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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 포르투, 그곳에 다녀오다
2001-03-22

숏컷 - 김지운 칼럼

파리의 겨울날씨는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처럼 쨍하고 추운 게 아니고 한기가 으슬으슬 뼛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에서

하는 판타스 포르투 영화제와 프랑스 노르망디지역의 도빌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나는 구름이 낮게 드리운 파리의 드골 공항에 내렸다.

파리에서 맞는 겨울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며칠 못 버티고 바로 포르투갈로 도망갔다, 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국제영화제인 판타스 포르투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로 포트와인으로 유명한 포르투에서 열린다. 일년 내내 온화한 날씨로

유명한 이곳도 우기가 가까워서인지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가위>의 안병기 감독, <자귀모>의 이광훈 감독,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 <킬리만자로>의 오승욱 감독과 같이 참가한 이 영화제에서 건진 최고의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카메론 크로의 <올모스트 페이머스>였다.

한 감독이 전작과 비교해 이렇게 놀라운 비약을 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영화였다. 다른 4분의 감독들이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을

못 보았다며 어떤 영화냐고 묻기에 그런 거 묻지 말고, 이 영화는 보는 게 아니고 경험해봐야 한다고 하면서 등을 떠밀 듯이 극장 안으로

밀어넣었다. 끝나고나서 가장 고무적인 표정을 짓고 나온 사람은 오승욱 감독이었다. “음… 대단하네요.” 이정향 감독은 주삿바늘 나오는 영화는

질색인데 이렇게 주삿바늘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처음이라며 온갖 원망을 늘어놓는다.

그곳에서 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자기의 보스라고 소개한 작고 활달한 성격의 타루라는 핀란드 여성 프로그래머와 식사를 하게 됐다. <조용한

가족>을 안다고 하면서 상당한 친근감을 표시하며 말을 걸기에 엉망진창 영어실력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꽤

진땀나는 저녁식사였다. 그뒤로 극장주변에서 타루가 보이면 얼굴을 슬쩍 돌린 채 속으로 제발 그냥 지나가라 하고 주문을 한다. 그러면 영락없이

내 앞에 와서 활짝 웃는 얼굴로 “하이” 하며 서 있다. 그러다 내가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내곤 금붕어처럼 입만 허공에 벙긋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선다. 오… 타루, 내가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능숙해지면 그때 많은 것을 나누자구…. 하지만 여기선 영어를 잘 못해도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다. 길거리 잡화상에선 영어로 물어보면 자기 나라 말로 대답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모르니까 더 잘

통했다(이렇게 무식한 자기 정당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이거 사람 먹는 거야, 그래서 저쪽에서 고갤 끄덕거리면 이거 주세요. 하면 된다. 만사형통이다. 그러니까 내 얘긴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고 그런 것은 보편적이니까 다 통하고 중요한 건 언어 이전에 문화적으로 그 나라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영어엔 능통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조악한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판타스 포르투는 진행이 조직적이거나 일사불란하거나 치밀하거나 한 영화제는

아닌 것 같다. 결국 <반칙왕>은 외국 운송회사의 실수로(회사이름을 밝힐까 하다가 그만둔다) 프린트가 도착하지 않아 스크리닝도 못했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그런데… 내가 여기 왜 왔지?” 했지만 극장 앞에 젊은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줄을 서고 불이 꺼지면 휘파람을

불며 스탭과 게스트의 이름이 뜰 때 아낌없는 박수를 치는, 영화에 대한 사랑과 경외와 축제가 있는 한 판타스 포르투는 영원할 것이며 나

또한 이 영화제를 영원히 사랑할 것 같다.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