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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흥영화사의 촬영현장에 가면, 거의 어김없이 이태원 사장을 만난다. “회사에 앉아 있으면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영화사 대표는 매끈한 비즈니스맨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분위기지만, 이태원 사장에겐 아직도 영화제작자라는 직함만큼 어울리는 게 없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의 멋진 파트너십으로, 5년간 지속된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서편제>)과 칸영화제 경쟁부문 첫 진출(<춘향뎐>)이라는 영광을 모두 안았으니,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성공한 제작자임에 틀림없지만, 이태원 사장의 자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여전히 1년에 영화 한두편 만들면서, 촬영현장에 나와 필름 감기는 소리에 취해 산다. <춘향뎐>에 이어 다시 험한 장정에 나선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촬영현장에서 들뜬 얼굴로 앉아있는 이태원 사장을 만났다.늘 촬영현장에 나와 있는, 요즘 보기 드문 제작자입니다.매번 나오지는 못해
“안성기는 우리가 늙어서 고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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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케인>은 영화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지만 초창기에는 호평 받기에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내러티브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하다, 테크닉이 자체로만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지적인 내용이 지극히 피상적이다라는 세 가지 비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비판에 대한 비평적 반응이 쌓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시민 케인>은 걸작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습니다. 첫째,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에 대해서는, 복잡하지만 흠잡을 수 없는 스토리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케인을 조명한 <시민 케인>의 내러티브 방식을 케인이라는 인물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라고 받아친 것이죠. 둘째, 고전적인 영화에서는 대개 테크닉보다 스토리가 우위였습니다. 스토리가 아니라 테크닉에 관심을 둘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시민 케인>이 고전적인 영화와 구분된다는 인식론적 단절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셋째, 지적 내용이 피상적이라는
영화사를 뒤흔든 걸작, 그 작용과 반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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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겐지는 샘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1950년 후배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위대한 예술은 나이 50은 넘어야 하는 건데 까마득하게 어린 사람이 상을 받다니” 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때가 미조구치의 나이 52살 때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상을 받기 위해 착수한 게 <오하루의 일생>입니다. 이 영화는 결국 195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게 되지요. 그리고 미조구치는 연속해서 <우게츠> <산쇼다이유>를 베니스 출품, 3년 연속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룹니다.미조구치 겐지는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두사람보다 덜 언급되고 덜 연구돼 온 편인데, 그 이유는 그가 서구학자들에겐 유용한 틀이었을 일본 ‘내셔널 시네마’의 범주로 쉽게 포착이 안됐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본영화와 거의 동의어로 취급됐으며
회화성과 음악으로 빚어낸 영상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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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1375년 원말 명초. 명에 파견된 고려 사신단은 간첩혐의를 받고 명의 포로가 된다. 귀향길에 올라 사막을 가로지르던 행렬 앞에 나타난 원의 기병들은 명의 군대를 몰살하고 고려인을 노아준다. 김성수 감독, 안성기, 정우성, 장쯔이 출연, (주)싸이더스 제작 상영시간 154분박평식 페킨파 감독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찍었나? ★★★심영섭 역작 대작 노작, 그러나 2% 부족한 범작 ★★★유지나 비장미 넘치는 스펙터클! ★★★☆홍성남 험한 원정을 마친 야전사령관, 그러나 존 포드가 되진 못했다 ★★★■ <길로틴 트래지디>프랑스령 섬, 생 피에르. 만취한 선원 닐은 어리석은 내기 끝에 동네노인을 살해하고 참수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 작은 섬엔 단두대가 없다. 결국 닐은 대위 쟝의 감시 아래 단두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쟝의 아내인 마담 라는 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 출연, 상영시간 112분박평식 죄와 벌,
무사/ 길로틴 트래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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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와 퍼즐맞추기가 스릴러의 기본적인 요소들이라면 <세이예스>에 붙여진 ‘비극적 스릴러’라는 카피는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다. 덕분에 스릴러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신 <세이예스>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미덕도 많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덤프트럭을 이용한 카신은 그동안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며, 후반부를 붉게 물들이는 하드고어는 <텔미썸딩>을 능가할 만큼 잔혹하다. 작가인 여혜영은 말한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공포였어요.” 감독인 김성홍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제작자인 황기성의 언급은 그러나 이와 다르다. “스릴러에 멜로를 가미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하나의 장르로 영화를 구분짓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여혜영의 표현에 따르면 “오랜 세월 매달려 죽도록 고생했던” 작품이 관객의 외면을 받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부산 출생의 여혜영은 본
질투가 낳은 공포, 공포가 낳은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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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을 하야카와라는 사람이 2년 했지. 아마 그 사람이 특무기관에 한자리가 있는 모양이에요. 극장 버스도 있고, 권총도 가지고 있고. 서장들도 꼼짝도 못합디다. 그런데 그때 순사가 극장에 나와서 검열을 했거든. 그러니까 하야카와가 “이것도 예술품인데, 이거를 순사가 나와 검열한다니 이러는 법이 있느냐. 다른 데서 해주시오” 그래서 24년 봄부텀 경찰부 보안과에서 검열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고 몇해 후인지,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성이 되니까 총독부로 욈겨졌지요.하야카와가 2년 있다가 동경으로 가버리고. 어느날 이갑성 선생(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이며 당시 명륜동에서 경상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고 있었다.- 필자)께서 나를 찾아오셨어. 아마 그 극장에 자주 오셔서 내가 해설하는 걸 보셨던 모양이야. 오시더니 차상무라는 이 선생 처남이 극장을 해봤으면 한대. 그래 내가 이 선생님을 모시고 조선극장 소유주 니시무라 지점장(당시 조선극장의 소유권은 요코하마 해상보험주식회사 경성지
영화인에게 발길질하는 악질형사 투서했다 1년 옥살이했지 - 성동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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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집 근처에 낡은 동시상영관 하나가 있었고 그 극장 주변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까닭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늘 그곳으로 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해질 때까지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했고 어떤 날은 우리끼리 돈을 모아 극장 안으로 숨어들곤 했다.
극장 입구에서 표를 받던 아저씨 덕분이었다. 그는 손님들이 뜸한 날이면(아마도 장사가 잘 안 되는 영화가 걸려 있었을 듯한) 극장표 대신 코흘리개들이 모아온 돈을 받고 우리를 슬쩍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어린 나는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극장 안으로 들어가 온종일 영화를 보곤 했다. 내 인생에서 영화보기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그 나이에 보아서는 안 될 야한 영화에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구석도 이해 안 되는 어려운 영화까지 무분별하고 무차별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양으로 보면 행운스러운 시작이었고 질로 보자면 지극히 엇나간 시작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런 시작 탓이었는지 중·고
이소룡, 내 어린 시절의 삽화, <정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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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atch 2000년, 감독 가이 리치 자막 영어, 한국어, 중국어, 타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화면포맷 1.85:1 지역코드 3<스내치>는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가 상당히 난감한 영화이다. 우선 빠른 설명을 위해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던 감독의 전 작품인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를 얘기하자니, 그 영화를 실제로 본 사람이 아닌 경우 십중팔구는 “록… 스모킹… 뭐?”라고 반문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스내치>에 출연하는 세계적인 수준의 스타인 브래드 피트나 <트래픽>으로 최근 주가를 올린 베니치오 델 토로를 언급하자니, 둘 다 10명이 훨씬 넘는 주연배우들(?) 중 한명일 뿐이라 적당하지 않다. 게다가 브래드 피트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아이리시 영어를 웅얼웅얼거리면서 피터지게 맞기도 하는 이상한 놈팡이 집시로 나오고, 한술 더 떠 베니치오 델 토로는 영화가 시작된 지 20여분 뒤면 화면에서 얼굴을 찾을 수가 없다. 고육지책으로
이런 예고편 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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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 영화팬들의 머리 속에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흑백영화 <앵무새 죽이기>(국내 상영 제목은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의 몇몇 장면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박혀 있을 것이다. 주인물 애티커스 핀치 판사 역을 맡은 펙의 연기도 볼 만했지만, 인종갈등에 휩싸인 미국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사랑과 정의(正義)에 눈뜨며 자라는 세 아이(잼, 스카우트, 딜)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유소년기의 이미지로 기억 세포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사람들은 이렇게 걸어다녔대”라며 잼이 여동생 스카우트에게 이집트 벽화 속의 ‘게걸음’ 포즈를 흉내내던 장면, ‘이상한 사람들’로 알려진 레들리 집안의 비밀스런 은둔자 부우 레들리가 스카우트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일- 그런 장면과 사건들 말이다.<뉴욕타임스> 8월28일치 보도에 따르면, 그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g
시카고의 ‘앵무새’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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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홍성담의 5월 판화 연작 180여점이 광주시립박물관으로 간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가 80년대에 제작했던 ‘오월’ 판화 연작 180여점이 ‘하정웅 컬렉션’으로 한몫에 팔려나가 새 생명을 얻으려 광주시립박물관으로 떠나던 날… ‘하정웅 컬렉션’이 인권과 평화라는 올곧은 주제를 지닌 미술품들만 모으고 있다는 걸 알기에… 돌아보니까 내가 판화 한점 멋있게 파야겠다 해서 만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그때그때 화급한 쓰임새가 있어 달려든 것들이었어요. 포스터를 급히 찍어야 한다, 팸플릿 표지가 필요하다, 분신한 열사도가 있어야겠다….”(<한겨레> 8. 23.)생각해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딘가로 맹렬하게 달려가던 한때가. 그러다가 조금씩 힘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풍경들도 어느덧 회색으로 바래져갔다. 이곳저곳에서 ‘5월’이라는, ‘광주’라는 단어가 들려도 큰 울림이 없었다. 아니, 그저 개인적인 쇠락일 뿐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그렇게 지
과거, 진실 그리고 ‘마지막’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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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5일부터 8일 동안 서울시네마테크는 거장들의 대표작 12선을 상영하는 ‘영화사강의 영화제’를 열었다. <씨네21>은 영화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의 가운데 <빅 슬립> 제작과정,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세계, 비평적 사건으로서의 <시민 케인> 등 3개의 강의를 발췌,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지난 8월25일부터 8일 동안 서울시네마테크는 거장들의 대표작 12선을 상영하는 ‘영화사강의 영화제’를 열었다. <씨네21>은 영화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의 가운데 <빅 슬립> 제작과정,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세계, 비평적 사건으로서의 <시민 케인> 등 3개의 강의를 발췌, 지상중계한다. 편집자그는 왜 5분을 잘랐을까제1강 - 임재철이 들려주는 <빅슬립> 제작과정지금 우리가 할리우드영화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감독과 영화들은 60년대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비평문화, 누벨바그의 감독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모두가 아는 영화, 그러나 알지 못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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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영화제가 황금종려상을 바친 영화 <아들의 방>은 슬픈 영화다. 단란한 중산층 가정, 40대인 지오반니와 파올라 부부는 딸 이렌과 아들 안드레아와 함께 살고 있다. 정신상담의인 지오반니는 아들과 함께 뛰는 것을 즐긴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지오반니는 오늘도 아들과 조깅을 나가려하는데 환자로부터 “급한 일로 만나자”는 전화를 받는다. 환자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오반니를 기다리는 것은 아들이 스킨스쿠버를 나갔다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 지오반니 가족은 갑작스런 불행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날 그 전화만 안 받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지오반니의 머리를 맴돈다. 과연 그들 가족은 어떻게 비극을 극복할 것인가? <아들의 방>은 ‘이탈리아의 우디 앨런’이라 불리는 중견감독 난니 모레티의 영화다. 정치풍자적인 코미디로 널리 알려진 난니 모레티는 이 영화를 정치적인 암시나 코믹터치 없는 솔직담백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유럽의 평단은 난니 모레티의 이런 태도를 ‘어른스러
그가 떠난 뒤 우리 삶엔 무엇이 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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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홍수환 잽을 더 날려.”“문성길, 좀더 리얼하게 치라고.”지난 7월 말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는 권투시합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학교 스튜디오라기엔 제법 큰 규모인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투시합은 단편영화 <승부>의 촬영현장이다.주연을 맡은 두 배우는 극중 이름인 홍수환(장재용)과 문성길(배윤범)답게 실전 못지않은 난타전을 펼치고 있었고, 크레인까지 동원된 촬영은 충무로 현장을 보는 듯했다. 한 장면 끝날 때마다 모니터 앞에 모여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는 진지했다.올해 이스트만 코닥 단편지원작으로 선정된 홍종호 감독의 <승부>는 권투라는 승부의 세계를 통해 남을 이겨야 살아갈 수 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권투시합장면을 위해 주연배우 2명과 함께 3개월간 권투도장을 다녔다는 홍종호 감독은 현재 영상원 4학년에 재학중이다. 홍 감독은 “서로 미워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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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로 데뷔한 정초신 감독의 2번째 작품 <비트겐슈타인>에 안재욱이 캐스팅되었다. <찜> <키스할까요?> 이후 스크린 나들이가 뜸했던 안재욱은 악의 영생을 꿈꾸며 부활한 연쇄살인범에 맞서는 냉철한 이성의 강력계 형사로 등장한다. 안재욱과 함께 연쇄살인범을 쫓는 다혈질 형사로는 김상중이 낙점된 상태. <비트겐슈타인>은 9월15일 크랭크인하여 내년 2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악이 찜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