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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특히 롤 플레잉 게임에서 운명이란 말은 꽤 자주 들먹거려진다. 운명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운명의 전사로 성장하고, 운명의 동료들과 함께 운명의 적과 맞서 세계를 구할 운명을 수행한다.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2>처럼 아들이나 딸이 부모의 대를 이어 또다시 운명의 전사로 세계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운명의 동료와 운명의 적이 새롭게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다.운명이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리스 비극의 많은 주인공들이 이 질문에 답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현실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게임에서만은 이 질문의 답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다.일본 롤 플레잉 게임은 흔히 단선 진행 롤 플레잉 게임이라고 불린다. 많은 경우 미리 정해진 경로가 있어서 그대로 따르며 플레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 A에 도착하면 다리가 끊어져 있다. 고쳐서 대령해야 마을 B로 갈 수 있다. 이번에는
절대적 운명,<테일즈 오브 데스티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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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이 4월25일 개봉하면서 1980년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화성연쇄살인사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86년 1차 살인사건 이후 10차 사건까지 발생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미결사건이기에 더욱더 관심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범인이 하루빨리 자수해서 벌을 받기를 바란다”고 했고 시사회에 참석한 현직 형사들은 “공소시효가 끝난다 하더라도 끝까지 수사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영화 홈페이지(www.salin.co.kr)에서도 영화관람 뒤 범인을 추리하는 글이 올라오는 한편 재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온라인 추리소설 사이트(www.mysteryhouse.co.kr)의 100대 살인사건 메뉴에서는 이 사건의 경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참여연대, ‘1·25 인터넷대란’ 손해배상 청구참여연대가 지난 1월25일 발생한 인터넷대란과 관련해 정보통신부와 KT,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했다. 소송의 원
[인터넷 뉴스] 재조명되는 화성연쇄살인사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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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난리’다. <씨네21>에 약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터넷과 영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이야깃거리들을 찾아 글을 써왔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1편이 개봉된 지 약 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미국 개봉을 코앞에 두고, 인터넷이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흥분의 포화상태는 아주 다양한 방면에서 포착되고 있다. 우선 워너브러더스사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이 영화의 예고편이 무려 450만번이나 다운로드받아져, 역대 워너브라더스사가 개봉했던 모든 영화들의 예고편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또한 Yahoo!에서 운영되고 있는 개봉예정작 정보 코너인 ‘Upcoming Movies’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2000년 이후 지금까지 가장 많은 네티즌들이 방문한 영화라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USA Today>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흥행성적이
<매트릭스2 리로디드>로 흥분하고 있는 네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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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m의 산전수전지루하다. 뭔지 모를 12개의 입방체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렇다고 색깔이 강렬한 것도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입방체가 하나씩, 둘씩 움직인다. 팸플릿에 소개된 러닝타임은 12분. 설마 12분 동안 입방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양새만 바라보라는 건 아닐 테지. 그러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린 채 영상은 성실하고 꾸준하게 비슷한 운동을 반복한다.솔직히 말하면 김재관의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 주최한 특별전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에 소개된 11편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작품에 속했다.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울림을 준 이유는….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추상적인 입방체들이 일정하게 운동하다가 여러 개로 분열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는 영상은 충격적이지 않다. 재미도, 서사구조도 없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있다. 바로 소리다.처음에 들리는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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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고택의 요리집 일승암. 그곳에서 맛과 서비스의 전통을 이어오는 젊은 안주인 오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먹듯 간단히 이 만화에 대해 말하라면 이 정도가 적당하다. 사실 그 정도로 충분히 말해줄 수 있는 만화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부족하다.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다.평면을 배반하는 입체연재만화의 에피소드 앞에 펼쳐지는 제목 페이지는 그저그런 장식일 경우도 있고, 만화가의 그림 솜씨를 뽐내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본편의 많은 내용을 함축하는 상징의 페이지가 되기도 한다. 기쿠치 쇼타의 <오센>(세주문화사 펴냄)에서는 그와는 또 다른 역할, 이 만화의 모호한 성격에 대한 안내판이 되고 있다. 두쪽으로 펼쳐진 제목의 장을 보라. 우키요에(浮世繪)에서 뽑아올린 듯한 훌륭한 평면의 문짝과 기묘하게 기울어진 병풍은 멋들어진 고풍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가운데에 어울릴 만한 인물은 역시 오카노 레이코의 <음양사>에서처럼 동양화의 선으로 빚
천하일품 요리집,기쿠치 쇼타의 <오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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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보다 못한 세상같으니
생각해보니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기간(1986년부터 91년까지)은 내가 양 갈래 땋은 머리에 포플린 스커트를 나풀거리던 중·고등학생 시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마는 언제나 짧게 커트한 머리와 건장한 체격에 <품행제로>의 중필이가 메고 다니던 운동가방을 어깨에 척 걸치고 다녀 험악한 연쇄살인범이라도 지체없이 통과시켰을 그런 소녀 시절을 보냈다. 아무튼)과 얼추 겹친다.
그때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친구들 사이에서 간간이 화제가 되고 또 나의 경우 외할아버지가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동네는 아니었지만 화성군 어디에 살고 계실 때라 ‘다시는 외갓집에 놀러가지 말아야지’(초등학교 졸업한 뒤 한번도 가지 않았지만)라는 결심도 했다. 그러나 연쇄살인사건이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 같아서였는지 특별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떨게 했던 공포의 관심사는 봉고차 인신매매범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비롯한 학생들 대부분은 일
아가씨, <살인의 추억>을 보고 무력감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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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볼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오세암>을 보면서 흘러나왔던 개인적 체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더욱이 라이브액션영화와 애니메이션영화의 차이도 있으므로), 하여튼 다른 관객의 두눈에서도 예상되는 그 눈물은 대체 왜 나온 것일까,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그러자 이 애니메이션의 처음부터 미리 주어진 비극적 설정과 그것을 넘어선 숭고한 종교적 결말의 한가운데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그 모든 것을 체현하는 존재로 서 있었다.
<오세암>은 감이와 길손이 남매가 엄마를 찾아 길을 가고 있는 도중에서 시작한다. 두 아이의 엄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 있기에 그들은 그토록 비현실적인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중에 감이의 기억이 엄마의 죽음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드러내긴 하지만, 앞을 못 보는 그녀의 기억과 달리 혹시 엄마는 그들을 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배경이 언제, 어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오늘날에도 아
버려진 아이의 신화, <오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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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가 그려낸 80년대는 죽은 여자들의 질 속처럼 컴컴했다. 범인이 사라지고 난 자리, 텅 빈 터널의 동공의 이미지는 죽은 여자들을 가둔 농수로의 텅 빈 공허와 곧바로 연결되어진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가? 일종의 구멍으로서 현실을 제약하는 터널로서, 살인의 추억의 80년대 공기는 농수로의 질척질척하고 끈끈한 기운을 타고 죽은 여자의 질 속을 헤맨다. 강간, 연쇄살인, 메뚜기가 노니는 농촌 풍경. 여자들은 죽고 남자들은 죄의식에 빠진다. 이 이형접합의 이미지들 속에서 봉준호의 80년대는 또 다른 주석을 한국 영화사에 보탤 것이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의 손, 고문을 가한 피해자의 똥을 묻히며 잔인한 웃음을 흘리던 영호의 손과 자신이 구타한 그리하여 기차에 치여 죽은 한 백치 청년의 피가 묻은 박두만의 손, <박하사탕>의 80년대와 <살인의 추억>의 80년대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유치하지만 따뜻하게 포장된 <
범작이 될 수도 없지만 걸작이 될 수도 없는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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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온다. 용광로에 온몸이 녹아 사라지는 순간에도,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고 “나는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던 그가, 돌아온다. 무려 12년 만에, 존 코너와의 약속을,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러, 그가 돌아온다. 엄밀히 말하면 <터미네이터3>에서 돌아오는 이는 ‘그’가 아니고, 그와 같은 모델(T-800)의 또 다른 터미네이터다. <터미네이터3>에서도 인류 저항군의 지도자가 될 존 코너를 암살하기 위한 기계들의 노력은 계속된다. 10년 전 T-1000의 암살 위협에서 벗어난 존 코너는 기계들의 첨단 네트워크인 스카이넷의 추적을 피해 은둔자로 살아간다. 그런 존의 존재를 감지한 기계들은 한층 발전된 형태의 로봇인 터미네트릭스(T-X)를 파견한다. T-X는 섹시하고 아름답지만, 냉혹하고 잔인하며, 뛰어난 지능과 공격력, 심지어 다른 기계 장비들을 제어하는 능력까지 갖춘 여성 기계 로봇. 인간 저항군들은 존 코너를 지켜내기 위해 인간쪽 전투 병기인 터미네이터 T-80
내가 돌아온댔지!해외신작 <터미네이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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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했던 역사 속으로“충무로가 여기 이사를 왔네 그려.” 실미도로 가는 페리호 안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100명 넘는 취재진에 제작자, 투자자, 감독, 스탭, 배우를 합쳐 300명 넘는 인원이 모였으니 이런 말이 나와도 무리가 아니다. 지난 4월30일, 충무로 시네마서비스 사무실 앞에서 출발한 관광버스 6대는 인천공항을 지나 잠진항에 도착했다. 평소 무의도행 페리호가 출발하는 항구인 이곳은 이날 하루만 실미도행 페리호를 운항했는데 배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니 강우석 감독의 ‘파워’가 새삼 느껴진다. 시네마서비스와 관련있는 영화인 가운데 이날 제작고사에 불참한 인물은 거의 없을 듯하다. 일간지, 주간지, TV 연예프로그램을 망라한 취재진 역시 강우석 감독의 새 영화를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20여분 배를 타고 실미도 세트장에 내린 취재진은 감독과 설경구, 안성기 등 배우를 보자마자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질문공세를 시작했다.♣ 이웃한 섬 무의도와 개펄로 연결돼 있지만 하루
<실미도> 제작고사 및 추모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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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불이 꺼지고, 영화의 막이 오르면, 이런저런 오프닝 크레딧이 뜨고 사라진다. 그 끄트머리에 긴 여운을 남기며 박히는 크레딧이 있으니, 바로 ‘A FIlm By…’(아무개 감독의 영화) 라는 ‘인장’이다. 그런데 최근 할리우드에는 이런 유형의 크레딧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영화가 공동 창작 예술이라는 인식이 업계 내에, 그리고 감독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일까?
<버라이어티>가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90년대까지만 해도 감독 소유 또는 주체를 뜻하는 ‘A FIlm By’의 크레딧을 쓴 감독이 70%에 달했지만, 최근에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 중에서도 이런 크레딧을 쓰는 예가 50%를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본래 이런 식의 크레딧을 쓰지 않는 감독들도 꽤 많은데, 그중에는 스티븐 소더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샘 멘데스, 조엘 코언, 고어 버번스키, 스티븐 달드리, 롭 마셜, 프랭크 다라본트, 커티스 핸슨, 크리스 놀란, 우디 앨런 등의 스타 작가감
창작의 주체는? A FIlm By‥ 크레딧을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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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한 대중의 감응지점을 포착하고, 그 빠른 변화의 길목에 이정표를 세워야만 하는 저널리즘 비평의 태생적 속성은 때로 정확한 통찰의 시간을 갖기 어려울 만큼 물리적 긴급함에 얽매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생겨나는 성급한 판단과 오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론가 시절 명쾌한 직관으로 나쁜 영화와 좋은 영화를 분류해내던 프랑수아 트뤼포조차 몇달 사이에 브레송의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또 ‘수정’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판단착오의 기준으로 쓰여진 오해와 실수의 비평들은 감응속도만큼이나 빠른 대중의 망각속도에 떠밀려 물의없이 사장되기도 한다. 혹은 후세의 의견들에 의해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오히려 부활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의 어떤 영화를 비판하기 위해 이전에는 비판의 대상이었던 영화를 도리어 비교우위의 근거로 삼는 엉뚱한 사태를 빚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의 특별기고가 스티븐 파버가 ‘수정주의 비평의 역사’라는 논점하에 미국 저널리즘의
비평가들의 마음바꾸기, - 어제는 범작, 오늘은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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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대박을 터뜨린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가 지난 4월27일 막을 내렸다. 마지막 공연에는 노짱이 관람을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혹자는 구시렁댈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소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세상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다. 연극 역시 신나고 웃음으로 넘쳐났다. 1989년 동숭아트센타 개관기념으로 첫 공연을 할 때만 해도 사회적 부조리를 신랄하게 헤집던 ‘풍자’가 지금은 ‘개그’로 희화화되어 사람들을 마구마구 그냥 웃게 만든다. 연극을 보러 간 날 명계남, 박철민, 최덕문 등 주연배우들과 조촐하게 맥주을 한잔 마셨다. 모처럼 대학로에서 흥행연극이 나와서 모두들 신나했다. 한편으론 연극판이 옛날 같지 않아서 전반적으론 매우 힘들다는 푸념도 늘어놓았다. 함께한 일행 중 연극 출신의 유명 배우에게 몹시 궁금한 게 있었다. 최민식, 조재현, 송강호, 유오성 등 연극계 출신의 스타 연기자들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의 고향은 연극인데, 스타가 되고 나서는
연극과 영화의 아름다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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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에로 코미디를 기대하시라.”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다기에 그럼 하겠다고 했죠.” “전 최민식 선배가 출연한다기에 그럼 내가 감독하겠다고 했어요.” 박찬욱 감독과 배우 최민식은 이렇게 만났다. 지난 4월29일 열린 <올드 보이> 제작발표회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마치 신혼부부가 언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상대방 몰래 서로 사랑하던 이들이 마침내 약혼발표를 하며 그들의 만남을 추억하는 듯한. 듣기에 따라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감독과 배우의 친밀감이 관객에게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찰떡궁합이 입증한 대로다. <올드 보이>는 여기에 한 사람을 더한다. 최근 캐스팅이 확정된 유지태, 그는 최민식과 대결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유지태의 마음이 <올드 보이>에 끌린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찬욱, 최민식이라는 이름이 주는 두터운 신뢰감을 따라
<올드보이>의 박찬욱,최민식,유지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