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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모임에서 여섯명의 여자들이 자기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개 그 자신이 이미 엄마이기도 한 40대 초중반의 여자들이었다. 놀라웠던 건, 그 가운데 절반이 엄마에 대해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엄마에게 자주 심한 매를 맞고 “천덕꾸러기는 잘 죽지도 않아”라는 악담을 들으면서 자란 이인데, 그는 언젠가 엄마에게 뼈아프게 복수를 하리라 별렀지만 막상 자신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힘이 생겼을 때 돌아보니, 그 기세등등하던 엄마는 어딜 가고 쪼그라든 늙은이가 있더라 한다.<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이라는 책을 보면 “서른이 넘었으면 자기 인생을 부모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쓰고 그 아래 조그만 글씨로 “이 나이를 스물다섯으로 낮춰라”고 덧붙이고 있지만, 나쁜 엄마의 히스테리에 무방비로 노출된 어린 시절을 보낸 딸에게 엄마는 평생의 상처다.그의 친구 가운데는 계모에게 그만큼 학대당하는 이가 있었는데,
계모들 좀 내버려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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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의 어느 새벽. 나는 군용열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이놈의 기차는 재미있게도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가기를 반복한다. 창문은 차단막으로 가려져 있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병력을 떨어뜨려놓으며 달린 지 10시간. 드디어 ‘내릴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기차가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심하게 덜컹거린다. 철교. 꽤 길다. 이렇게 긴 철교는 한강에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곳은 서울! 뛸 듯이 기뻤다.용산역. 노랗고 뿌연 나트륨 등 아래로 호송을 맡은 하사관의 뒤를 따라 더플백을 지고 플랫폼 위를 걷는다. 이때 내리지 못한 아이들이 차단막을 슬쩍 들추고 그 조그만 틈으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왈칵 눈물이 난다. 불쌍한 녀석들. 걔들은 거기서 더 북쪽으로 가야 한다. 서울의 북쪽이라면 전방밖에 없다. 요즘도 길에서 가축을 운반하는 트럭을 보면 그때 그 열차가 생각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끌려가는 신세야 어차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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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불편하거나 불쾌하다면, 감독이 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든 거다. 인공적인 장치를 거둔 영상 실험 선언 도그마를 주창하고, 페미니스트들의 타깃이 되곤 하는 여성의 수난사를 즐겨 다루는 라스 폰 트리에의 목표는 언제나 ‘도발’이니까. 신파 뮤지컬 <어둠 속의 댄서>에 이은 신작 <도그빌>은 더 나아가 영화에 대한 도발이며, 미국과 휴머니티에 대한 도발이다. 낯설고 신랄하고, 그리하여 불편하면서도 경이로운 작품.공황기의 미국, 로키산맥 부근의 작고 조용한 마을 도그빌에 날개 잃은 천사처럼 가련하고 신비로운 여인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찾아든다. 갱단에 쫓기는 자신을 숨겨달라는 호소를, 마을 청년 톰(폴 베타니)은 물리치지 못한다. 망설이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그레이스를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마을로 날아든 그레이스의 수배 전단은 모든 걸 바꿔 놓는다. 친절하고 다정하던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학대와 착취에 지친 그레이스
개같은 사람들,해외신작 <도그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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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없는 욕망, 마르지 않는 피
‘궁금한 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많은’ 여고생들이 남몰래 여우계단에서 소망을 빈다. 그런데 여우계단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뒤틀린 소원이 교차되면서 일으키는 죽음과 공포.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이 서울 용산구 옛 수도여고에서 막바지 촬영에 몰두하고 있다. 폐허의 느낌을 담고 있는 건물들이 은근히 영화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모든 아이들의 놀림감인 미술반 뚱보 혜주(조안)가 학교 얼짱(얼굴 짱)인 소희(박한별)를 찾아가 체육복을 빌리는 장면이다. <명동 잔혹사>에서 <몽정기>까지 150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지닌 원로급의 서정민 촬영감독이 윤재연 신예 여성감독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면서 촬영은 차분하고 순조롭게 진행된다. 감독은 어린 여배우들에게 연기를 디테일하게 지도한다. 마치 언니가 동생들 달래듯이.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는 예술고등학교에서 펼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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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아이들 오디션 볼만<선생 김봉두>는 ‘촌지 킬러 불량 티처 고군분투 오지 탈출기’라는 홍보카피 한 줄로 모든 내용이 표현될 만큼 명확한 코미디물이다. 그에 비해 <질투는 나의 힘>은 한 남자에게 두 번이나 여자친구를 빼앗긴 대학원생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본편 영화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격만 본다면, 두 영화는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최근에 출시된 <선생 김봉두>와 <질투는 나의 힘>의 디브이디는 서로 닮은 점이 의외로 많아 눈길을 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적재적소’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음성해설들. 두 디브이디 모두 감독이 늘어놓는 영화의 제작 당시 상황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음성해설을 지양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단 <선생 김봉두>의 경우, 주요 제작진 4명이 함께 참가해 완성도를 높였다. 기획에서부터 제작 전반을 관장하는 프로듀서, 제작에 맞춰 연출을 진행
선생 김봉두+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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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채 쓰러뜨려야 할 상대를 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두 주먹을 움켜쥔다. 그것은, 가장 순수하며 가장 본능에 가까운 행위… 인간이 두 다리로 섰을 때 이미 권투의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아다치 미쓰루의 <카츠>)80년대까지 권투가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던 것은, 바로 그 권투의 원초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요즘 권투의 인기는 바닥이지만, 가장 원초적인 권투의 매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권투만화를 꼽는다면, 이론(異論)없이 <내일의 죠>다. <거인의 별>의 스토리를 썼던 작가 다카모리 아사오와 치바 데쓰야 합작으로 1968년 연재가 시작된 <내일의 죠>는 1973년 죠의 죽음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당대의 청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아원 출신의 야부키 죠는 권위와 질서를 내세우는 기성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권투를 택했다. 그는 팔을 내리고 흠씬 두들겨맞다가 한방의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
그 불꽃같은 주먹의 의지여!<내일의 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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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로 월반한 열살내기 치요와 같은 반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상적 소동을 그렸다. 원작은 각각의 소제목이 달린 아즈마 기요히코 원작의 4컷만화인데,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서도 원작에서 단 네컷으로 기승전결을 완성하는 촌철살인의 맛을 잘 살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성공을 거둔 <아즈망가 대왕>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컷 사이의 기묘한 적막감에 있다. 시끄러운 교실, 운동회가 한창인 운동장 등의 장소에서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정상적인(그래서 더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풍경 너머로 느껴지는 순간의 적막함과 그 찰나 피식 솟아나는 웃음은 에피소드가 이어질수록 강한 중독성으로 보는 이를 잡아끈다. 이번에 발매되는 6장의 디스크로 이루어진 1천매 한정 패키지에는 5종 포스터 및 포스터 보관 박스, 설정자료집(56쪽), 캐릭터 스티커, 캐릭터 포장백 등의 아이템이 함께 증정되기 때문에 아즈망가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듯.あずまんが大王감독 니
쿡쿡… 이 재미난 녀석들,<아즈망가 대왕> 박스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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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없이 흘러가는 하루,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생활, 평범한 내 모습이 진저리치게 싫어지는 어느 날에는,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흥겨운 로큰롤에 맞춰 미친 듯이 헤드뱅잉을 하며 저 아우성치는 대중들의 손에 기꺼이 내 몸을 맡겨보는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알렉스 프로야스의 신작 <크레이지 록스타>는 일반적인 ‘스타 탄생’의 이야기를 다루는 음악영화와는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걷는 영화이다. 시드니 교외의 한적한 동네에서 별볼일 없어 보이는 청년들은 창고 같은 방 안에서 연습에 한창이다. 그러나 정작 이토록 열성적인 그들이 설 무대는 안타깝게도 없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매니저 브루노는 클럽을 돌아다니며 거의 우격다짐으로 밴드의 무대를 마련하려 하지만, 돈도 없고 백도 없고 심지어 실력도 제대로 검증받아본 적 없는 그들의 신세란 한없이 처량하기만 한 것. 밴드의 리드 싱어 프레디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억지로 시킨 각종 음악교육에 진저리를 칠 정도로 음악에는 도통 관심이 없
그 꿈을 기억해?<크레이지 록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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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성친구<독립영화관>은 지난주부터 KBS1TV로 옮겨 밤 12시55분에 방송된다. 7월에 만나는 독립영화는 이미 방영됐던 90년대 후반 작품 중 스탭들의 추천작이다. 이미 추억이 될 만한 조범구 감독의 <장마>(1996년/ 15분/ 16mm)는 오래된 친구인 우혁과 성연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일상적이고도 무던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옥탑에서 낮술을 마신다. 그러다 우혁은 ‘그냥’ 섹스를 제안한다. 이들은 결국 섹스를 하게 되지만, 감독은 섹스에 집중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기 전, 설렘인지 망설임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섹스 뒤에도 그들의 침묵은 계속된다. 서로 연락하라고 쓸쓸하게 헤어지지만, 이들이 다시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묘한 감정의 기복을 영화는 차분히 드러낸다. 장마철, 어딘가 찌뿌드드한 느낌의 여운을 남긴다.김종운 감독의 <地上의 방 한칸>(1999년/ 15분/ 16mm)에는
[독립 · 단편영화] <장마> <地上의 방 한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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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매주 월~목 밤 12시 15분한국 국민인 나는 세계 인구 상위 30% 안에 드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굶주림과 에이즈, 중동의 총싸움, 남아메리카의 경제 붕괴를 생각하면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정말 다행이다. 1만달러대의 1인당 국민소득까지 누리고 있으니 “이렇게 우리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아∼ 대한민국”을 노래해야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자유 대한’에는 기아는커녕 에이즈 감염률도 지극히 낮다. 게다가 경제 개발에 정치 민주화까지 이루어냈으니 더이상 바라면 나쁜 놈이다. 나의 ‘안온한 하루’가 끝나는 자정 무렵, TV를 켤 때마다 나를 이 나라에 ‘떨궈주신’ 신의 축복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매주 월∼목 밤 12시15분부터 20여분 동안 방송되는 KBS2TV <생방송 세계는 지금>(이하 <세계는 지금>)에서는 전쟁과 기아,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는 지구촌의 절규가 생생하다.<세계는 지금>의 카메라는 총성이 울
아래를 보면서 살자고?<생방송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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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은 시간, 박 선생은 혼자 교무실에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해 진주라는 여학생에 대해 말한다. 다음날 박 선생은 목매단 시체로 발견된다. 학교에선 이 사실을 비밀에 감추려 하고 허 선생이 새로 부임한다. 허 선생은 불길한 사건들 속에서 9년 전 죽은 친구의 흔적을 발견한다. <여고괴담> 시리즈 1편. 한국적 교육현실에 공포영화의 문법을 결합한 수작이다.
한국적 교육현실에 공포영화의 문법을 결합한 수작, <여고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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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list, 1977년감독 리들리 스콧출연 하비 카이틀 EBS 7월5일(토) 밤 10시
프랑스군 장교인 알몬드는 자신이 들은 소문을 무심결에 말한다. 같은 자리엔 역시 장교인 가브리엘이 있었다. 문제는 가브리엘에 관한 소문이라는 것. 가브리엘은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결투를 신청하지만 부상을 입는다. 이때부터 두 남자의 폭력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셉 콘래드의 원작소설을 <에이리언>의 리들리 스콧이 영화로 만들었다. 하비 카이틀, 앨버트 피니 등이 열연하고 있다.
[TV영화] 결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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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 Can Wait, 1978년감독 워런 비티출연 워런 비티EBS 7월6일(일) 낮 2시“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는 ‘천사’가 등장하는 고전영화로 <멋진 인생>을 떠올릴 수 있다. 주인공인 조지는 엄청난 시련 앞에서 절망해 자살을 결심한다. 그래, 난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야, 라며. 사라져주지. 그런데 난데없이 천사가 나타나 조지의 앞을 가로막는다. 천사의 제안은 간단하다. 조지가 없는 세상을 잠시 엿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불행해진 가족과 친구 모습이 보인다. 다시 힘을 얻은 조지는 삶의 행복을 맛보게 된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은 미국적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감독 개인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영화였다. <천국의 사도>는 이를테면, 뒤집힌 <멋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죽어서 재가 되어버린 주인공과 천사의 만남.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천국의 사도>는
인생 여전?그래도 멋진 인생,워런 비티 감독의 <천국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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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예요, 슬럼프. 사진도 슬프게 찍어야 해요.” 엄살을 떠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나이에 잘 나가도 너무 잘 나가는 거 아냐? 하는 시샘 반 질투 반의 눈초리를 받아왔던 장진 감독에게 최근 <화성으로 간 사나이>에 대한 대중의 외면은 어쩌면 그의 붐업 이후 처음으로 맞는 찬바람이었을 터이다. 물론 제작은 디토로 되어 있고 김정권 감독이 메가폰을 잡긴 했지만,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세팅 자체가 필름있수다(이하 수다)에서 나온 이 영화는 흥행실패뿐 아니라, 영화의 질에 대해 “저 영화 장진이 쓴 거 맞아?” 하는 의문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장진 감독과의 대화는 먼저 <화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화성…>이 수다에, 그리고 장진 감독 개인에게 준 손실과 득이 있다면. 일단 <화성…>이 수다에게 준 경제적 데미지는 큰 편이다. 군소영화사에서 자체적으로 6억원 이상 넣었다. 좋은 마음
`알맞을 때 잘 넘어졌죠`,<아는 여자> 준비중인 감독 장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