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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단에나 ‘정상’적인 사람은 한명쯤 있어줘야 한다. 킬러 같지 않은 킬러들의 이야기 <킬러들의 수다>에서 ‘재영’이 그런 인물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신부 앞에 무릎꿇고 살인행각을 털어놓는 특이행동만 제외한다면, 죽여야 할 사람과 사랑하게 된다든지 하는 ‘비행’없이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재영은 그의 말마따나 “제일 노말한 킬러”다. 그저 의뢰받은 작업을 수행하고 돌출행동은 하지 않는, 어떤 식으로든 튀고 마는 다른 킬러들에 비하면 심심하기까지 한. 하지만 “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재영에게 “영화의 무게를 잡아주는” 재영 역의 매력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오버하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녹아나게 하려고 했어요.”
“코미디를 하더라도 튀는 걸 안 좋아해요, 다 취향이죠.”
“장르구분 없이 언제나 진실한 연기를 하고 싶어요.”
평범이니 절제니 하는 말들이 오갔지만, 영화 밖 정재영은 그닥 ‘노말’하지만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이>를 찍다 다쳤다
묵묵히, 웃음에 명중하다, <킬러들의 수다>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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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스트레스가 맨해튼을 짓누른 지난 3주간, 뉴욕 영화계는 잠시 시계 바늘을 멈춰야 했다. 수없이 봐오던 영화 속 테러의 스펙터클은 극장의 어둠을 나서면 잊혀졌지만, 무역센터 테러사건이 제공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펙터클’은 빠져나올 극장문도 없었다. 아마도 한동안 뉴요커들은 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디어가 반복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나리오며 성미 급한 대통령의 전쟁선언은 익숙한 레퍼토리라고 치자. 도시 한쪽에서는 수천구의 시신이 아직도 철근더미 속에 묻혀 있는데, 다른 거리에선 일상으로 돌아간, 혹은 돌아가게끔 내몰린 사람들로 여전히 바쁜 하루가 지나간다. 강제된 일상 속의 비일상, 9월의 맨해튼은 순간순간 섬뜩해지는 초현실적 공간이었다.9월25일, 뉴욕시가 캐널 스트리트 이남을 제외한 뉴욕시 전역에 영화촬영 허가를 내주기 시작하고, 뉴욕영화제와 IFP(인디펜던트 픽처 프로젝트) 마켓이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계도 그러나, 어제
무역센터 테러, 할리우드에 못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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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조 남성 킬러’ 중 맏형답게 신현준의 카리스마는 막강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세 동생’들을 모이라고 할 때도 “얘들아!” 한마디면 충분했다. 처음엔 카리스마 넘치는 킬러였다가 나중엔 나사 하나 풀린 듯 어리숙한 면을 드러내며 차츰 ‘망가지는’ 킬러들의 맏형 상연은 ‘신현준’ 이름 석자가 주는 무거운 고정관념을 단숨에 날려버린 통쾌한 한방이었다. 장난을 쳐보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오히려 가지런히 서서 손을 모아잡는 표정에도 개구쟁이 소년 같은 장난기가 폴폴 날린다. 껑충한 키, 매처럼 굽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 아주 짧게 자른 머리, 진회색 바짓단 아래 드러난 하얀 맨발. “원래 신발을 못 신어요. 양말도. 답답해서요.”
<장군의 아들>의 하야시, <은행나무 침대>의 황 장군, <비천무>의 진하 등 유독 눈에 힘주고 무게잡는 역할을 많이 해온 신현준에게 킬러 상연으로의 변신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연기생활 11년에 코믹 연기도 처음이었
11년 만의 변신, 눈에서 힘을 빼고, <킬러들의 수다> 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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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 장소는 오페라하우스가 아니라 사진 스튜디오. 미리 약속한 듯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네 남자가 다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선 다혈질의 ‘정우’와 일에 관한 한 빈틈없는 ‘재영’이 먼저 도착했고, 어리숙하지만 속 깊은 막내 ‘하연’이 뒤이어 나타났다. 그리고 동생들이 기자들과 조근조근 수다를 이어갈 무렵, 이들의 맏형격인 ‘상연’이 들어선다. 장진 감독의 신작 <킬러들의 수다>의 시사회가 있었던 9월25일 밤 9시, 네 킬러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신현준, 정재영, 신하균, 원빈. <킬러들의 수다>를 떠난 뒤 각자 다음 스케줄로 바빠 얼굴 보기 힘들었다며, 이들은 조금씩 변한 모습으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동안 새 영화를 위해 머리를 노랑, 초록으로 물들인 신하균이나, 머리를 짧게 자른 나머지 셋 모두 더이상 영화 속 모습들은 아니었지만, 서로 툭툭 치며 농담을 나누는 친밀한 공기는 영화와 닮아 있다. 수개월간 이 인간적인 킬러들을 진두지휘했
<킬러들의 수다> 신현준, 정재영, 신하균, 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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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다시 열린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코언 형제와 함께 감독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린치의 신작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블루 벨벳> <트윈픽스> <로스트 하이웨이>에 이어지는 환상적인 어둠을 그려내는 린치 특유의 미학이 빛나는 영화이다. 전작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 고독하지만 강인한 한 인간의 초상을 슬프게 그려 거장의 면모를 보였던 그는 이번 영화를 좀더 밝고 유머러스한 <로스트 하이웨이>로 만들었다. 영화는 검은 머리의 미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낯선 빈집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금발머리 배우지망생을 만나고 둘은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나선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원래 미국 방송사 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하기로 했던 작품.린치가 만든 파일럿 프로그램을 보고 제작을 포기한 탓에 프랑스 방송사 카날플러스가 인수해 영화로 만들었다. 린치는 칸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관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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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딤>의 배경은 서기 2050년. 지구 정복을 꿈꾸는 우주 비밀단체 네서스와 그들을 저지하려는 지구보호단체 ‘그린 프론티어’의 대결을 그린 장편 풀 3D 애니메이션이다. 2년여의 제작기간, 45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100% 디지털로 작업했다. 인물의 움직임을 입력하여 활용하는 모션 캡쳐 방식으로 기존 3D 애니메이션의 문제로 지적돼온 동작의 부자연스러움을 최대한 극복했다. 그린 프런티어 대장 강두타 목소리 연기는 <나에게 오라> <청춘>의 배우 김정현이, 그린 프런티어의 소녀 로봇 조종사 유미리는 TV탤런트 소유진이 연기했다. 두 배우는 일부 장면에서 모션 캡처도 겸했다. 모션 캡처는 동작정보를 수집할 사람의 몸 부위마다 센서를 부착하고 컴퓨터가 그 장치를 통해 각 부위의 위치변화를 파악하여 정보로 보관하는 작업. 두 배우가 모션 캡처하는 날, 제작사인 디지털 드림 스튜디오 안에 자리잡은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은 온몸에 구 모양의 적외선 센서를 부착한
100% 디지털을 완성하는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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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자유로운 야생마 같은 삶을 원하는 지미(크리스 오도넬)는 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앤(르네 젤위거)을 만나기 전까지 청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지미에게 ‘야생마의 마음’이 남아 있어선지 청혼은 썰렁해진다. 화가 난 앤에게 거절당하고 돌아와서, 지미는 할아버지의 유언내용을 알게 된다.서른살이 되는 날 오후 6시5분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단 한푼의 유산도 받지 못한다는 것. 부리나케 앤을 찾아 달려가지만 제대로 마음을 잡지 못한 지미의 ‘표정’ 때문에 다시 앤이 떠나간다. 시간은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과연 지미는 결혼할 수 있을까?■ Review 결혼식이 끝나면, 신부는 부케를 던져 다음 신부를 ‘점지’한다. 세상 모든 남자들은 자기 여자친구가 그 부케를 받지 않기를 원한다? 결혼을 두려워하는 남자의 심리는 <결혼의 조건> <포스 오브 네이처> 같은 로맨틱코미디나 시트콤 <프렌즈>에서도 흔히 다뤄온 소재다. <청혼>은 거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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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두번의 일식이 있던 어느 여름, 매력적인 소녀 시빌(니노 쿠카니제)이 방학을 맞아 시골 마을로 찾아든다. 동갑내기 소년 미키(샬바 야쉬빌)는 시빌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지만, 시빌은 미키의 아버지 알렉산드르(예브게니 시디킨)에게 빠져 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소문과 달리, 마을 여자들과 마음껏 즐기는 알렉산드르를 보면서 시빌은 육탄 공세를 시작하고, 미키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Review “그 여름 시빌한테 73번의 키스를 했다. 100번의 키스를 허락받았지만…. 27번의 키스는 못다한 채 남겨두고 말았다.” 이제 막 변성기를 맞은 듯한 소년 미키의 새된 목소리가 영화의 문을 연다. 못다한 키스에 대한 아쉬움이, 놓쳐버린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걸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사랑 이후, 그가 부쩍 키자람을 했으리라는 것도. <못다한 27번의 키스>는 아직 첫사랑의 신열을 간직하고 있는 소년이 털어
못다한 27번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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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1936년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 갈리시아, 병약하고 여린 심성의 꼬마 몬초(마누엘 로사노)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학교에 가지만 급우들의 놀림을 못 이겨 도망쳐나오고 만다. 그러나 자상한 교사 그레고리오(페르난도 페르난 고메스)의 설득으로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고 점점 선생님의 가르침과 인품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Review앞의 줄거리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알아챘겠지만, <마리 포사>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36년은 바로 스페인내전이 발발한 해다. 그해 2월16일 스페인의 총선거에서는 공화주의자들과 공산당 등이 연립하여 만든 인민전선(Frente de Popular)이 승리를 거두었고 5월에는 마누엘 아자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승리는 잠시였고 그해 7월18일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가 발발함으로써 스페인은 2년이 넘는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내전 발발 이후의 전선 상황에 대한 영화로 우리는 이미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
마리 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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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가난한 흑인 랜스(크리스 락)는 우편 배달부이며 아마추어 코미디언. 사람들을 웃기고 싶지만 무대에선 야유만 받는 딱한 그러나 낙천적인 수다맨이다. 어느날 길을 지나던 여인 손티(레지나 킹)한테 한눈 팔다 교통사고로 천국에 갔는데, 착오라는 사실이 확인된 뒤, 임시로 갑부 웰링턴의 몸을 빌려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다. 웰링턴은 사악한 아내와 비서에 둘러싸여 늙어가고 있는 욕심많고 비정한 부자. 그의 몸을 빌려 랜스는 자비를 베풀고 손티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웰링턴의 몸을 돌려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Review‘이런, 내가 죽어버렸군. 이럴 리가 없는데.’ 확인해보니 그게 천국 담당자의 사무착오였다. 난데없이 천국으로 호송된, 배달부이자 아마추어 코미디언(그것도 흑인) 랜스는 정당한 항의 끝에 미국에서 15번째 부자 웰링턴의 몸을 빌려 생을 되찾는다. 경로는 다르지만, 프랭크 카프라의 스미스씨나 디즈씨가 엉겁결에 상원의원이나 백만장자가 됐듯이, 별볼일 없던 주변인이 세
다운 투 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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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녹슨 기와지붕 위로 비가 내리고, 낙숫물 듣는 아래 낡은 창틀에 까만 가슴이 걸려 있다. 이 문장은 잘해 봤자 모순어법이거나 비문이다. <봄날은 간다>는 이런 식의 모순어법 혹은 비문으로 가득 찬 영화다. 물론 이미지를 먹고사는 영화에서 모순어법과 비문은 매혹인 동시에 함정이기도 하다. 이 모순어법은 연출력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허진호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젊은 장인에 가까울 정도다. 게다가 사랑에 지치거나 목마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참 위로가 될 것이고, 보고 나면 눈이 퉁퉁 부을 수도 있다. 또 가슴이 쓰리고 온화해진다.녹음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는 강릉 방송국 아나운서 은수(이영애)와 만나 사랑하게 된다. 대밭을 휘감는 바람 소리와 깊은 밤 절간의 풍경 소리를 녹음하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구전 민요도 녹음한다. 그들은 주로 라면만 먹고 (술에 취하기는 해도) 술 먹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잠자리 모습까지는 보여 주지 않고, 한쪽이 바람
<봄날은간다> 매혹적인 일상 그러나 함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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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좋아하지만 결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 지미(크리스 오도넬)에게 앤(르네 젤위거)이 나타났다. 앤도 결혼에 특별한 관심이 없을 것 같아 사귀기 시작했다가 무척 좋아졌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은연중에 자꾸만 결혼하고 싶은 생각을 내비치더니 남의 결혼식에서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아채기까지 한다. 지미는 하는 수없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그러면 청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혼을 열렬히 바라는 절박한 말은 솔직하지도 않고, 입에서 잘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앤을 앉혀놓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두서 없이 지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런 식이다. 나는 결혼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 너를 사랑하고… 이 길밖에 없는 것 같고…. 마침내 나온 결론에 해당하는 말이 “네가 이겼어”이다.<청혼>은 청춘남녀의 사랑이 자꾸만 어긋나서 관객의 애를 태우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만나는 흔한 코미디성 멜로다. 줄거리는 대체로 예측가능한 방향을 좇는데, “네가 이겼어” 같은 기발하고 재치
청혼한다는 말이 “네가 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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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의 수다>는 두 갈래로 나뉘고 있는 국내 코미디 영화의 흐름을 분명하게 `증언'해준다. <신라의 달밤>이나 <엽기적인 그녀>처럼 마치 속도전을 치르는 듯 코믹스런 말과 행위들을 쏟아내는 전통적인 코미디가 한쪽에 있다. 여기에선 상식의 허를 가볍게 찌르는 상황 연출로 웃음을 이끌어내기도 한다.다른 쪽에는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김지운 감독이나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의 장진 감독이 만들어온 잔잔한 블랙코미디가 있다. 여기에도 유머어린 말과 행위가 가득한 건 마찬가지이지만, 작용·반작용의 속도를 되도록이면 늦추는 느림의 방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또 상식의 전복보다는 가치의 전복에 힘을 쏟아 블랙코미디로서의 면모를 갖춘다.장진 감독은 세번째 작품 <킬러들의 수다>에서 후자의 형식미에 지나치리 만큼 `집착'한다. 이어질 대사나 액션을 곧바로 쳐주어야할 것 같은 순간을 1~2초씩 지연
얼뜬 킬러들의 죽여주는 엇박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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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 인터뷰인터넷영화 <극단적 하루>에 이어 킬러 이야기다. 왜 킬러 이야기에 집착하게 됐나.내가 해야 되는 이야기는 풍자이고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가장 멋있는 블랙코미디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현실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만약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너무 선동적일 테고 직접화법으로 얘기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킬러는 소재일 뿐이다. 우리 현실에서 아무도 총 들고 설치고 폭탄 터트리는 킬러가 있다고 여기지 않을 거다. 그런 비현실적 상황을 보면서 나도 저런 심정일 때가 있었지, 하는 느낌을 받았으면 싶었다. 킬러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킬러들의 수다>라는 제목과 달리 전작에 비해 말수가 적어진 느낌이다. 입담이 줄고 타이밍으로 승부하는 유머가 많다.대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을 하다보면 자꾸 많아지고 말이 많으면 뭔가 웃긴 한방을 터트려야 된다는 강박이 생기는데 너무 그런
“킬러는 소재일 뿐, 부드러운 화두를 던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