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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이원태 감독의 <브레드레스>
이원태(영화감독) 2019-06-11

숨가쁜 청춘을 위해, 브레드레스!

감독 짐 맥브라이드 / 출연 리처드 기어, 발레리 카프리스키 / 제작연도 1983년

서른해쯤 전 초겨울. 고3이었던 나는 대학입학시험을 쳐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리 재수를 결심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자전거 사고로 몸을 다쳐 수술과 입원을 하고 학교와 병원을 오가며 고등학교 시절을 겨우 마무리 중이었다. 실패는 어떤 일의 결과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그때 나의 실패는 곧 닥쳐올 예정된 실패여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쉽게 격해지고 쉽게 우울해지는 날들이었다. 나는 막바지 시험 공부에 열중해 있던 친구들에게서 떨어져나와 자주 혼자 서성댔다. 혼자 쏘다니거나 혼자 영화를 보러다녔다. 그날 밤도 야간자습 시간의 교실을 빠져나와 시내 뒷골목의 낡은 극장을 찾았다. 객석이 겨우 50석 정도 됐던 그곳은 삼개봉, 사개봉도 더 된 낡은 영화를 거는 싸구려 소극장이었는데, 이름은 번듯하게도 명보극장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날 명보극장의 낡은 간판에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애절한 사랑’이란 문구와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리처드 기어가 미모의 여배우를 안고 키스를 막 하려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숨막히는’이란 뜻의 <브레드레스>란 제목도 심상치 않았다. 이끌리듯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 겨울밤 극장은 텅 비어 있었고, 아직은 청소년이었던 나를 위해 낡은 영사기가 힘겹게 돌며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틀고 있었다. 희망도 계획도 규칙도 없이 오늘만 사는 삼류건달 제시(리처드 기어)와 장밋빛 인생을 꿈꾸는 대학생 모니카(발레리 카프리스키)의 사랑은 너무 멀어 가슴이 아팠고, 연인의 간극은 내 안의 간극인 것 같아 절실했으며,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는 제시의 인생은 더 갈 곳이 없어 숨이 막혔다. 둘의 짧은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제시는 제리 리 루이스의 노래 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며 목숨을 던져버린다.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희극적으로 바꿔버린 영화는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인 인생의 아이러니를 닮은 것 같아 먹먹했다. 어린 마음에 뭐 하나 뜻대로 되지도 않는 그런 모호한 것이 인생인가 싶어 억울했고 비겁하지 않게 생을 던져버린 제시가 부러웠다. 나는 아직도 제시와 모니카의 수영장 러브신만큼 빛나는 러브신을 보지 못했다. 그날 극장을 나와 겨울바람을 맞으며 오래 걸었다. 괜한 감성을 쌓아놓고 불화하던 나는 그 영화 안에서 많은 것을 씻어낼 수 있었다. 이후 <브레드레스>가 프랑스영화 <네 멋대로 해라>(1959)의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나의 관심은 고다르, 트뤼포, 나아가 프랑스영화로까지 확장됐다. 연출이 업이 된 뒤에도 그때의 따뜻했던 위로를 때때로 떠올리며 작품을 만들었으니 우연히 본 영화 하나가 꽤 오래 많은 것을 준 셈이다.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지만, 어떤 시대든 청춘은 더 힘들다.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감에 비해 정열은 넘치고 현실은 녹록지 않으니 그 부조화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힘든 그들을 향해 삶의 고난을 위로하고 희망을 권유하고 성장을 종용하는 아포리즘 또한 언제나 넘쳐난다. 그러나 삶에 정답이 없듯이 이런 유의 인생론도 대개는 실제적 위안이나 구체적 치유가 되지 못하고 겉돌고 만다. 나는 차라리 그들에게 내가 사랑했던 이 청춘영화를 권한다.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카타르시스가 필요한 숨가쁜 청춘을 위해, 숨막히는 청춘영화 <브레드레스>를.

이원태 영화감독. 누아르를 좋아해 최근 <악인전>(2019)을 만들었고 역사를 좋아해 <대장 김창수>(2017)를 만들었다. 누아르와 역사가 포개진 영화를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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