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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하늘에 묻는다> 허진호 감독 - 두 배우가 현장에서 속닥속닥… 믿고 맡기니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0-03-12

천하를 호령하는 왕과 평생 궁궐에 갇힌 채 백성을 섬겨야 하는 사대부의 볼모는 가끔 이음동의어가 된다. 세종(한석규)이 유독 곡진히 아꼈던 장영실(최민식)이 관노 출신이면서 천재 과학자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영광과 고난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시대의 한가운데에 선 두 남자. 이들이 함께 조선의 시계와 천문대를 발명하는 이야기인 <천문>은 그래서 필연과 운명의 드라마다. 두 사람의 크나큰 신분격차, 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조정의 끊임없는 방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함께하려는 절절한 이끌림이 멜로드라마의 고전적 구도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유능한 신하를 알아보는 감식안이 탁월했던 세종의 곁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천문>을 보고나면 그중에서도 유독 장영실과 특별했으리라는 낭만을 품지 않기가 어렵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호우시절>과 같은 사랑 이야기의 장인이자 전작 <덕혜옹주>에서 시대의 질곡을 이미 유려하게 담아낸 바 있는 허진호 감독을 만나, 우리가 익히 아는 두 배우의 새로운 케미스트리를 발견해낸 과정을 물었다.

(<천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에 끌린 이유는. 세종이 영화, 드라마에서 이미 여러 번 재현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선택할 만한 매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왕과 관노라는 거대한 신분격차를 지닌 두 사람이 함께 한 나라의 표준시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왕의 내밀한 장소인 강녕전 안에서도 분명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더라. 안여 사고 이후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실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세종은 유능한 신하라면 잘못을 해도 용서하고 다시 기용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장영실만 어떻게 그렇게 내쳤을까, 거기엔 분명 어떤 사연이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장영실은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분명 세종의 한글 창제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상상력을 가지고 영화를 다듬었다.

-<천문>의 군신 관계를 보고 있자니 모든 관계는 깊어지면 사랑과 비슷한 형태를 띤다는 생각이 들더라. 둘의 관계는 명명하기 나름이고 관객마다 서로 다른 상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세종에겐 자신의 꿈과 상상을 실현해주는 사람이 장영실이고, 장영실의 입장에선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세종이다. 한석규 배우가 비록 신분의 차이는 크지만 장영실을 가까운 벗으로서 표현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근정전 앞에서 두 사람이 별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한석규 배우의 의견에 따라 많이 수정된 경우다. 원래는 궁궐 안을 걸으면서 대화하는 장면이었고, 일부러 단풍이 예쁜 로케이션을 점찍어뒀는데 한석규 배우가 처음엔 장영실과 나란히 앉고 싶다고 하더니 나중엔 같이 누워보면 어떨까 하고 강력하게 제안했다. 결국은 사방이 탁 트인 근정전 앞으로 공간 설정을 바꾸게 됐다.

-함께 별을 보고 애틋해하는 장면에선 로맨틱한 기운마저 느껴졌는데.

=그런 의도는 없었다. 아마도 기존에 많았던 군신 관계의 형태보다 좀더 가깝고 편안한 느낌으로 묘사되어서 그렇게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또 세종은 장영실을 벗으로 삼으려 했지만, 장영실의 입장에선 외려 자신을 낮추는 세종의 태도에 더 감복하고 충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차이에서 오는 약간의 긴장감이랄까. 최민식과 한석규, 두 배우가 실제 공유하고 있는 긴 세월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느낌도 중요했으리라 본다. 대학 때부터 한 학년 차이 선후배로 가깝게 연을 맺어온 두분인데, 한석규 배우는 여전히 최민식 배우에게 깍듯하다. 꼭 형님이라 부르고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하면서 친한 사이인데도 쉽게 말 놓는 법이 없다. 최민식 배우는 큰형처럼 한석규 배우를 잘 챙긴다.

-두 배우가 합류함으로써 새롭게 해석된 지점도 많았나.

=원래 시나리오를 가지고 배우들과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타입은 아닌데, 이번 영화 하면서는 셋이서 대화를 많이 했다. 강녕전 내부에서 장영실이 세종에게 별을 보여주는 장면은 과학 기기를 제작하는 것 외에 일상에서 장영실의 천재성을 부각시킬 방법을 함께 고민하면서 나온 결과물이다. 또 후반부에 장영실이 의금부를 나와 세종과 독대하는 장면에선 두 배우가 현장에서 속닥속닥하며 “감독님은 잠시 나가 계시라, 저희가 한 번 보여드리겠다”고 하기도 했다. (웃음) 이전에 미리 전체 흐름과 대사를 맞춰보긴 했지만, 현장에서 배우들끼리 ‘나는 이렇게 할 테니 너는 이렇게 하고’라는 식으로 막역하게 합을 맞추는 광경은 쉽게 보기 힘들다. 여러모로 이번 영화는 두 배우의 친분이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한 경우다.

-이번 영화의 별빛은 <봄날은 간다>의 대나무 소리쯤 되는 것 같다. 깊은 신뢰나 유대감 같은 두 사람의 감정이 별, 하늘, 시간과 같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들과 함께 묘사된다.

=시간의 기준을 세우는 작업을 위해 그 당시엔 하늘을 보면서 연구할 수 밖에 없었다. 별을 통해 밤에 시간을 잴 수 있었고, 절기도 별과 땅의 변화를 가지고 계산했다. 그리고 왠지 실제 역사에서도 두 사람이 같이 하늘과 별을 많이 올려다보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웃음)

-시간과 글자를 만듦으로써 영원함을 추구하고 싶었다는 세종의 대사도 나온다. 반면 안여 사건 전후로 이야기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오가면서 세종과 장영실을 비롯한 인간의 육신은 시간에 따라 덧없이 쇠락하는 감각이 강조된다.

=한석규 배우가 이전에도 세종을 연기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방영 당시 나는 상하이에서 영화를 찍느라 작품을 챙겨보지 못했다. 그러다 <천문>을 준비하면서 배역을 열어놓고 한석규 배우와 많은 대화를 했는데, 그가 먼저 “이번엔 다른 세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도 병들고 나이든 말년의 세종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세종이 백내장을 앓으며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영감을 얻었다. 처음엔 부분적으로 세종의 눈에 충혈된 느낌을 주려다가 아예 피가 고여 있는 컨셉으로 수정했다. 분장용 렌즈가 일반 콘택트렌즈보다 크기가 커서 배우도 아마 불편했을 거다.

-장영실을 연기한 최민식 배우가 최근에 이렇게 소년 같은 얼굴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맞다. 현장에서부터 스탭들이 최민식 배우를 보며 많이들 즐거워했다. 사극만 놓고 보더라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있고, 그 밖에 배우 최민식이 돋보인 작품들이 너무나 많지 않나. 좋은 작품들에서 이미 그 매력이 충분히 발현된 배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색다르게 보여줄 순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보기엔 귀여운 면이 좀 있으셔서 천재지만 소년 같은 모습을 주려고 했다. 물론 겉모습이 소년이라는 말이 아니라… (웃음) 일부러 슬랩스틱에 가깝게 넘어진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젊은 영실을 다룰 때에 활기를 줬다. 세종과 독대 후 문무대신 이천(김홍파)이 뒷문을 열어주면서 장영실에게 도망치라고 하는 장면에서 최민식 배우가 ‘우리 전하’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도 울컥했다. 우리라는 말에서 장영실이 세종을 어떤 마음으로 섬기는지가 무척 절절하게 드러나더라. 그 장면이 최민식 배우의 첫 촬영이었다.

-대체로 매 신의 길이가 여유롭게 처리되면서 인물의 감정이나 행동의 뉘앙스가 세심하게 포착된다. <천문> 정도 규모의 상업영화, 기획영화에 예상하는 것보다 여운이 살아난 느낌이라 허진호 감독답다는 생각도 든다. 장면의 리듬은 어떻게 다듬었나.

=일단 촬영 단계부터 생각보다 신들이 길게 찍혔다. 배우가 그 순간 자기만의 호흡을 가지고 대사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편집에서도 잘라내기가 싫었다. 설령 느리거나 답답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작품이 잃지 말아야 할 호흡이 선명히 읽히더라. 그걸 믿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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