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일부터 4월1일까지 총 21개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현 상황 속에서 지브리는 다시금 관객들과 재회해 환호를 받고 있다. 작화, 메시지 등 작품 내적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많지만, 3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지브리 스튜디오에는 여러 흥미로운 트리비아들이 있다. 지브리의 넷플릭스 상륙과 함께, 지브리 스튜디오에 대한 아홉 가지 트리비아를 모아봤다.
잘못 발음된 이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발음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GHIBLI’는 ‘사막에 부는 열풍’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던 이탈리아의 군용 정찰기 ‘카프로니 카 309’의 별칭이다.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 마니아였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비행기의 존재로 처음 지브리라는 이름을 접하고, 후에 만화 업계에 새로운 열풍을 일으키겠다는 다짐으로 스튜디오명으로 지브리로 택했다. 그러나 사실 GHIBLI의 원어 발음은 ‘기브리’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잘못된 발음임을 인정했으나, 이를 정정하지 않고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그의 뜻에 맞춰 해외에서도 그대로 발음되며, 지브리는 스튜디오만의 고유 명사처럼 굳어졌다.
첫 공식 작품은 <천공의 성 라퓨타>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사실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연출을, 그와 함께 지브리를 공동 설립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았지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전신인 ‘톱 크래프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팀은 해산했지만 1년 후 <천공의 성 라퓨타>를 만들기 위해 다시 재결합하고, 출판사 도쿠마 쇼텐의 투자를 받아 팀이 톱 크래프트 스튜디오를 인수하며 명칭을 지브리 스튜디오로 변경했다. 이런 과정 끝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공식적인 첫 작품은 <천공의 성 라퓨타>가 됐다.
애니메이터 정규직 시스템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터들은 불투명한 작업 환경에 처해있었다. 차기작 제작 여부가 불확실했던 대부분의 스튜디오들은 애니메이터들을 수당제로 채용했다. 그들은 한 작품이 마무리되면 해산됐으며, 새 작품이 제작되면 그때그때 고용되는 시스템이었다. 이 체계를 타파하고, 애니메이터 정규직 제도를 정착한 것이 지브리 스튜디오다. <마녀 배달부 키키>(1989)까지만 해도 지브리 스튜디오도 비정규직으로 애니메이터들을 채용했다. 그러나 <마녀 배달부 키키>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안정적인 제작 환경 조성을 위해 인재 육성을 위한 연수생 프로그램, 이를 거친 이들의 정규직 채용 과정을 도입했다. 덕분에 콘티팀, 작화팀, 채색팀 등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가 가능해졌다. 2014년 <추억의 마니>를 마지막으로 지브리의 제작팀은 결국 해체됐지만, 이러한 지브리의 시도는 만화 업계의 선례로 남아있다.
다양한 원작
(왼쪽부터) 가도노 에이코의 소설 <마녀 배달부 키키 특별편 - 키키와 고리코 마을 사림들>, 다이애나 윈 존스의 소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감독이 처음부터 직접 스토리를 구상한 작품들도 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여러 종류의 원작이 있다. <반딧불이의 묘>,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은 일본 소설을, <추억은 방울방울>, <귀를 기울이면> 등은 일본 만화를, <하울의 움직이는 성>,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등은 해외 소설이 원작이다. 또한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동화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하늘 위의 성 ‘라퓨타’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했으며 <가구야공주 이야기>는 일본의 유명 설화를 바탕으로 했다.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와 세부 스토리라인은 감독에 따라 달라졌지만 지브리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은 원작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티브가 된 실제 공간들
기본 설정 외에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지는 실존하는 공간들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해도 온천은 일본의 도고 온천이 모티브며, 온천을 둘러싼 기찻길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타호 호수가 바탕이 됐다. 이외에도 <모노노케 히메>는 일본의 야쿠시마 숲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프랑스 콜마르 마을을, <마녀 배달부 키키>는 스웨덴 고틀랜드 섬을, <붉은 돼지>는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이 배경지다.
캐릭터의 기원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러 독특한 캐릭터들도 모티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벼랑 위의 포뇨>의 포뇨는 인어공주를 아이들의 시선에서 해석한 캐릭터며,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는 도깨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검댕이는 숯이 기원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반투명한 숲의 요정 코다마는 메아리의 일본어인 ‘코다마’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하나가 움직이면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특성도 같은 소리가 울려펴지는 메아리의 특성에서 가져왔다. 또한 늑대의 외관을 가진 <모노노케 히메>의 모로 일가가 들개로 설정된 이유는 작품의 모티브가 ‘들개의 후손’이라는 이아누족의 설화기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외로움이 탐욕으로 변질되는 가오나시는 ‘인간 본성’이라는 메타포가 담겨있기도 하다. 이처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의 외관, 성격, 상징 등은 각양각색의 기원에서 비롯됐다.
비전문 성우 기용
지브리 스튜디오는 주요 배역에 꼭 전문 성우를 기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지도, 마케팅을 위해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도 아니다. 목소리 연기에 있어서 지브리의 목표는 ‘리얼리티’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전문 성우, 배우, 일반인까지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부합한다고 생각되면 더빙을 일임한다. 그 계기가 된 작품은 <이웃집 토토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아버지 타츠오 역이 다소 무책임한 면모로 그려지기를 바랐지만, 대부분의 전문 성우들은 너무 전형적인 아버지의 자상함을 연기했다. 이후 미야자키 감독은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카피라이터 이토이 시게사토가 역할에 부합한다고 생각해 타츠오 역을 맡겼다. <바람이 분다>에서는 주인공 지로 역으로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를 기용했다. 이외에도 배우, 가수, 작곡가 등 여러 직군의 인물들이 지브리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실사영화에 비유하자면 지브리는 베테랑 배우의 전문성보다, 비전문 배우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셈이다.
하비 웨인스타인의 <모노노케 히메> 가위질
영화계에서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성추행, 성폭행 사건을 일으키며 미투 운동의 촉발제가 됐던 할리우드의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 2017년 봉준호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를 통해 하비 웨인스타인이 <모노노케 히메>에 편집 압력을 가했다는 비화를 전했다. 와인스타인의 <설국열차> 편집 압박에 관해 말하던 봉준호 감독은 “웨인스타인의 반대가 있었지만 <설국열차> 감독판은 테스트 시사에서 좋은 평을 받아 미국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웨인스타인의 가위손에서 살아남은 두 명의 감독 중 하나라는 말도 들었다. 다른 한 명은 웨인스타인이 설립한 <미라맥스>를 통해 미국 배급을 진행했던 <모노노케 히메>의 미야자키 하야오다. 웨인스타인이 러닝타임을 줄일 것을 요구하자 하야오 감독이 선물을 보냈는데 열어보니 일본도와 ‘노 컷(NO CUT)’이라는 쪽지가 있었다고 한다”고 말하며 <모노노케 히메> 미국 배급에 얽힌 비하인드를 들려줬다.
픽사와의 우정
2D와 3D를 대표하는 두 애니메이션 명가의 바람직한 교류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설립 초창기부터 픽사 스튜디오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두 스튜디오의 인연은 1987년 픽사의 수장이었던 존 라세터가 일본에 방문하면서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직접 만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이후 두 사람은 유대를 형성했으며 하야오 감독도 픽사 스튜디오에 직접 방문했으며 지브리 애니메이션 영어 더빙판 캐스팅을 존 라세터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작품을 통해서도 서로에 대한 경의를 표했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움직이는 가로등이 고개를 숙여 센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픽사의 상징인 ‘움직이는 스탠드’를 오마주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처럼 픽사 스튜디오 역시 <토이스토리 3>에서 우디와 함께하는 새로운 장난감 친구들 중 하나로 토토로 인형을 등장시키며 두 스튜디오의 친분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