <미녀는 괴로워>/만화/서울문화사 펴냄/ 스즈키 유미코 지음
원래는 이랬는데 누가 보더라도 눈부신 쭉쭉빵빵 미인 칸나즈키 칸나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칸나즈키는 뚱뚱한 몸매와 못생긴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수백만엔짜리 전신성형을 통해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하게 된 것. 졸지에 미인이 된 그는 ‘뚱녀’ 시절에 비해 180도 바뀐 주위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대접을 실감한다. 단지 외모가 비호감이라는 이유만으로 칸나즈키를 괄시하던 사람들은 칸나즈키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를 보내며 그녀를 떠받든다. 사실, 칸나즈키가 전신성형을 감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흠모해왔으나, 뚱녀 시절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꽃미남 코스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코스케 앞에 나타나 자신의 외모를 뽐내지만, 코스케는 칸나즈키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뚱녀 시절
충무로 日流 열풍 [4] - 일본원작 한국영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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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뺏고 나는 주고
두 여자친구의 애증의 성장기 <어깨 너머 연인>
원작 <어깨너머의 연인>(肩ごしの戀人)/소설/유이카와 게이 지음
원래는 이랬는데 루리코는 참느라 앓느니 뺏고야 만다는 신념의 소유자. 그녀에게 결혼은 ‘약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치르는 자축 의식이다. 소꿉친구인 모에의 남자친구를 가로채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그녀는 당당하다. 반면, 모에는 남자, 명품, 스캔들 외에 관심이 없는 시샘과 질투로 가득한 루리코를 속물이라고 여긴다. 섹스는 그저 “상대의 몸을 이용한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라고 여기는 모에는 루리코와 정반대다. “마음에 들 것 같은 무엇을 발견했을 때는 반드시 트집을 잡고야 마는” 모에에게 결혼은 그저 공인된 섹스 파트너를 확보하는 불편한 허례일 따름이다. 126회 나오키문학상 수상작인 <어깨너머의 연인>은 타인을 점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는 루리코와 타인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모에가 함께 쓰는
충무로 日流 열풍 [3] - 일본원작 한국영화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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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소설이 풍기는 개인주의의 향기
그런데 우리는 일본의 무엇에 매혹될까, 그들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어떻게 현재성을 띠게 될까. 텍스트로의 여행에서 만화와 드라마, 영화는 살짝 제쳐두자. 편의성 때문이 아니라 일본 현대소설이 일류 현상의 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내 대형서점들에서 다른 어떤 외국서적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충무로 제작자들의 가장 열정적인 러브콜 대상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의 일본 문학을 순문학의 상실로 여기며 무척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문학의 역할은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동시대의 모델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그의 명제를 전제처럼 들고 출발해야 할 듯싶다.
“나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영화화하고 싶어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이윤기 감독(<여자, 정혜> <러브토크>)은 영화화를 검토 중인 일본 소설 몇편을 갖고 있다. 그의 예민한 시선이 닿은 곳은 어딜까. “일상의 묘사나 감
충무로 日流 열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