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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극장가 대격돌③] <인랑> 김지운 감독, "<인랑>을 통해 처음으로 텐션을 가지고 내 영화를 보는 경험을 했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8-08-01

김지운 감독의 집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는 한때 <씨네21>에 ‘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이라는 주제로 <체 게바라 평전>에 대한 글을 기고한 적도 있다. “영원히 늙지 않는 혁명가”라는 점에서 체 게바라를 좋아한다는 그는 “이미 이룬 성취를 되풀이 하거나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하는 연출자다. 안주하는 태도가 생각의 노화를 불러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코미디(<반칙왕>(2000)), 호러(<장화, 홍련>(2002)), 누아르(<달콤한 인생>(2005)), 서부극(<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 2008)), 스릴러(<악마를 보았다>(2010)), 첩보물(<밀정>(2016)) 등 매 작품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거듭해온 그는 <인랑>을 통해 SF라는 미개척지에 당도했다. 한국영화에서 한번도 구현된 적 없는 인간 병기라는 존재, 실사영화로 옮길 때마다 번번이 그 아우라를 잃고 마는 오시이 마모루 원작 애니메이션의 난해함, 제작비 200억원 이상이 소요된 거대 규모의 프로덕션. 난도로 치면 <인랑>은 <놈놈놈> 이후 영화감독 인생의 최대 고비였다고 김지운 감독은 말한다. 하지만 <놈놈놈>이 그랬듯, <인랑>은 감독에게 고통만큼이나 짜릿한 쾌감의 작품이기도 했다. “혁명을 하려면 다시 정글로 가야 한다”고 믿는 김지운 감독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고.

-어제(7월 23일) <인랑>의 스탭과 가족 시사가 열렸다. 영화계 지인들도 많이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궁금하다.

=가장 반응이 궁금했던 사람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나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기대했던 것의 최대치가 나왔다. 이 정도면 원작의 의미가 없다. 에너지가 엄청난 장면들을 구현해낸 것 같다. 배우들이 어려운 연기를 하더라. 일본에서는 절대로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다. 한국이니까 가능하다.” 일반 대중을 제외하고 가장 반응이 궁금했었는데 내 영화를 좋게 봐주어 기뻤다.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1999)을 영화화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처음에는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이미 판권 계약을 맺은 곳이 있더라. 불현듯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인랑> 생각이 났다.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면 <로보캅>이나 <배트맨> <아이언맨> 시리즈 같은, 슈트를 입은 캐릭터가 나오는 액션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슈퍼히어로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성질의 액션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권 문제도 의외로 수월하게 해결됐다. 그게 <인랑>의 시작이었다.

-영화를 만들 때 특정 이미지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걸로 알고 있다. <인랑>은 어떤 이미지에서 출발한 작품인가.

=강화복을 입은 캐릭터가 유령처럼 어둠 속 지하 수로를 배회하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이 장면을 한국영화 속에서 구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영화 <인랑>의 가장 큰 차이는 시공간적 설정이다. 원작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나 강력한 경제성장 드라이브를 건 일본 사회가 배경이었다. 영화는 남북한의 통일을 준비 중인 2029년의 한국 사회를 비춘다. 이러한 시공간적 배경을 택한 이유는.

=<인랑>의 이야기를 한국으로 가져왔을 때 어떤 시기를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4·19 혁명, 5·16 군사정변, 6월항쟁 등 한국의 정치사회적 격동기를 두루 돌아보다가 이미 일어난 일의 대체 역사를 제시하는 대신 현존하는 위기감을 확장한 한국의 근미래를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업률, 출산율, 통일 문제 등 다양한 현재적 위기 중에서 향후 전국을 요동치게 할 만한 이슈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인랑>의 시나리오를 쓸 무렵 일본의 아베 정권, 중국의 시진핑 정권이 권력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틀어잡고 우경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영화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내레이션처럼 강대국간의 영토 분쟁이 한창이었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의 두 남북정상들 역시 어떤 위기감을 가지고 미래를 모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남북한의 통일 플랜, 강대국의 억압, 경제 위기, 반정부단체의 출현과 이를 저지하는 특기대의 등장이라는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완성됐다.

만화 캐릭터와 배우의 차이에 대하여

-원작이 내면의 갈등을 겪는 개인의 어두운 심상에 주목했다면 영화에서는 특기대, 공안부, 섹트라는 세 조직간의 암투를 비중 있게 다룬다. 첩보 장르의 비중이 더 늘어난 느낌이랄까.

=그런 설정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까지 나는 한 인물의 마음의 궤적을 좇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달콤한 인생>도 그랬고, <밀정>도 그랬고, 거슬러 올라가면 <장화, 홍련>도 그랬던 것 같다. <인랑>은 처음으로 인물 대신 프로세스에 주목한 작품이다. 프로세스를 쫓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인물과 개인의 동기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런 접근법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니 어떤 점이 달라진 것 같나.

=어느 순간 내가 만든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경험을 하게 되더라. 인물의 심상을 좇다보면 굉장히 델리케이트한 순간들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는지, 저렇게 보여주는 게 맞는지 뉘앙스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하다보면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런데 프로세스라는 건 인물과 사건의 동선을 보여주는 거잖나. 그런 접근법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니 마치 다른 사람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내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 평소 내가 만든 영화를 잘 못 보는 편이다. 심지어 기술 시사를 할 때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극장을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데, <인랑>을 통해 처음으로 텐션을 가지고 내 영화를 쭉 보게 되는 경험을 했다.

-<인랑>의 주인공 임중경(강동원)은 공권력의 이름으로 살인 면허를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다. 공권력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일련의 역사가 있는 한국 관객에게 임중경이란 인물을 어떻게 납득시킬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법하다.

=특기대와 가장 유사한 조직을 한국에서 꼽아보자면 양민을 학살한 5·18 당시의 공수부대나 백골단 등을 얘기할 수 있을 거다. 이들이 과연 제정신으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을까, 혹시 집단으로 그들을 세뇌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들은 직무를 수행하는 인간 병기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이런 질문으로부터 임중경이란 인물이 나왔다. 가혹한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게 정당한지 부당한지 회의하는 인물을 만들고 싶었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만화 같은 그림으로 배경 설명을 하다가 임중경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과거의 사건을 실사 영상으로 보여주는 건 주인공의 감정을 관객이 고스란히 느꼈으면 하는 생각으로 만든 장치였다.

-임중경 역에는 처음부터 배우 강동원을 염두에 둔 건가.

=그렇다. 영화의 프롤로그를 보면 붉은 보름달을 배경으로 폐허가 된 동산 위에 MG42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강화복 차림의 인물이 보이지 않나. 시각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장면인데, 그 장면에 어울리는 키와 ‘간지’를 누가 소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답은 강동원뿐이더라. 만화영화를 실사화 했을 때 가장 이질감이 적게 느껴질 배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강동원이 <군도: 민란의 시대>(2014)나 <형사 Duelist>(2005) 등에서 보여준 스산하고 서늘한 정조의 액션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강동원에게는 고독한 프린스의 느낌이 있다. 현실적인 감정으로 사람들과 부딪힌다기보다는 뭔가 막혀 있고 가려져 있고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그런 이유로 강동원은 임중경 역에 가장 적합한 배우였다.

-그런데 강동원이 연기하는 임중경은 오시이 마모루 버전의 주인공보다 더 감정적이고 온기가 느껴진다.

=나도 놀랐다. 만화와 똑같은 대사, 똑같은 상황을 줘도 배우가 연기하면 온기가 돌고 피가 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만화 캐릭터와 사람의 차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어떤 강렬한 극적 감정을 유발하는 장면에서도 최대한 (감정을) 누르는 쪽으로 표현할 때가 많더라. 캐릭터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철학적 몽타주 시퀀스로 넘어가는 장면도 상당하고.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접근 방식이 통하지 않는 순간들이 꽤 있었다.

남산타워, 정점의 리듬감을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

-임중경과 이윤희(한효주)의 로맨스가 영화의 중요한 한축이다. 그동안 멜로 장르를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없었는데.

=두 인물간의 로맨스는 서브 플롯이라고 생각했는데, <인랑>을 로맨스영화로 보는 관객이 많아 당황스럽긴 하다. 처음에는 디스토피아적인 야만의 시대를 배경으로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고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예를 들어 임중경은 친구(한상우), 여자(이윤희), 스승(장진태)이라는 존재를 거치며 뭔가를 자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친구, 여자, 스승이라는 존재는 그들 개인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각각 공안부, 섹트, 특기대라는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임중경에게 이윤희라는 여성이 중요한 건 특기대라는 집단의 기능을 수행하던 임중경이 처음으로 집단에서 이탈한 감정을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윤희를 비롯해 임중경과 관계를 맺는 세명의 중심 인물을 통해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탈해나가는 인물의 서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윤희 역에 한효주를 캐스팅한 이유는.

=왠지 모르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한효주의 외형적 느낌을 많이 떠올리며 이윤희라는 인물을 만들어갔던 것 같다. 한효주와 첫 미팅 자리에 <인랑> 블루레이를 가져갔는데, 재킷에 그려진 여성의 얼굴이 한효주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효주씨 하면 안정된 연기력과 디테일한 표현에 능숙한 배우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배우가 장르영화 속으로 들어온다면 어떤 활력을 줄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두 사람의 공간이자 밀도 높은 액션 시퀀스를 보여주는 남산타워는 <인랑>에서 가장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공안부와 특기대와 섹트의 동선이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떤 정점의 리듬감을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남산타워를 선택한 건 나에게 스스로 어려운 미션을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에서 못봤던 걸 시도해보자는 게 <인랑>의 목표였기 때문에 탈출구가 엘리베이터밖에 없는 남산 전망대에서 어떤 액션을 선보일지 나 자신에게 미션을 준 거다. 물론 촬영하면서 많이 후회했다. (웃음) 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미션을 풀 때 분명히 엄청난 에너지를 쏟을 텐데 그것이 화면 안에 반영될 거라는 기대감은 있었다.

-유리를 깨고 탈출하거나 벽을 뚫는 등 무언가를 돌파하는 액션이 많다.

=나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인랑>은 결국 자신을 막고 있는 장벽을 뚫고 나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다보니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뚫거나 부수는 장면을 많이 넣게 된 것 같다.

-특기대 훈련소장 장진태(정우성)와 임중경의 대립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원작과 가장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정우성, 강동원을 한 화면에 담은 최초의 감독이 된 소감은.

=이것이 내 영화에서 이루어지는구나. (웃음) 마이클 만이 <히트>(1995)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를 한 화면에 담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는 임중경의 서사는 결국 집단을 넘어서거나 거역하는 순간에 이르게 되어 있다. 영화의 모든 에너지를 총집결할 만한 강력한 존재가 필요했고 그 존재가 바로 정우성이었다. <놈놈놈>으로 정우성과 작품을 함께한 지 10년이 됐는데, 다시 만난 그는 조지 클루니처럼 자신의 변함없는 아름다움에 관록과 신뢰를 더한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중후함이라는, 이제까지 한번도 불린 적 없었던 수식어를 부여하고 싶었다.

관객에게 편안함과 위로를 주고 싶었다

-<인랑>의 결말은 당신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해피엔딩에 가깝다. 예전보다 감정의 온도가 더 뜨거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만들다보면 의도치 않았던 것들이 작품에 반영될 때가 있다. <밀정>도 그랬잖나. 콜드 누아르를 하고 싶었지만 소재가 소재인 만큼 의열단을 다룰 때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세계가 요구하는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애초의 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그렇게 만들면 너무 기준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큰 주제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새로운 가능성들에 언제나 열려 있다. 나의 무의식이 영화의 주제와 어떤 방식으로든 밀접하게 연관돼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랑>이 뜨거운 작품이라고 느꼈다면, 그것 역시 작품이 요구하는 온도에 의해 내가 움직인 결과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많이 희생시켰고, 늘 새드엔딩, 언해피엔딩을 선택해왔기 때문에 캐릭터에 좀 위안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들에게 편안함과 위로를 주고 싶었다.

-<인랑>을 ’제2의 <놈놈놈> 같은 작품’이라 표현했다.

=<놈놈놈>을 만들 때 영화감독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쾌감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는데 <인랑>을 만들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극단적인 쾌감과 절망의 상태를 넘나들었다. 이런 영화도 만들었는데 앞으로 못할 게 없다는 생각과 이것이 나의 한계이니 다시는 영화를 만들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더라. 전작을 통틀어 그런 감정을 나에게 갖게 한 작품이 바로 <놈놈놈>과 <인랑>이었다. 영화감독 10년 만에 <놈놈놈>을 만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인랑>을 만났다. (10년 뒤엔 또 어떤 작품을 만날까?) 또 이 정도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영화를 만들었다간 10년 뒤엔 아마 영화를 찍다 죽을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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