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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저메키스 <하늘을 걷는 남자>와 리안 <빌리 린의 롱 하프타임 워크>
박수민(영화감독) 2018-01-25

영화, 거짓말 그리고 120프레임

<하늘을 걷는 남자>

1995년 프랑스 파리,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던 자리에 덴마크에서 온 라스 폰 트리에가 끼어들어 난데없이 ‘도그마(Dogma)95’라는 걸 선언했다. 할리우드식 상업주의에 훼손된 영화의 순수성을 되찾자는 명분으로 그들은 영화적 순결을 위한 서약 10계명을 내걸었다. 영화는 반드시 지금 이곳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실재하는 로케이션에서 촬영하고, 소품은 그 장소에 있는 물건만 써야 하며, 오로지 동시녹음, 사운드트랙을 따로 삽입해선 안 되고, 손으로 들고 찍는 카메라에는 거짓 없는 액션이 컬러로 담겨야 하며, 조명 불가, 광학적인 효과 불가, 장르 불가의 조항이 담겼다.

덴마크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도그마 조항대로 찍은 영화가 나왔다. 그해 나는 하필 중학교 2학년이었고, 한국에서 최초로 도그마 공인 영화를 찍은 청소년으로 기록되고 싶었다(도그마 인증을 받은 한국영화는 변혁 감독의 <인터뷰>(2000)가 유일하다). 영화잡지에서 <백치들>(1998)을 찍던 트리에가 소니 VX-1000을 들고 웃고 있었고, 나도 돈을 모아 같은 기종의 캠코더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도그마 운동이란 내게 이런 의미였다. 누구나 6mm DV 캠코더를 들고서 휘뚜루마뚜루 찍은 비디오를 이제 영화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

도그마95에 입각한 영화는 2000년대 초까지 나왔지만, 지금 와서 누가 도그마를 얘기하는가? 하모니 코린의 <줄리앙 동키 보이>(1999) 외에 기억할 만한 작품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순결이니 계명이니 떠드는 자들은 항상 의심해봐야 하지만, 도그마는 발기인들이 30분 만에 작성하고 서명한 서약을 정작 본인들부터 따르지 않으면서 한 시절 치기어린 프로파간다로 남았다.

계명에 얽매이는 건 도리어 근본정신을 훼손하는 거라는 트리에의 변명만이 걸작이었다. 영화는 자신에게 종교니까, 계명은 어려운 도전이고 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유는 적절했다. 교인은 날마다 이웃의 재물을 탐내며 간음의 욕망에 시달리기 마련이니까. 도그마 운동이 그럴듯했던 건 영화의 사실성에 대한 어떤 진실한 갈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허구로서 허위를 담는 이상한 매체가 왜 이토록 진짜처럼 보이려고 할까? 영화는 거짓말인데. 구약에 얽매인 교인은 신약의 예수가 새로운 계명을 주고 간 사실을 곧잘 잊는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만 했다. 영화의 진실, 사실성은 계명으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조항 없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분명한 건, 도그마는 유튜브를 예측하지 못했다.

일찍이 유튜브의 등장을 예언한 이는 유럽의 얼치기 예술 나부랭이들이 아니라 도리어 할리우드에 찌든 작가주의 괴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였다. 어쩌면 영화 사상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대작(Epic)일지도 모르는 <지옥의 묵시록>(1979)을 찍고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서 그래도 잘나갈 때 마련해둔 자신의 와이너리 앞에 앉아 말했다. “내 희망은 평범한 사람들까지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영화를 찍는 거예요. 영화에서 전문가(Professionalism)란 말은 영원히 사라지고 진정한 예술(Art Form)이 되는 거죠.” 감독이란 독재자가 코에 마약을 묻힌 채 권총을 들고 호령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영화가 도래할 거라고 코폴라는 약간 헤밍웨이적인 냉소와 쓸쓸함, 지쳐 피곤한 기운을 담아 말했다. 바람인지 포기였는지 모르지만 그 말대로 누구나 동영상을 찍고 편집하여 공개할 수 있는 근본기술의 평등이 이루어지고 영화예술에 민주주의가 정착하자 우습게도 문제는 다시 자본과 테크놀로지로 돌아왔다. 영화는 이제 일상적인 진실을 능가한 경험이 되어야 했다. 영화의 본질, 구경거리(Show).

<빌리 린의 롱 하프타임 워크>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름으로

대니 보일이 캐논 XL-1 캠코더로 <28일후…>(2002)를 찍자 내 위시리스트 장비는 영화처럼 24프레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바뀌었고, XL-2를 가지고서 처지가 가난한 까닭에 도그마영화처럼 보이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영화학교에 간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간 풀HD 방송과 매체가 삽시간에 보급되어 어느새 일반 상용화된 4K의 시대가 되었고 수치상으로 극장 스크린에 맞먹거나 능가하는 해상도의 디스플레이를 집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극장은 크고 선명한 화면으로 어필할 수 있는 이점이 크게 줄었다. 지금 관객은 아이맥스도 여간해선 성에 차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첫 대안은 3D였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 이후 3D는 으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기본 옵션으로 제공하는 포맷이 되었다. 그러나 3D는 정말 진짜 같은가? 현실과는 별로 상관없는 쪽으로 입체적인 구경거리 아닌가?

개인적으로 3D영화를 선호하지 않지만 몇 가지 기준으로 삼을 만한 레퍼런스는 있었다. <그래비티>(2012)가 구현한 우주의 공간감, <고질라>(2014)에서 괴수가 세계를 파괴하는 정경, <레고무비>(2013) 속 실제 브릭이 움직이는 듯한 질감. 그러나 거창한 구경거리보다 안경이 거추장스럽기만 하던 중, 3D 미학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며 가짜로 구현한 진짜 같은 현실로서 영화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최초의 사례는 카메론이 아니라 로버트 저메키스로부터였다. 그는 꾸준한 영화 테크놀로지의 실험자였고, 풀CG와 3D영화의 진중한 모험가였다. 412m 높이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꼭대기에서 외줄을 탄 필리프 프티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하늘을 걷는 남자>(2015)를 3D로 보고 나는 극장에서 실제로 고소공포증을 느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 높이, 이 깊이는 2D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중에 3D와 2D 블루레이로 다시 확인해봤고, 오직 3D만이 하늘을 걷게 했다. 구경이 아니라 경험에 도달시키는 굉장한 가짜였다. 심지어 이 영화는 3D 카메라로 찍은 ‘리얼’ 3D도 아니었다. 2D로 찍고 후반작업에서 깊이를 부여한 ‘페이크’ 3D였다. 그 진짜 같은 가짜마저 진짜가 아닌 가짜였다. 응? 아무튼 위대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 3D를 믿는다.

리안은 가장 높은 프레임을 선택했다

그럼 이제 미래의 영화는 어디까지 갈까? 현대 영화의 테크놀로지로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두려운 감독의 이름으로 나는 저메키스에 이어 리안을 꼽는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감독은 똑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변주하며 반복할 뿐’이라는 일반의 짐작에 대한 완벽한 부정이다. 나는 리안이 영화에서, 영화를 통해서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장르, 소재, 주제 사이 연결 고리가 있긴 한지 감이 안 잡힌다. 있다면 스토리텔링의 극한을 향한 기교의 실험이 아닐까? 리안은 2~3년 주기로 쉬지 않고 자신이 읽어 선택한 책을 재빨리 영화로 만든다. 벤 파운틴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빌리 린의 롱 하프타임 워크>(2016)에서 그는 이라크 파병 군인이 분대원들과 특별 휴가를 받아 고향 텍사스에서 미식축구 경기의 하프타임 쇼에 데스티니 차일드와 함께 행진하는 이야기를 4K, 3D, HFR로 찍었다. 초당 48프레임 촬영방식의 <호빗>(2012)을 보고 몸살을 일으켰던 나는 4K 60fps 이상 높은 프레임이 필요한 매체는 오직 비디오게임과 포르노뿐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리안은 영화 사상 가장 높은 120프레임을 선택했다. 장르가 판타지도 아닌, 어느 군인이 맞닥뜨린 정신나간 현실에 대한 드라마를 왜 3D로, 심지어 120프레임으로 봐야 하지? 영화가 현실의 해상도와 프레임과 밝기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영화의 5배 프레임을 위해 세트장에 5배의 조명을 쏘면서 감독은 배우에게 말했다. “연기를 하면 안 돼. 연기처럼 보여.” 영화와 관객 사이의 허구와 현실 사이의 장막을 첨단의 기술로 걷어내려는 이상한 의지, 기괴한 집착. 과연 이 시도는 감독의 실험이었을까, 관객에 대한 시험이었을까?

블루레이는 매체의 한계로 120프레임을 담을 수 없어 나는 24프레임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수치상으론 이 영화의 5분의 1만 본 셈이다. 영화를 봤음에도 본 게 아니다. 이 영화를 오독하기엔 경험치가 충분치 않다. 프레임 전부를 본 해외의 소감은 역설적이었다. 작품은 긍정적이었지만 120프레임은 부정적이었고, 심지어 모든 게 가짜처럼 보인다고들 했다. 눈앞에서 보는 연극처럼 보인다는 뜻일까? 24프레임의 마법이 제거된 영화는 시네마가 아닌 걸까? 궁금해서 미치겠다. 저메키스는 내게 3D 거짓말을 믿게 만들었다. 리안은 120프레임의 거짓말을 믿게 만들 수 있을까? 영화의 미래를 본 관객은, 다시 도그마를 원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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