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에서 파주로 향하는 출근길. 표정 없는 군상들 틈에 오하나가 있었다. 체념한 얼굴들 사이에 내가 서 있다는 걸 자각하며, 줄곧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리며 회사를 다녔다는 그는 경쟁이 당연한 사회생활의 답답함을 잊기 위해 요가를 했다. 20년 넘도록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녹음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수덕에게도 피하고 싶은 감정이 쌓여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자기부정을 끌어안고 있는 그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그는 <봄날은 간다>의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처럼 소리를 채집하던 순간을 그리워한다.
다큐멘터리 <시 읽는 시간>은 오하나, 김수덕을 시작으로 게임중독에 빠진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안태형, 10년 넘게 농성 중인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언어의 한계를 체감하는 일본인 유학생 하마무를 프레임에 담았다. 이들은 모두 이수정 감독이 연구 공동체, 교회, 일터 등에서 직접적으로 관계 맺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담담히 자신들이 지나온 어제와 오늘을 털어놓는다.
영화는 가만한 호흡으로 다섯명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왜 시를 필요로 하게 됐는지, 그들이 어떻게 시를 감각하는지 전한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는 철새 무리와 대나무 숲, 노동 현장과 농성이 펼쳐지는 현장에서부터 모바일 게임 화면까지 지켜본다. 그렇게 영화는 인물이 부푼 마음으로 올려다본 풍경과 공허한 심정으로 내려다본 휴대폰 액정 사이를 탐색하며 인물들의 시간에 시가 틈입하기까지 기다린다.
러닝타임이 절반 정도 흘렀을 무렵부터 영화 속 두 여자와 세 남자에게 시가 찾아든다. 이중 임재춘, 하마무는 직접 시를 적기도 한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은 이들에게 뜬눈으로 고통을 바라본 뒤 다시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영화는 이들이 보는 시가 인쇄된 책의 지면을 그대로 스크린에 띄워 관객이 낭독자의 목소리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선택은 관객이 영화 속 인물의 시선을 그대로 좇을 수 있게 만드는 동시에 인물들이 쥐었던 책의 색감과 질감까지도 전달하는 효과를 지닌다.
오하나는 임경섭 시인의 <새들은 지하를 날지 않는다>를 낭독하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임재춘은 김남주 시인의 <자유>를 낭독하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곱씹는다. 안태형은 심보선 시인의 <오늘 나는>의 마지막 행의 의미를 두고 아내와 대화한다. 하마무는 <살아있는 쓰레기>를 쓴 뒤 시화전을 준비하고, 오하나를 만나 번역 작업을 함께한다. 그러면서 인물들은 “내 입으로 시가 살아서 나오는 것처럼, 나는 어떤 도구이고, 시가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안태형)에 젖는다. 시가 손을 뻗어 자신을 토닥이고 일으키는, 애달프고도 감미로운 시간에 잠기는 것이다. 이로써 영화는 관객에게도 넌지시 시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다섯 인물의 시적 체험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이수정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미술관 옆 동물원> <우렁각시> 등 극영화 프로듀서로 활동해오다 2011년부터 독립 다큐멘터리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지 질문하며 <깔깔깔 희망버스> <나쁜 나라> 등을 연출했고 <시 읽는 시간>에도 등장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을 조명한 <재춘언니>로 지난해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 메세나상을,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집행위원회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 읽는 시간>을 통해 “비참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고통은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해 감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문을 열고, 이 세상에 자신이 설 자리는 주어지지 않거나, 박탈된 지 오래되어서 이제 많은 것들에 무감각해진 사람의 잊었던 감각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이 영화는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다큐멘터리 부문 경쟁, 제42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 후보로 초청되었다.
CHECK POINT
침묵과 여백
<시 읽는 시간>은 조용하다. 시청각적인 자극을 최소화하되 거리를 두고 인물의 일상을 따라갈 뿐이다. 인물이 요가를 하는 동안, 철새를 바라보는 동안, 카메라는 멀리서 풍경과 피사체를 함께 담아 그들이 소란한 현실로부터 비켜선 채 취하고 싶었던 침묵과 여백의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낭독의 발견
영화를 보며 임경섭 시인의 <새들은 지하를 날지 않는다> <죄책감>, 심보선 시인의 <오늘 나는>, 김남주 시인의 <자유>, 이정하 시인의 <지금>을 비롯해 영화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하마무의 <살아있는 쓰레기>, 임재춘이 최문선과 함께 쓴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를 들을 수 있다. 책의 지면을 그대로 띄우는 연출이 마치 오디오북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재춘언니> 미리 보기
이수정 감독의 또 다른 장편다큐멘터리 <재춘언니>는 <시 읽는 시간>에 나오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을 단독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이수정 감독에 따르면 그는 정리해고 7년 이후 내성적인 성격에 변화를 겪으며 연극도 하고, 글도 쓰고,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도 부르는 활달한 사람으로 변모했다고. <시 읽는 시간>에서 그 변화의 편린을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