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크리스토퍼 옴 플러머 Arthur Christopher Orme Plummer (1929.12.13~2021.2.5)
“너 나보다 겨우 두살 많잖아. 우리 왜 이제야 만난 거야?” 2012년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의 남우조연상 수상자가 된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무대에 올라가 우선 오스카 트로피와 오랜 회포부터 풀었다. 위트 있는 첫인사로 과시한 그의 ‘전설적’ 위상은 오랜 기립 박수에 걸맞은 장중한 연설 대신 겸허한 감사 인사로 매듭지어졌다. 82살의 베테랑은 축제의 밤 이튿날 다시 현업에서 활동하는 할리우드 최고령 배우의 일원이 되어 유유히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관객은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쁨을 9년간 더 누릴 수 있었다. 감미로운 음성으로 <Edelweiss>를 읊조렸던 트랩 대령, 70년의 연기 인생 중 에미상과 토니상을 각각 두번 수상하고 마침내 오스카 남우조연상까지 거머쥔 불굴의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91년의 일기를 마치고 지난 2월 5일 영원히 잠에 들었다. 미국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53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온 아내, 오랜 친구이자 46년간 현장을 함께한 매니저가 그의 곁을 지켰다.
70년간 빼곡히 채워진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필모그래피는 적시에 당도한 기회를 낚아챈 행운의 사나이의 그것이다. 플러머의 연기 궤적은 미디어 산업의 변천사를 요약한 훌륭한 견본이자 성실하게 일해온 직업인이 꾸려낸 순탄한 보고서다.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퀘벡 근방에서 성장한 그는 1940년대에 고국에서 활동하면서 불어로도 유창한 연기를 펼쳤다. 라디오 드라마의 성행과 함께 연극 무대와 방송국을 오가며 커리어를 쌓았고, 1954년 뉴욕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한 후 곧장 런던 웨스트앤드로 진출하며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삶에 금세 적응했다.
플러머의 강직한 코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위한 것이었고, 웅장한 체격과 중후한 목소리, 음영이 짙게 드리운 조각상 같은 이목구비는 <오셀로> <맥베스>의 주역을 위해 준비된 축복이었다. 영국 왕실국립극장,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가 보내온 총애는 2004년 <리어왕>까지 계속됐다. 그는 1960년대 초까지 텔레비전 대중화와 컬러화, 케이블 채널의 확장세 속에서 TV드라마에 활발히 이름을 올렸고 평생 동안 80편에 육박하는 TV 경력을 부지런히 완성했다.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현장의 크리스토퍼 플러머. 사진제공 SHUTTERSTOCK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은막의 세계에 발을 들인 첫 작품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스테이지 스트라이크>(1958)지만 스크린 스타의 반열에 합류한 결정적 계기는 로버트 와일러 감독의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이다. 당시 숀 코너리를 제치고 이십세기폭스사의 야심작에 투입된 플러머는 훗날 영화 팬들이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드리운 나치의 그림자를 잊고 멜로드라마적 낭만으로 기억하도록 만든 주범이 됐다. 이후 플러머는 <태양 제국의 멸망>(1969), <나폴레옹>(1970), <왕이 될 남자>(1975) 등 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며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견될 정도였지만, (젊은 시절에 꽤나 귀족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던 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회자하는 세간의 반응에 자주 탐탁찮아 했다.
1976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수년간 소화했던 뛰어난 역할들에도 불구하고 ‘사카린’ 같은 역할로 알려지게 되어 유감이다”라고 직설을 던질 정도로 예술성의 평가에는 냉정했으나, 줄리 앤드루스와는 줄곧 신사다운 우정을 유지했다. 2010년 <사운드 오브 뮤직> 45주년 행사에 참석해 다정하게 추억담을 나누는 플러머의 모습에선 한결 느긋함도 느껴진다. 부모의 이혼 후 “관심을 받기 위해 촌극과 마임에 몰두”했고, 형제도 없이 홀로 보내는 캐나다의 긴 겨울밤을 “큰 소리로 책을 읽으며”(<타임>) 지샜던 캐나다 소년은 그렇게 미국인들의 캡틴, 영국인들의 햄릿이 되어 스타의 삶을 살았다.
1990년대의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스타트렉6: 미지의 세계>(1991), <12 몽키즈>(1995)에서 장르영화에 대한 전위적인 안목도 드러낸다. 대기업 비리를 고발한 기자 마이크 월리스를 연기한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1999)로 주목받았고, 러셀 크로의 상대역으로 정신과 의사를 연기한 <뷰티풀 마인드>(2001)는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할리우드는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품은 비옥한 세월의 주름을 펼쳐 역사와 판타지의 무대로 삼았다. 그는 <알렉산더>(2004)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내셔널 트레져>(2004)에서 존 애덤스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편지>(2009)에서 톨스토이로 변신했고,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에선 테리 길리엄 감독과 재회해 영혼 세계를 빚었다. 대중의 배우가 되는 일에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다수의 아동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 연기에도 부지런히 임했는데, 그중 픽사의 <업>(2009)에서 연기한 탐험가 찰스 F. 먼츠는 빌런 캐릭터가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음을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전성기는 80대에 또 한번 예고 없이 찾아왔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으로 생애 처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비기너스>로 다시 한번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결국 트로피를 차지했다. <비기너스>에서 플러머가 연기한 캐릭터 할은 45년간의 결혼 생활 후 시한부 판정을 받고 커밍아웃을 선언한 남자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독특한 서정과 조우하고 퀴어영화의 시대에 호흡하는 그의 행보는 동시대 관객에게 크리스토퍼 플러머라는 스펙트럼에서 아직 보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을 거라는 이상한 조바심도 안겼다. 이윽고 그는 성추행 사실이 드러나 하차한 케빈 스페이시를 대신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2017)에 합류하면서 전설적인 무용담도 만들었다. 개봉 두달 전에 프로덕션에 투입된 플러머가 보여준 것은 엄청난 대사 암기력과 현장 장악력만이 아니라, 대체 캐스팅에 아랑곳하지 않는 대배우의 품격이었다. 트럼프 시대에 반응한 할리우드의 새로운 클래식 <나이브스 아웃>(2019)에서는 살인 미스터리의 중심축이 되어 미국 사회의 축소판을 흔들고 떠났다.
119개의 영화, 71개의 텔레비전 시리즈, 17개의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의 일가를 이룬 배우가 영원한 탐구의 대상으로 남으리라는 점에서, 가문의 수장이자 대문호인 할란 트롬비 캐릭터는 플러머를 대신해 절묘한 고별사를 남긴 셈이 되었다. 2015년 미국 토크쇼 <코난>에 출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길고 꾸준한 자신의 이력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난 절대 은퇴하는 법이 없을 거예요. 은퇴를 바라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조금 유감스러워요. 그건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스스로가 자부한 대로 플러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과 자신감, 커리어의 부침을 허락하지 않는 프로페셔널함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90대가 된 타계 직전까지 2021년 개봉예정인 애니메이션 <황금 가면의 영웅들>과 <울트라덕>의 목소리 녹음을 마쳤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그리워하는 세대와 <나이브스 아웃>을 즐겨본 세대가 모두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시간보다 몇 곱절이나 길게, 배우는 존재한다. 세월은 그의 영화 앞에서 언제까지나 기세를 잠재우고 유순한 관객이 되어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