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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언론들은 이번 베니스영화제 출품작 가운데 영국 켄 로치의 <네비게이터>와 프랑스 로랑 캉테의 <시간의 고용자들> 두편을 ‘사회파 영화’라는 타이틀로 한데 묶어 보도하는 일이 잦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민영화된 철도회사 노동자들의 수난을 다룬 <네비게이터>나, 고액 연봉을 받다가 해고된 전직 컨설턴트의 내면세계를 좇아간 <시간의 고용자들>은 모두 신자유주의 질서가 개인 일상에 어떻게 파급되는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카메라를 들고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두사람꼭 이 두 영화만이 아니라 켄 로치와 로랑 캉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해볼 만하다. 노조가 무기력해지고, 노동자의 계급적 자존심이 흔적없이 사라진 90년대 중반 이후로 장편 극영화에서 노동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는 이 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65살의 켄 로치는 영화를 시작한 60년대부터 노동자의 편에서 노동자를 다룬 영화를 찍어왔고, 최근까지도 변함없
신자유주의는 일상에 어떤 무늬를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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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다뤘다는데.9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결말을 바꿔서 각색했다. 한 중년이 해고당한 사실을 숨겨오다가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신문에서 읽었을 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도망가고 비상하고 싶어하다가 스스로를 괴물 같은 존재로 만들어간 캐릭터에 관심이 갔고 아무 준비없이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인공을 중상류층으로 만들고 계급적 시점을 이동시켰다.전작 <인력자원부>의 대학생과 이 영화의 빈센트를 비교한다면.둘 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빈센트는 사회적 공간에서 물질화돼버린 브루주아지다. 새로운 세계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거짓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욕구를 해소한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까지 속해온 세계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그걸 다뤄보고 싶었다. 실제사건과 달리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는 걸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는 비극적인 것 아닌가.<인력자원부>는 음악
“해피엔딩?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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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국 철도 노동자들의 영화를 ‘네비게이터’(항해자)로 이름 지은 이유는.본래 네비게이터란 19세기 노동자들, 특히 영국의 수로와 철로 공사에 동원됐던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내 영화의 배경은 남부 요크셔이고, 영국 철도가 민영화되던 90년대 중반이긴 하지만, 유래는 그렇다.영국 철도 노동자의 상황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는가.많은 얘기를 할 수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는 것이다.왜 하필 90년대 중반의 철도 노동자들을 이야기하게 됐나.철도가 민영화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들에 대해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처가 나빴다. (웃음) 노조가 전부 흩어지게 만들었으니까. 지금? 글쎄, 지금의 노조는 토니 블레어의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작가 로브 다우버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던데.로브는 17년 동안 철도 노동자로 일해온 자신의 경험에 관한 편
“노동자들의 연대가 절실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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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세계영화의 변방에 머물던 것도 이제 태곳적 얘기다. 기타노 다케시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제답게 베니스는 올해도 아시아 작가 발굴에 힘을 쏟았다. 최근 몇년 동안 금사자상의 주인이 아시아감독이었기 때문인지, 영화제를 찾은 서구 언론들도 아시아영화의 상영장마다 떼지어 몰려드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김기덕 감독과 프루트 챈은 ‘2년 연속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시아감독’이라는 묶음으로 종종 비교가 됐고, 인도 영화사상 초유의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서사극 <아소카>는 수입·배급 관계자들 사이에 ‘베니스에서 꼭 봐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서구관객의 눈에 거칠고 생경한 이미지로 다가간 <할리우드 홍콩>이나 <아소카>처럼 베니스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들이 있었던 반면, 이란의 <비밀투표>와 중국의 <해산물>처럼 특정한 사회적 현실을 다루면서도, 다국적 평단과 관객에게 조용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영화도 있었다. &
리얼리즘을 넘어 인류학적 진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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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란영화의 일반적인 경향인 리얼리즘영화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는데.그렇다. 그렇게 봐주길 바란다. 리얼리즘영화를 만든 게 아니니까.소녀와 병사의 여행은 하나의 우화인 동시에 매우 리얼한 인류학적 보고서 같은 느낌이다.민주주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해석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민주주의가 어떤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그런 사회에서 말이다. 선거관리원인 소녀는 교과서적 이상을 갖고 외딴 마을을 찾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배운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놀라워한다. 사회 또한 그녀의 이상과 노력을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었고, 이런 상호작용을 담아내려 했다.편집과 조명 등으로 강조된 자연 풍광의 느낌이 운명론적이랄까 체념적인데.이건 좀 다른 얘긴데, 이 영화에는 인공조명을 쓰지 않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룻동안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시퀀스에 시간 관념이 있다. 그런데도 자연 조명만을 고집하다보니, 기
“한번에 모든 게 이뤄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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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들은 과연 정상인가.물론,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질문자가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자) 지난 몇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유심히 관찰했고 또 기록해 왔다. 그러면서 ‘사람’에 관해 많은 걸 배웠는데,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이 영화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여섯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폭염, 주말, 그리고 오스트리아라는 배경이다. 이 영화에는 의외로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해 왔는데, 이번 영화도 이전의 다큐 작업과 관련이 있나.이 영화는 픽션이다. 대사도 각본도 있다. 캐릭터에 맞는 사람들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대부분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영감에 따라 스토리를 바꿔가는 등 다큐적인 스타일로 촬영하기도 했다.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폭력 사용도 빈번하다. 파시즘이나 국수주의적인 혐의가 보이기도 하는데,그
“지방색을 드러내는 데 언어만한게 어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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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웨딩>은 당신의 전작들에 비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현대 인도를 배경으로 한 가족영화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과 다르다. 이 작품은 내 고향인 펀자브에 바치는 연가이기도 하다. 펀자브 공동체 사람들은 열심히 즐기고, 일하고,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하는 점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공동체 사람들과 비슷하다. 우리의 전통 문화와 고유한 정서를 재발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공존하게 된 현재 인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게 됐다. 복잡한 현대 인도에서 펀자브가 유지해온 독특한 집단성을 지금쯤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도 어떤 변화나 차이가 있었는지.영화는 보는 이를 자극하고 또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우선 아주 개인적으로 내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 내 가족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인도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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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는 그동안 내게 4개의 트로피를 줬다. 너무 잘 대해줬다. 이번 초청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 것은 그런 오랜 부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화제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언론과 대중 앞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은둔 작가 에릭 로메르가 올 베니스영화제 평생공로상 시상식에 나타나기로 한 것은 이래저래 화제가 됐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초청장을 내민 칸영화제에도 퇴짜를 놓았으니, 베니스쪽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노심초사 마음을 졸인 것은 당연했다. 로메르는 확답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시상식은 폐막 전야인 9월7일에 해야 하고, 신작 <영국여인과 귀족>의 상영도 같은 날 해야 한다는 것. 그의 요구대로 시상식은 9월7일 영화제 메인 상영관인 살라 그란데에서 거행됐다.평생공로상은 말 그대로 영화에 평생 헌신해온 영화인에게 주는 상으로, 수혜자는 대개 노배우들인 경우가 많았다. 베니스영화제가 올해의 평생공로상
“내 영화는 연극이고자 하지 않은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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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을 발표하는 순간, 다양한 국적, 다양한 색깔의 영화를 불러모으마던 베니스의 약속은 완성됐다. 금사자상을 수상한 인도의 <몬순 웨딩>과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한여름>은 그 배경과 성격이 판이한 작품. 어느 한편에 열광할 취향이라면, 다른 한편을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참 많이 닮아 있다. 인도의 ‘몬순’과 오스트리아의 ‘한여름’. 공교롭게도 지역 특유의 날씨를 제목으로 갖다붙인 두 영화는 ‘지금 여기’에 관한 개성있고 신랄한 보고서다.흥겨운 축제의 장을 연 <몬순 웨딩>미라 네어가 <몬순 웨딩>을 들고 베니스에 날아온 것은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다. 어떤 기대도 의도도 없었다면, 운이 아주 좋았던 게다. 일찌감치 베니스영화제 출품을 결정했던 미라 네어는 <몬순 웨딩>을 소개하는 글에서 “영화의 배경인 인도의 펀자브는 이탈리아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충
`지금 여기`에 관한 신랄한 두편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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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가 열린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베니스에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쨍하게 눈부신 햇살과 끈적거리는 바람에 웬만큼 저항력이 생겼다 싶을 때, 예고도 없이 시린 바람이 불어닥쳤고 가끔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낙비도 내렸다. 차라리 그런 ‘반전’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이렇다 할 화제작도 없고 이슈도 없이 지루하고 나른하게 이어지던 영화제는 결국 한순간의 흥분과 긴장도 제공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혹시 베니스영화제는 막판 ‘깜짝쇼’라도 보여줄 요량으로 <몬순 웨딩>에 황금사자상을 안긴 건 아닐까.황금사자상부터 남녀주연상까지, 이견분분9월8일 저녁, 영화제 폐막식이 열린 살라 그란데에서는 환호와 침묵과 야유가 엇갈렸다. <몬순 웨딩>은 여러 버전으로 나돌던 ‘수상 유력작’ 리스트에 단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작품. 기자단은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전통과 축제에 관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코미디를 지지하던 베니스 현지 관객 사이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미라 네어 역시
다양했다, 그러나 `발견`은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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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에 얽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식민지 시절의 유명한 협객이었고 뒤에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고 김두한씨의 단성사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아주 오래 전 조감독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나는 고 김두한씨의 실물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있던 건너편 건물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그의 정면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가 바로 그 유명한 김두한씨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숨을 죽이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소변을 끝내기까지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과연 그는 거물다운 기품을 보이고 사라졌다. 그가 국회 본회의에서 부총리였던 장기영씨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나는 전부터 그의 전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일화를 소개하곤 했는데 그중에 단성사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화장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소년 시절, 단성사 옆 설렁탕 집에서 키워졌는데 당연히 단성사 출입이 잦았다. 물론 동네 꼬마들을
“바보같은 녀석들, <바보선언> 보겠다고 장사진을 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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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는 오늘도 사람들 발길이 부산했다. 지하철 입구를 오르내리는 젊은이들에 섞여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가을햇살을 받고 단성사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94년 동안이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극장문화의 본산이었던 단성사는 그렇게 초라하게 늙어 있었다. 벌써 간판이 모두 철거되어 굴레 벗은 말처럼 벌쭉한 모습으로 조만간 철거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얼마 전 극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 영화관 12개가 들어선다고 자랑하던 J 사장의 말을 들었을 때 반가우면서도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헐리기 전에 건물이라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곳을 찾아간 것이다.단성사는 우리 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발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상영관이었다. 극장 수보다 영화제작편수가 넘치던 시절, 그곳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큰 긍지였고 행운이었다. 물론 당시 단성사의 웅장한 음향과 스크린의 선명한 영상 덕에 관객은 즐거워했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 무렵의 한국영화는 녹음, 현
“거기에 영화 걸면 행운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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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림(66) 상무는 단성사 터주대감이라 불릴 만하다. 태흥영화 이태원 사장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역사책이야”라고 말할 정도다. 단성사 왼편 건물 3층에 마련된 간이 사무실, 여전히 그는 건재했다. 지난 9월1일로 극장 업무는 끝났지만, 여전히 그가 바쁜 이유는 뭘까. “그래도 제일 큰 극장이었잖아. 곧 100년을 채울 텐데, 내가 직접 쓰지 않더라도 누군가 책 한권 정도는 내야지.” 그가 지금까지 모은 극장 자료만 해도, 큰 박스로 2개나 된다. 어디 고이 모셔 있던 자료를 거저먹은 게 아니라 당시 문화공보부 등을 들락거리는 등 발로 직접 뛰어서 구한 것들이다.몇년 전부터는 1920∼30년대 영화들의 원제를 찾느라 직접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그런데 자료 찾느라 <매일신보> 같은 걸 뒤지다보면 배꼽잡을 일이 많아. 예를 들면 당시 배우들 이름 뒤엔 군 또는 양을 붙였거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외국사람 이름만으로 성별을 아나. 그러니 로버트 아무개양이라고 써놓고선 며
“살아 있는 역사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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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역사처럼 단성사의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기록이나 구술에 의한 것만 하더라도 열번이 넘는다. 첫 번째 단성사를 세운 이는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세 사람. 1907년 동대문시장 상인 출신이던 이들은 근처 영도사 대원암에 사람들을 모아넣고 ‘조선 연예계 발전 방안’이라는 연설회를 가진 뒤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다음은 이익우. 1909년부터 경영을 맡았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지가 않다.단성사는 같은 해 호남의 갑부 한흥석에게 넘어가고, 이듬해 일본인 후지와라 구다마로에게 넘어갈 정도로 운영이 어려웠다. 그러다 1917년 황금관(이후 국도극장)의 소유주인 다무라가 단성사를 인수한다. 당시 토지는 일본인들에게 불하한 것이라, 해방 이전까지 단성사의 땅 주인은 다무라였다. 단성사가 흥행 극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18년 당시 광무대의 소유주이자 창에 빠져 있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한 뒤, 영화상설관을 표방하면서부터다. 그는 본관을 신축하고, 주임변사 서상호 외 6
거기에 이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