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이 21세기에 부활한다면
인간을 중심에 두는 드니 빌뇌브의 스펙터클과 <듄>의 사막
드니 빌뇌브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친밀한 관계라는 말을 들었다. 연출자의 궤적을 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은 두 사람이다. 각각 캐나다와 영국에서 작은 영화로 시작했지만, 영화적으로 인정받으면서 할리우드로 이동해 점점 더 대작의 영역을 장식하는 감독으로 변했다. 윌리엄 와일러가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를 못 이기는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를 못 이기는 것처럼, 페데리코 펠리니가 루키노 비스콘티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못 이기는 것처럼, 스펙터클을 추구한 감독일수록 현혹의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펙터클이 죄는 아니다.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어쩌면 죄의 명목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스펙터클을 정의하려는 의도는 없다. 말하려는 것은 빌뇌브의 스펙터클이다. 나는 그의 스펙터클이 놀란의 그것이나 그들의 위대한 선배인 스탠리 큐브릭의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데이비드 린이라는 이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드라마에서 출발한 린은 중기를 지나면서 거대한 스펙터클의 창조자로 명성을 떨쳤다. 린의 스펙터클은 CG로 도배한 요즘의 스펙터클과 무엇이 다르며, 어떤 점에서 빌뇌브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왜 여자들만이 살아남는가
드니 빌뇌브가 지금까지 만든 10편의 장편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죽음’이다. 그것은 빌뇌브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하고 때론 출구를 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두 번째 작품 <소용돌이>(2000)에서 친구 사이의 대화에 등장하는 문구– 모든 인간의 행동은 죽음에 맞서는 표명이다- 는 빌뇌브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 이어진다. 여기서 표명이란 곧 결과를 의미하기에, 빌뇌브는 인물이 죽음과 관계를 맺게 된 사연을 먼저 드러낸다. 초기 영화에서 그 역할은 주로 여자의 몫이었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1998)의 여자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접하고 우선 아이를 낳기를 결심한다. <소용돌이>의 여자는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뒤 심리적 불안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한 노인을 치어 세상을 떠나게 만든다.
<폴리테크닉>(2009)에서 교내 총기 테러 사건을 겪은 여학생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을린 사랑>(2010)은 종교 내전에 휩싸인 여자가 통과했던 지독한 생사의 여정과 관련된 이야기다. 타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요즘과 달리, 이 시기의 빌뇌브는 본인이 직접 쓰거나 각색한 이야기에 의존했다. 남자감독으로서 줄곧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곤 했으나 페미니즘의 경향을 따르거나 지지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흥미로운 부분은 네 영화의 주인공이 공히 임신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임신한 여성의 미묘한 심리가 죽음과 마주한 인간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임신과 출산의 행위를 죽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으로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할리우드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타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이 몇 차례 남성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성을 죽음의 반대 위치에 놓는 태도는 신작 <듄>이 나온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다.
자연스레 빌뇌브의 영화에서 남성은 죽음의 역할을 맡는다. 육체적으로 죽는 경우는 당연하고, 실질적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역할도 모두 남성의 것이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의 남자는 코마에 빠지고, <소용돌이>는 남자 화자(話者)를 연기하는 생선이 마지막 숨결을 거두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폴리테크닉>의 남학생은 실제로 1989년에 총기 테러를 벌인 인물을 모델로 삼았으며, <그을린 사랑>의 남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족의 비극을 낳은 악당이다. 이렇게 남성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는 <프리즈너스>(2013), <에너미>(2013) 등 근작으로 옮겨오면서 더욱 짙어진다. 전쟁과 복수의 명분으로 수많은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들은 <컨택트>(2016)에서 외계를 일단 적으로 간주해 세계적인 혼란을 빚는다. 꼭 빌뇌브의 영화가 아니어도 남자와 폭력의 역사를 다룬 영화의 예는 수없이 많다, 고 말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빌뇌브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대비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죽은 남자를 딛고 마침내 살아남는 존재가 반드시 여자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괴와 폭력과 죽음에 대항해 생명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와 사막이라는 장소
대중영화의 감독으로서 빌뇌브가 초기 영화로부터 가장 발전한 부분은 명확한 영화언어다.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해하게 돕는 역할에 충실하다. 이건 스토리텔러를 넘어선 능력이다. <에너미>까지 흔적이 일부 남았던 상징적인 표현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다. 출신인 퀘벡 시네마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더이상 치중하지 않으며, 진 시버그나 마오쩌둥의 포스터를 붙여놓는 짓 따위도 하지 않는다. 반면 시각적인 표현은 뛰어난 성취를 거듭해왔다. 거대한 자연 속에 인간을 대비시키는 이미지는 초기 영화부터 발군의 표현력을 자랑했다. <폴리테크닉>의 설원, <소용돌이>의 댐, <에너미>의 현대 건축물 등이 그런 예인데, 빌뇌브가 그중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사막이다. <지구에서의 8월 32일>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임신을 위해 사막으로 가기를 제안한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에서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로 향한다. 두 인물이 헤매는 하얀 소금 사막이 장관을 연출하는데, 사방이 평지인 그곳에서 남자가 툭 던지는 대사– 여기에 사구(Dune)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는 마치 20년 후를 예견한 듯하다.
사막과 거대한 황무지에 대한 매혹은 <블레이드 러너 2049>와 <듄>으로 전개된다. 여자와 남자를 생명과 죽음의 존재로 인식해온 빌뇌브에게 사막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품은 대상이며, <듄>의 사막은 주인공 폴과 한몸을 이루며 제일 중요한 빌뇌브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구원자로서 폴의 성격은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제를 비롯한 남자들의 무리가 표면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양 보이지만, 예지력을 품은 신비스러운 여자들의 리그인 베네 게세리트가 영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세계가 <듄>이다. 베네 게세리트 출신인 여자가 딸만 잉태한다는 계율을 거부하고 낳은 남자아이가 구원자가 된다는 설정은 앞선 빌뇌브 영화의 세계를 확장한다. 전쟁과 착취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태어난 폴의 가장 큰 능력은 어머니의 그것을 승계한 것이며, 그러한 능력 아래 자란 소년의 존재는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다. 빌뇌브는 타인을 대하는 자세가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가는 환경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듄>의 사막에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이였던 로렌스가 아득한 사막에서 세운 역사를 다룬 이야기는 물론이고, 사막과 인간을 나란히 두어 시각화한 표현이 그러하다. 웅장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했던 린의 스펙터클이 21세기에 부활했다면 그게 빌뇌브의 영화다. 그의 영화에서 다시 <닥터 지바고>의 대서사가 흐르고, <라이언의 딸>의 바람이 불고, <인도로 가는 길>의 달이 빛난다. 평자들은 리들리 스콧을 거론하지만 글쎄다, 내 생각은 다르다. 빌뇌브의 스펙터클은 스콧의 그것처럼 현란한 성격은 아니지 않나. 스펙터클을 추구하되 인간을 중심에 두는 걸 잊지 않는 빌뇌브는 거센 속도를 억누르면서 정확한 이미지를 구사하는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