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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다. 시험이 끝나면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람을 가던 시절이었다. 일종의 위문공연이랄까. 중간고사가 끝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온 다음날, 교실은 비비안 리의 가는 허리와 클라크 게이블의 콧수염의 매력을 상기하는 아이들로 여느 때보다 부쩍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영화평론가를 꿈꾸던 나는, 아이들의 반응이 그리 마뜩찮았다. 결국 클라크 게이블의 열렬한 팬이던 한 친구와 논쟁이 벌어졌다.
별로 대단치 않은 영화에 뭐 그리 수선이냐는 나와, 그 정도면 대단하지 뭘 더 바라느냐는 친구의 입씨름은, 마침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착되었다.(아, 용감한 청춘들이여!) 영화가 뭐냐? 친구 왈, 영화는 오락이다. 나 왈, 영화는 교훈이다. 그렇다. 열다섯살에 친구와 나는 영화라는 주제를 통해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워터프론트>와 <젊은 사자들>과 <분노의 포도>를 통해
위로가 필요해,<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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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아비인 걸 모른 채 때려죽이고, 그에 따라 어미를 어미인 줄 모르고 함께 자버린 오이디푸스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자 스스로의 눈을 찔러버린다. 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처럼 목을 매 죽지 않고 눈을 찔렀을까. 사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눈을 찔러서 장님이 되는 것은 산송장이 되는 행위였던 것이다. 눈으로 본다는 것을 그만큼 중시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운 조각을 제작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지의 시대가 구현되고 있었다고나 할까.성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신의 말을 어기고 따먹은 열매는 선과 악을 알게 해준다는 선악과였다. 그런데 그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선생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화과 나무로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이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먹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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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즉 서술의 구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들은 유럽의 ‘고전 소설’을 보고 그 구조가 서술의 전형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서술은 문법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고전 소설은 ‘문법적이고 논리적’이지만 그것은 고전 소설이 태어난 ‘근대’라는 시대의 특징에 불과하다. 그러면 서술의 구조는, 다시, 어떻게 형성되는가.
간단하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극적인 삶의 구조’가 내러티브다. <미녀 삼총사2>는, 그 내러티브가, 다시 말해 지금의 미국 사람들이 겪는 극적인 삶의 구조가, <미녀 삼총사1>에서처럼, ‘TV 채널돌리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뭔 얘기냐. 첫째, 채널돌리기보다 극적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 TV 채널을 돌릴 때의 비합리성, 비논리 연쇄성, 즉 격투기를 봤다가 만화를 봤다가 오토바이 경주를 봤다가 브래지어 광고 화면을 봤다가 올드 무비를 보는, 그 채널돌리기의 비논리적이고 우발적인 연쇄성이
다시 한번 채널돌리기,<미녀 삼총사: 맥시멈 스피드>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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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히긴스 트리오 <Dear Old Stockholm>에디 히긴스 쿼텟 <My Foolish Heart>눅진하게 들러붙는 장마철 밤 공기를 위한 처방전. 1) 샤워를 하고 깨끗한 면옷으로 갈아입는다. 2) 서늘한 음악을 틀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눕는다. 이 글은 바로 그 서늘한 음악을 고르는 하나의 가이드이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쉽게 즐길 수 있는.주로 일본의 비너스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해온,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Dear Old Stockholm>과 에디 히긴스 쿼텟(리드 피아니스트인 에디 히긴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멤버가 모두 다르다)의 <My Foolish Heart>가 강앤뮤직에서 발매되었다. 피아니스트이자 트리오와 쿼텟을 리드하는 에디 히긴스는 1932년생 할아버지로, 오래 71살이 되었다. 에디 히긴스는 50∼60년대의 런던에서 전성기를 보냈는데, 당시 ‘런던 하우스’에서 하우스 트리오를 1
스탠더드가 주는 감동,에디 히긴스 트리오·에디 히긴스 쿼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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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예고되던’ 1980년대 후반, 어두운 오락실 한편에 지금까지의 슈팅 게임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다른 게임 하나가 자리잡았다. 그 게임의 이름은 <R TYPE>다. 흔하디 흔한 종스크롤 슈팅 게임이지만 게이머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낯섦을 일단 극복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미친 듯 불타오른다.<R TYPE>의 적은 남달랐다. 다른 슈팅 게임에서는 적이 미친 듯이 총알을 난사해 도망갈 길을 봉쇄하거나 아니면 화면을 반 이상 가리는 덩치로 게이머를 위압한다. 이 게임은 압도적인 무력을 내세워 정면 승부를 걸어오지 않는다. ‘다관절 보스’라고 불리던 보스는 유연함으로 게이머를 위협했다. 적의 관절은 계속 조금씩 늘어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꺾여 들어와 앞에서, 혹은 뒤에서, 때로는 옆에서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 한 방향에서, 한 가지 작전으로 공격해서는 이길 수 없다. 적의 유연함에 맞서 이쪽도 수시로 공략 방법을 바
난 타협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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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판 바지를 입은 사나이에 대한 추억‘세상에서 가장 질긴 바지는?’이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바로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의 바지’다. 화가 나면 녹색의 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 웃옷은 모두 다 갈기갈기 찢겨나가는데, 유독 바지만은 무릎 아래만 뜯어지고 멀쩡하게 남는 데서 나온 80년대 우스개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어떤 이들은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를 ‘스판 바지를 입은 남자’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비록 나 <소머즈> <원더우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두 얼굴의 사나이>가 방영 당시 인기를 누렸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가 최첨단 특수효과와 리안이라는 특출난 감독의 조합을 통해 <헐크>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이런저런 언론매체에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기사가 쏟아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그렇게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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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벌써 ‘왕언니’가 됐나요? 어휴, 진짜 그런가봐요.”유진희(36) 감독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1996년 <골목 밖에서> 이래 햇수로 8년. 이제 ‘중견’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 말 정도는 들을 수 있게 작업 활동을 해왔다.그녀는 홍익대 서양학과를 나왔다. 졸업하고 미술학원도 해보고, 한때는 걸개그림 등 민중미술 운동에도 정열을 바쳤다. 이성강 감독과 한팀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게 뜨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20대 후반 어느 날, 문득 캔버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그림은 넓은 전시장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컴퓨터는 종이도, 물감도, 그런 것들을 놓아둘 공간도 필요없더라고요. 모니터라는 공간 속에서는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그래서 모니터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을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마침 개설된 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전공 1
내 길은 내가 연다,젊은 애니를 껴안다 ⑥ - 유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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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출판사에 침을 뱉으마<나인>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여자만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사, 평론, 패션화보에 폭넓은 스타일의 만화까지를 보여주었던 그야말로 ‘잡지’였다. 젊고 새로운 시도는 빛이 났었다. 상업적 만화의 독법에서 벗어난 만화들도 대거 소개했다. 그런데 이 잡지가 너무 빨리 시장에 나왔었을까, 독자들이 점차 잡지를 외면했다. 결국 <나인>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좋은 친구를 잃는 기분. 한달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기분. 그보다 더 큰 앞으로의 희망을 차압당하는 기분이었다.하나의 잡지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낯익은 연재작들에 대한 기대가 사리지고, 완결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과 이 잡지를 통해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많은 작가들의 앞날에 대한 당혹감이 매우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체리듬을 떨어뜨린다. 그깟 잡지쯤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타박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잡지는 다양한 만화가
<영점프> 종간과 한국 만화시장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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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서 원고 제의를 받고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던 끝에 일단 우리 회사의 탄생 일화부터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지면을 스쳐간 많은 필자들이 영화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분야를 충실히 전달한 것처럼 나 역시 영화마케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이다. 내가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7월, 양전흥업이라는 영화사 기획실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몇몇 회사를 제외하고는 기획실을 둔 영화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기획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 여자는 내가 홍일점이었다. 여자여서 차별받는 것도 싫었지만 특별대우받듯이 화젯거리가 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각자 위치에서 스스로의 실력과 노력으로 정당하게 평가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영화계에서 기획일을 시작한 지 10년쯤 되던 1994년. 영화사업에 뛰어든 삼성은 홍보마케팅을 담당할 별도의 전문집단이 필요하다며 나에게 그 일
첫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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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0일 자정,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 워터스톤스 서점 앞에는 보기 드물게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일곱, 여덟살 정도의 꼬마들에서부터 10대 중반의 소년 소녀들이, 간혹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과 함께, 상기된 얼굴로 졸음도 잊은 채 늘어서 있는 이 줄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해리 포터와 불사조의 기사단>(Harry Potter and the Order of the Phoenix)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6월21일 0시를 기해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등지에서 판매를 시작한 이 책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이 지난 2000년 여름에 세운 신기록을 깨고, 세계 역사상 출판 첫날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인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6월23일 추산으로는 첫날에만 177만7천권이 영국에서 팔려나갔다. 이것은 <해리 포터> 네 번째 책이 세운 기록, 첫날
해리 포터의 다섯 번째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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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그 놈의 지성미가 없어서나는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영화를 지독히 파편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아나이스 닌 얼굴만 쳐다보다가 나왔고, <동사서독>은 사막의 결투장면 이후 영화와 무관한 잡생각을 하느라 그 뒷부분은 다 놓쳤다. <안개 속의 풍경>은 음악과 그리스의 황량한 풍경에 반해, 낯선 카페에서 멍하게 창 밖을 내다보는 기분에 젖어 있다가 나왔다. 나는 영화를 춤 보듯 본다. 춤을 보는 데 의미와 스토리가 불필요하듯이 영화도 어떤 질감을 직송해주는 영화가 좋다.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적 머리를 굴려야 하는 영화는 질색이다. <매트릭스>의 줄거리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워낙 줄거리가 복잡하고 모호하고 관념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애초에 이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갈 의사가 없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용 같은 액션장면이나 기발한 모양의 전함에
건달,<쟈니 잉글리쉬>의 무구한 `딴따라` 이미지에 매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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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죽이기>
애덤 샌들러는 이제껏 함께 공연해본 적 없는 새로운 스타들을 끌어들여, 최신작 <성질 죽이기>에서 다시 한번 샌들러 특유의 세계를 그려낸다. 여기서 그가 맡은 캐릭터는 전작들과 물론 비슷한,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사는 호구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친구(마리사 토메이)를 사람들 보는 데서 키스하지도 못할 만큼 수줍고 착취를 일삼는 직장상사에게 대들 만한 배짱도 없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겹쳐 비행기 승무원을 공격하는 일대사건이 벌어지고, 그리하여 20시간의 성질 죽이기 프로그램 수강을 명령받는다. 동료 수강생들은 라틴 퀸을 연기하는 루이즈 구즈먼, 사이코 같은 수의사 존 터투로, 아주 그럴듯한 포르노스타 한쌍 재뉴어리 존스와 크리스타 앨런이다. 그리고 의사는 악마 같은 선(禪)의 대가 잭 니콜슨으로서, 전작을 한편도 못 본 관객일지라도 그가 실은 따뜻한 마음씨를 숨기고 있는 인물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니콜슨의 치료방법은 특이하다. 샌들
혼란스런 우화, 멋들어진 비유,<성질 죽이기>와 <폰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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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포르노
제562번째 시리즈에 이르른 D.E.B.S는 자신들이 힘든 적수와 맞닥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밀요원으로 훈련된 세명의 여학생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직 요원과 맞서고, 그중 한 천사 요원이 전직 요원에게 납치되어 있는 위기상황이 발생한 것. 그런데 백척간두의 벼랑에 놓인 천사들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 나무 탁자 위에 벌렁 누운 두 여자는 서로의 유니폼을 보며 “어머 너 내 스웨터 입었잖아”라며 서로를 질투하고, 한편 천하의 악녀에게 사로잡힌 또 다른 천사는 위기의 순간, 악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열렬한 키스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다.
이게 웬 엽기냐 하는 분들,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안젤라 로빈슨의 작품 의 내용이다. 주류 영화인 <미녀 삼총사>를 비꼰 <미녀 삼총사> 레즈비언 버전인 이 영화에서 소녀들은 담배를 피우고, 서로의 스웨터를 훔쳐 입고 성적 금기를 어기면서도 즐겁게 세상을 구한다. 흑인 여성감독인 안젤라 로빈슨은
텅 빈 가짜 페미니즘으로 현혹하는 <미녀 삼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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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당국이 일본대중문화 개방확대를 위한 준비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문화관광부는 일본대중문화 후속개방과 관련해 구체적인 개방시기 및 개방범위에 대한 검토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문화예술 관련단체와 관련업계를 대상으로 다각적인 의견수렴에 나섰다고 10일 밝혔다. 문화부 문화산업정책과 관계자는 "지난달 7일 `일본대중문화 개방을 확대한다'는 한일 정상회담 공동성명 발표에 따른 후속조치로 여론을 수집하고 추가개방시 분야별 개방범위와 시기, 이에 따른 파급영향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미 문화부는 지난달 18일 `가능한 지체없이, 적극적으로 일본대중문화를 확대개방한다'는 개방의 기본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문화부는 이를 위해 먼저 지금까지 3차례에 걸친 단계적 개방이 국내 영화와 비디오, 극장용 애니메이션, 음반, 게임, 방송 등에 끼친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 영향에 대해 분야별 평가작업을 벌인다는 방침이다.이를 통해 4차 후속개방시 분야별 개방범위와 시기를 도출한다는 계획이다.또 확대
문화부, 일본대중문화 추가개방 준비 본격 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