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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아카데미①] 형식 면에서 큰 변화를 겪은 아카데미, 과연 내실은?
장영엽 2019-02-27

세상이 바뀌자 시상식도 바뀌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롭다.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관전평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시상식의 진행 방식을 두고 시작부터 수많은 잡음을 낸 올해의 아카데미는 후보작 선정에서 전례 없는 파격을 선보이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분명한 건 영미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시상식인 아카데미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는 시청률과 다변화된 플랫폼을 넘나들며 콘텐츠를 즐기는 현대 관객의 성향, 영화적 다양성에 대한 요구는 아카데미에 여러 측면에서 경각심을 심어준 듯하다. 하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현지시각 2월 24일 밤,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상연될 이 극본 없는 드라마가 끝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온전하게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둘러싼 화제와 논란의 키워드를 정리해보았다.

1. 올해 작품상 후보 라인업은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흥미롭다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 넷플릭스가 투자한 영화(<로마>)와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슈퍼히어로영화(<블랙팬서>), 퀴어가 주인공인 음악영화(<보헤미안 랩소디>)와 기이하고 독창적인 사극(<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상 부문은 아카데미답지 않은 후보작으로 가득하다. 선정된 것 자체가 이변인 영화가 많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수상하든 아카데미 역사에 최초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작품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넷플릭스 영화다. 멕시코 감독인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65mm 필름 카메라를 들고 모국어로 제작한 이 작품은 다양한 측면에서 가장 파격적인 후보작이라 할 만하다. 비영어권 영화인 데다 무명의 그 나라 배우들이 출연하고, 흑백으로 촬영했기 때문. 예년 같으면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을 가능성이 가장 큰 <로마>가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더불어 올해 아카데미의 최다 부문(10개) 후보로 지명되고 작품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카데미의 외연이 보다 확장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로마>와 더불어 큰 화제가 되고 있는 후보작은 디즈니의 블록버스터 <블랙 팬서>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작품상 후보에 지명된 슈퍼히어로영화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작품상 후보군에 포함된 작품이 대부분 블록버스터가 아닌 중·저 규모 예산을 들인 아트하우스 영화였던 점을 고려했을 때, 북미 흥행수익 3위를 기록한 <블랙팬서>의 작품상 후보 진입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아카데미는 <블랙팬서>를 비롯해 <스타 이즈 본> <보헤미안 랩소디> 등 북미 흥행수익 2억달러 이상을 기록한 히트작을 작품상 후보에 3편이나 포함했다. 이러한 아카데미의 선택에 흥행적 성취와 예술적 성취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하는 평론가도 적지 않지만, 그간 아카데미가 간과해온 블록버스터의 예술적 성취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시선도 상당히 많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오른쪽).

2. 30년 만에 사회자 없이 시상식을 진행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사회자가 없다. 이건 무려 30년 만의 변화다. 2019년 시상식의 사회자로 낙점됐던 배우이자 코미디언, 케빈 하트가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다음, 유력한 후보자가 모두 고사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건 케빈 하트가 10여년 전 SNS에 올린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었다. 그는 이 문제가 재점화됐는데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아 논란을 키웠고, 결국 “재능 있고 멋진 예술가들이 축하받아야 할 밤에 분란을 일으키길 원치 않는다”며 사회자 자리를 내놓았다. 그 뒤 아카데미는 마땅한 사회자를 찾지 못했다. 영미권 언론은 그 이유를 시상식 사회자라는 임무의 특성에서 찾는다. 돌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위트와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해야 하지만, 아주 작은 말실수도 금방 눈에 띄는 자리이기에 득보단 실이 많다고 본 것이다. 미국 영화 전문지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기획하는 프로듀서들은 시상자 역할을 할 셀러브리티 13명의 도움으로 쇼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피 골드버그, 제니퍼 로페즈, 대니얼 크레이그, 브리 라슨, 샤를리즈 테론, 아콰피나, 콘스탄스 우, 티나 페이, 에이미 풀러, 크리스 에반스, 마야 루돌프 등이 그들이다. 다만 과거 사례를 되짚어보면 사회자 없는 시상식의 향방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1989년, 사회자 없이 진행한 아카데미 시상식은 역사상 최악의 아카데미로 자주 거론된다. 막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은 건 물론이고 수상자에 관한 코멘트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 당시 풍경이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유튜브에서 1989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오프닝 장면을 찾아보시라. 백설공주가 등장해 구연동화 스타일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오프닝 장면은 5분도 지켜보기 힘들다.

<블랙팬서>

3. 모든 부문의 시상을 편집 없이 방송할 예정이다

사회자 없는 시상식과 더불어 크게 화제가 된 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사려 깊지 못한 행사 진행 계획안이었다. AMPAS는 올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24개 부문 중 촬영, 편집, 분장, 단편에 해당하는 4개 부문 시상을 라이브로 방송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문의 시상이 진행될 때 중간 광고를 방송하고, 수상소감은 이후에 편집해 방송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카데미쪽의 결정에 영화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스파이크 리,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로저 디킨스,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 등 40여명의 명망 높은 영화인들은 AMPAS의 회장 존 베일리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아카데미의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편지에는 “당신들의 결정은 주어진 업무에 삶과 열정을 바쳐 헌신하는 영화인들에 대한 모욕과 다르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AMPAS는 입장을 번복해 모든 부문의 시상은 편집 없이 예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어떤 후보자나 수상자의 업적도 다른 누군가의 것보다 평가절하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연설명도 함께였다. 다만 존 베일리 회장은 시청률을 고려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러닝타임을 3시간 미만으로 줄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말해 미래의 시상식에서도 러닝타임에 개입할 여지가 있음을 시사했다.

<콜드 워>

4. #OscarsSoWhite와 #MeToo의 시사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카데미를 넘어 할리우드까지 다양성 논란을 촉발한 #OscarsSoWhite 해시태그 운동은 수년간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2016년 아카데미의 감독상과 작품상, 남우·여우 주·조연상 부문에 유색인종 후보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해의 라인업은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하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비영어권 영화로는 두 번째로 주요 부문에 대거 노미네이트된 영화이며, 주연배우 얄리트사 아파리시오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비영어권 원주민 여성이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감독을 노리는 <블랙클랜스맨>의 스파이크 리, 예년 같으면 외국어 영화상 후보군에서 봤을 것이 더 유력한 폴란드 감독 파벨 파블리코프스키가 <콜드 워>로 감독상과 촬영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올랐다는 점이 아카데미의 변화를 말해준다. 2020년까지 여성과 소수인종의 비율을 2배 이상 늘리겠다고 선언하며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 신규 회원의 비중을 매년 확충하는 등 수년간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온 AMPAS의 노력이 가시적으로 성과를 보이는 해가 올해인 듯하다.

반면 후보자 선발에서 윤리적 기준의 강화를 야기한 #MeToo 캠페인의 경우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여러 건의 성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보헤미안 랩소디>로 작품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 이는 영화의 수상 여부와 별개로 브라이언 싱어의 이름을 시상식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로 결심한 영국 아카데미의 행보와 사뭇 다르다.

<퍼스트맨>

5. 아카데미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한해다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후보작의 면면보다 시상식의 진행 과정을 둘러싼 잡음이 더 많은 화젯거리를 만들어낸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관하는 AMPAS는 지난해 여름부터 시상식 방영 시간을 3시간으로 줄이고 인기영화상을 신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등 오스카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AMPAS는 모든 음악상 후보에게 전통적으로 예정 돼 있던 공연을 축소하고 전년도 수상자를 시상자 명단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결정으로 많은 빈축을 샀다(이 두 가지 결정은 올해 아카데미의 다른 논란과 마찬가지로 곧 번복되었다). 이 모든 결정은 점점 이탈하는 시청자를 붙잡기 위한 아카데미쪽의 특단의 조치였으리라고 영미권 언론은 진단한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의 낮은 시청률은 방영 시간이 길기 때문이 아니라 생방송으로 TV를 보지 않는 시청 방식의 변화 때문일 확률이 크다.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일을 하는 도중 트위터로 수상자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 유튜브를 켜 화제의 스피치를 감상한다”는 미국 주간지 <타임>의 진단처럼 말이다. 현시점에 대한 성급한 진단으로 외려 전통을 중시하는 헌신적인 애청자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고 있는 2019년의 아카데미는 다른 무엇보다 집행부의 개혁이 가장 절실해 보인다.

<스타 이즈 본>

● 2019 아카데미가 놓친 작품, 그리고 사람들

예상 밖의 후보 지명으로 놀라움을 안긴 만큼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지 못한 수작도 많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은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이다. <라라랜드>에 상복이 몰린 탓인지, 혹은 시상식 시즌에 자주 언급될 만한 이슈를 선점하지 못한 영화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퍼스트맨>은 작품상, 감독상, 주·조연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브래들리 쿠퍼가 첫 연출작 <스타 이즈 본>으로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점도 의외다. 본인도 “(후보에 오르지 못해) 당황스러웠다”고 말할 정도. 영화가 흥행과 비평 면에서 고루 찬사를 받은 수작이기에 아쉬움이 더하다. 여자배우 중에서는 <메리 포핀스 리턴즈>와 <콰이어트 플레이스>로 주목할 만한 한해를 보낸 에밀리 블런트가 주·조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6전7기를 노리는 베테랑 배우 글렌 클로스와 영국 중견배우의 저력을 보여주는 올리비아 콜먼 등 올해의 경쟁자가 워낙 쟁쟁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의 슬리퍼 히트작으로 아시아계 영화인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후보군에 포함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주요 부문 상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작품이 상징하는 바가 커 어떤 방식으로든 올해 시상식에 거론되지 않을까 싶었던 터다. 시상자로 낙점된 아콰피나와 콘스탄스 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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