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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통 관습과 개인의 욕망간의 충돌을 그린 멜로드라마. 5세대 감독의 일원으로 불리는 황지엔신 감독이 만든 범작이다. 1920년대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결혼을 위해 길을 가던 신부가 마적단에 잡힌다. 신랑은 신부를 구하기 위해 애쓰던 중 폭약사건으로 급사한다. 신부를 호위하던 하인 우쾌는 마적단 두목과 목숨을 건 도박 끝에 신부를 무사히 데리고 집으로 오고, 신부는 우쾌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대만과의 합작영화이다.
TV영화... <목인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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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집이 충무로에 있었다. 축복이었나? 여하튼 인생은 훨씬 더 흥미로웠다. 15분만 걸으면 대한, 명보, 국도, 스카라, 그리고 그 고마운 젊은이의 메카, 재개봉관 아테네 극장이 있었으니 시네마 천국이었다. 머리 길게 기르는 중·고교를 다닌 덕에, 어른스런 외모 덕에, 물론 눈 잘 감아주는 극장 덕분에 나의 사춘기는 영화로 채워졌다. ‘범생’으로 믿어주던 학교와 부모 몰래 나의 홀로 반란은 영화관에서 일어났던 셈이다. 어떤 해에는 읽은 소설 숫자보다 본 영화 숫자가 더 많았다. 매주 한편의 영화를 본 셈이다. 과하긴 과했다. 그러나 좋았다. 그때 봤던 수백편의 영화 중에서도 강한 기억에 남는 영화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세 번 봤다. 두 번째, 세 번째는 혼자 가서 보았다. 도대체 그 영화 무엇에 그리 끌렸을까? 세 시간 길이의 영화, 사막처럼 따갑고 건조한 영화, 여자는 한명도 안 나오는 영화. 오직 한 장면을 보는 것만도 좋았다. 사막의 밤, 바람이 불면
열다섯 피를 흔든 결단의 밤은 어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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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군대 시절 친했던 운전병에게 부탁해서 어렵사리 구한 <씨네21>을 몇번이고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내가 글을….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 컬트’란 이름으로 격주마다 글을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근데 막상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자리에 앉으니, 앞이 깜깜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영화감독 한다고 설친 전력에 비해 너무도 모자란 나의 영화적 지식. 영화적 공력 부족. 그러나 어찌하랴? 이게 나인걸.그래서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그리 대단치도 않고, 그리 특별한 영화를 본 기억도 많지 않다. 다만 좋아하는 영화는 무지 자주 보고, 그 지대한 영향으로 지금까지 영화 하나 붙잡고 살아왔다. 솔직히, 나의 글 실력은 이 글을 읽고 계실 분들이 더 잘 알 것이고, 내 글에서 유명 영화비평가들의 잘 빠진 글을 기대하는 이는 한명도 없을 것이기에 편하게, 아주 편하게 내 인생의 영화들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 좀
유년의 바다에 뜬 보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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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씨네21> 칼럼에 ‘박수 쳤다 치고 떠난다’고 고별사를 날렸던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알다시피 우리 영화사가 제작했다. 코미디와 호러를 뒤섞어 장르영화에 반칙을 날린 이 영화로 그는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고, 명필름은 개성있는 크레디트를 얻었다. 하여튼 가상한 성공작이었다(라고 자부한다). 그와 당연히 두 번째 영화를 만들 줄 알았으나, 김 감독은 봄영화사로 돌연 날아가버렸다. 그 건으로 오정완 대표와 밤늦게 통화를 하면서, 나는 생각없는 싸움닭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얼마 뒤 봄영화사와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을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시사회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웃었고, 과장되게 박수쳤고, 80만명은 볼 거라고 떠벌렸다. 떠나버린 감독이 얄미운 만큼이나 재기발랄한 스타일과 슬픈 정서를 유머로 슬쩍 돌려 이야기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2000년대의 중요한 한국영화가 될 것임이 분명하
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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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기는 칼럼을 쓰라길래 기다렸다는 듯이 “뭐 그러지요”라고 냉큼 대답했다. 뭘 쓸까… 조바심만 내다가 마감이 코앞이지만 주제도 못 정하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씨네21>에 자주 들락거리는 구아무개가 들러 “김지운 칼럼에 선배 이름 나와요”라며 <씨네21>을 펼쳐보였다. 어디 글 내미는 것이 식은땀 나는 끔찍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지운 감독의 코를 꿰 사지로 내몰았던 전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에 뜨끔했다.모름지기 남 괴롭히고 마음 편하게 살기 어렵다더니… 이를 어쩐담. 멀쩡히 한량같이 잘 ‘노는’ 김지운 감독을 꼬드겨 한달에 두번씩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한 건 나의 미필적 고의다. 게다가 궁상맞게 들릴 수도 있는 혼자 사는 남자의 신변잡기까지 떠벌리라고 ‘똥꼬’를 찔러대며 부추기기도 했다.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내가 코꿴 사실을 알고 자기와 똑같은 낭패를 당해도 싸다며 약을 올려도 속수무책이다.사실은, 칼럼을 쓰겠다고 수락한 다음날, 거절해야겠다고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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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많은 게 뒤늦게 발견된다. ‘제국으로서 미국’이 그렇다. 1980년 5월24일,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 거리에 대자보가 붙는다. “미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이 신군부에 압력을 넣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사흘 뒤 광주가 잔인하게 진압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한국인들은 ‘미제국주의’를 말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독재투쟁에서 진보적 변혁운동으로 급격히 전화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의 9할을 가져다준 80년대는 그렇게, 시작했다.미국주도 신자유주의의 총본산이라 설명되는 건물과 미제국주의의 물리적 폭력의 집행처라 설명되는 건물이 공격당했다. 이른바 보복작전이 시작되고도, 누구에 의한 공격인지 분명치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 그런 공격을 가할 만한 대상이 너무나 많아서다. 말하자면 미국은 진작부터 그런 공격을 부르고도 남을 만했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은 테러로 시작하여 테러로 점철한, 인류 최대의 테러국가다.미국은 일단의 유럽
저능한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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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국영화에서 조명은 아무나 조명기를 들고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김성춘은 이러한 미개척 기술분야에 ‘새로운 빛’을 밝힌 최초의 한국인 조명기사다.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보고 기술 연구의 필요성을 느긴 김성춘은 조선에 순회공연 온 일본의 천승좌(天勝座)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동아(東亞)키네마에서 조명기술을 배운 후 일본 제국(帝國)키네마와 신흥(新興)키네마, 불이야(不二屋)프로덕션에서 활동했다. 1935년에 귀국하여 만든 첫 작품 <살수차>에서 각색·조명·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는 처음으로 80KW의 조명기를 사용하여 크게 화제가 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조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사재를 털어 한국영화기술협회(1955)를 설립했고, 한국영화제작공사(1961)를 설립·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사재를 털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똥기저귀 빨며 일본인에게 영화를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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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던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의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지난 9월15일 도쿄에서 뒤늦게 개봉했다. 영사기사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 1996년 <오카에리>으로 데뷔한 시노자키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이 작품은 2차대전중 태평양의 페리류섬에서 함께 전쟁한 경험이 있는 세명의 70대 남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영화다.미하시 다즈야, 오오키 미노루, 아오키 도미오 등 세명의 남자 배우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일본영화의 황금시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왔고,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 등 명감독 밑에서 연기를 단련시킨 경험이 있다. 우연치않게도 모두 1923년 생. 이들은 21년생인 팔순의 여배우 가자미 아키코와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 해외에서도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낭트 3대륙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00년 밴쿠버영화제에서는 용호상을 받았다. 영화는 그밖에도 세계 여러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뒤늦게 도쿄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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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순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잊게 된다. 렌즈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 앞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주었고, 순수한 빛을 갈구하는 나의 노력은 더해갔다.”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느낌을 바르게 해석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창출해내는 것이 촬영감독의 소임이라 여기던 스웨덴 출신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는 이같은 철저한 자기집중 위에 영화의 삶을 세웠다.근 30년 동안 그와 작업 해온 잉그마르 베리만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립지 않지만, 그와 함께 작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라고 자신의 시각이 되어준 닉비스트를 회상한다.1998년 <셀리브리티> 촬영을 끝으로 실어증으로 영화계를 은퇴하고, 이제는 초로의 노인으로 묻혀 지내는 스벤 닉비스트의 모습 뒤로 어릴 적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한 작은 소년이 오버랩된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는 것을 죄악
빛의 관찰자, 혹은 이미지의 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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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부탁해착하고 엉뚱한 몽상가 태희, 커리어우먼의 삶을 탐내는 혜주, 무기력한 조부모와 가난을 짊어진 지영, 쾌활한 중국계 쌍둥이 자매 비류와 온조는 인천의 상고를 졸업한 다섯 친구다. 이들이 오랜만의 밤샘 모임을 가진 밤 지영의 집은 무너지고 조부모의 죽음에 대한 경찰의 조사에 입을 열지 않던 지영은 분류감시원에 수용된다. 정재은 감독, 배두나, 이요원 출연, 마술피리 제작, 상영시간 112분박평식 그 흔들림 속에 가득한 꿈과 희망을 보라 ★★★☆심영섭 한국영화계도 부탁해 ★★★☆홍성남 그동안 우리가 놓쳐왔던 스무살, 그 꼼꼼한 기록 ★★★☆■ <킬러들의 수다>일감을 받아오는 맏형 상연, 사격의 달인인 둘째 재영, 다혈질인 셋째 정우, 상연의 친동생이며 컴퓨터 전문가인 막내 하연 등 네 사람은 지금까지 의뢰받은 일을 실수한 적 없는 킬러들. 하지만 경찰이 호송하던 인물을 살해하면서 그들은 조 검사에게 뒤를 밟힌다. 장진 감독, 신현준, 정재영, 신하균, 원빈 출
고양이를 부탁해 / 킬러들의 수다 /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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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예고편 보기<나비> 뮤직비디오 보기신은경의 `꿇어`라는 호령 소리가 전국 극장가를 강타한 가운데 `스타`를 내세우지는 않지만 탄탄한 연기력과 작품성을 갖춘 한국 영화들이 개봉 채비에 들어갔다.주로 상처받거나 소외받은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들 영화는 `조폭영화`와 얕은 웃음에 싫증난 관객들에게 모처럼 잔잔한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13일 개봉하는 문승욱 감독의「나비」와 11월 개봉 예정인 송일곤 감독의「꽃섬」은 스타일나 내용면에서 서로 닮았다.두 감독 모두 폴란드 우츠 국립영화학교에서 수학한 절친한 선후배 사이라는 점이 작용했을까. 상처와 치유를 다룬 주제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로드무비 형식도 그렇다.「나비」는 잊고싶은 기억만을 잊게 해준다는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 한국에온 독일 교포 안나(김호정)와 납중독에다 임신까지 한 소녀 유키(강혜정), 가족을 찾아다니는 택시운전사(장현성)가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꽃섬」은 상처를 지닌 세
작품성 내세운 한국영화 잇단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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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자로 일한 10여년 동안 지겹도록 많이 쓴 기사가 몇 가지 있다. 불공정 시비에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던 대종상 관련 기사, 영화를 자르고 상영을 막았던 검열 관련 기사, 스크린쿼터 관련 기사, ‘한국영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따위의 기사들이다. 이런 기사들이라면 지금도 눈감고 발가락으로 써도 하룻밤에 몇 꼭지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골이 났다. 이처럼 호기를 부리는 것은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다. 대개 이런 논란이 일면 예견되는 상황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검열 관련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쟁점과 공방의 논리가 되풀이되고, 뒤이어 수습되는 과정과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요령까지 생겼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몇년 사이에 재연된 ‘검열’(심의)과 관련한 일련의 소동에서 영화계의 대응이 참 무기력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동안 헌법재판소(헌재)는 ‘국가기관의 영향력이 미치는 기관에서 사전에 영화의 상영을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등급분류위원회를 접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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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를 앉고 살아가는 사람들
‘에고이얀 호텔’의 투숙객들은 마음속에 무언가 커다란 공동(空洞)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가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스피킹 파츠>의 시나리오 작가 클라라의 마음속 공동은 자기에게 장기를 이식하려다 죽은 남동생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고 <엑조티카>의 중년 남자 프란시스는 죽은 딸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살고 있으며 <달콤한 내세>에서는 눈 덮인 마을의 공동체 전체가 얼마 전 열네명의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간 스쿨버스 사고로 인한 상실감에 젖어있는 듯하다. 에고이얀의 많은 영화들은 바로 이 사람들, 누군가의 부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정서적으로 죽은 것과 거의 다름없는 사람들의 심리적 ‘치료’(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일종의 반복적 패턴을 가진 행위들, 즉 ‘의식’(ritual)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들에 집착한다. 예컨대 <스
강박관념으로 지은 자페적 우주-아톰 에고이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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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베를린 천사의 시>를 가지고 몬트리올영화제에 참석한 빔 벤더스는 그곳에서 본 한 젊은 감독이 만든 영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시상식장에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질 상금은 바로 그 젊은이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벤더스를 매료시킨 이가 바로 당시 두 번째 장편영화 <패밀리 뷰잉>을 막 선보이고 있던 스물일곱 나이의 아톰 에고이얀이었다. 에고이얀을 알아본 벤더스의 눈은 정확한 감식력을 갖고 있었던 듯싶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에고이얀은 시네필들의 신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작품들만을 만들어내며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시네아스트들의 만신전을 향해 성큼성큼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에고이얀은 주로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장벽, 성적인 일탈 행동, 관음증, 강박관념 등과 같은 인간 심리의 재료들을 가지고 아주 폐쇄적인 영화세계를 지어 올리는 시네아스트이다. 에고이얀의 그런 (특히 초기의) 영화세계는 충분히 유혹적이지만 종
강박관념으로 지은 자페적 우주-아톰 에고이얀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