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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삐> <꽃섬> 출연한 어어부프로젝트 보컬 백현진
2002-04-12

신종 문화건달, 백현진과 고구마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 두 건달이 있다. 특정한 직업 없이 거리를 떠돈다는 점에선 보통 건달과 같다. 이들은 그러나 주먹과 어깨 대신 음악과 영화와 그림으로 세상을 누빈다. 경계에 서서, 낯설다는 듯 멀뚱하게 세상을 쳐다보다, 재미있는 판이 보이면 뛰어들어 한판 놀더니, 금방 다른 판을 기웃거리는, 천생 유목민들. 백현진과 고구마, 그들을 우리는 신종문화건달이라 부른다. 편집자

그를 한마디로 소개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저자’, ‘마부’, ‘없었을텐데 그러므로 나는’이라는 엉뚱한 호칭까지. 신발 바꿔 신듯 태연자약하게 이름을 갈아치우는 데다, 음악, 미술, 영화에까지 이리저리 발을 걸쳐 복잡무쌍한 크레디트를 가진 이 서른한살 청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가장 짧고 간단한 알림말을 붙여보자면 이렇다. 어어부프로젝트에서 노래하는 사람, 백현진.

황신혜 밴드의 김형태가 이들의 2집 ‘개, 럭키스타’에 부친 말을 보면 어어부를 설명하는 단어들은 온통 ‘불(不)’ 투성이다. 불편하고, 불규칙하고, 불가사의하며 가끔은 불쾌감까지 주는 음악. 따라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도 ‘불리할’ 음악을, 어어부프로젝트는 세개의 정규음반과 여러 편의 영화음악 작업을 통해 선보여왔다.

어어부의 노래에서 듣는 백현진의 목소리는 술 취한 사내의 주정 같고, 다친 짐승의 신음소리 같았다. 중얼거리거나 악을 쓰며 그는 한없이 어두운 이야기를, 농담같이 풀어놓는다. 입꼬리는 웃고 있지만 뺨에는 눈물자국이 떨어지는 삐에로의 얼굴처럼 우습지만 서글프다. 장난 같은데 절실하다. 걸쭉하고 둔탁한데 그게 날카롭다. 그 모순의 음성이, 어어부의 노래에 더욱 긴장을 불어넣는다. 난해한 음악과 뜻 모를 이름들 뒤에 스스로를 숨기는 이 사람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아낼 수 있을까. 백현진을 만나는 일은, ‘불안한’ 예감을 동반했다.

인스턴트 꿈

백현진은 ‘의외로’ 친절했다. 그리고 예쁜 소파가 있다며 촬영장소를 제안하고, 버려진 액자를 주워 소품 구색을 맞추는 등 ‘보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미술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홍대 조소과의 늦깎이 94학번. 디자이너인 누나 백지호(백현희)씨를 통해 알게 된 화가 이불, 최정화씨 등과 어울려다니며 ‘노느라’ 졸업과 입학 사이에 몇년 시간이 떴다. 흙이며 쇠며 나무를 만지고 움직이는 조각이 너무 힘들어서 “가만히 앉아서 그리면 되는” 회화과로 전과를 도모했으나 학점이 모자라 실패하고, 어쩌다보니 졸업은 멀어졌다. 음악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2년 전에 포트폴리오를 싸들고 ‘보험회사 영업사원 심정’으로 <씨네21>을 찾아와 일러스트레이터 자리를 얻어낸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며(그의 그림이 매주 비디오 코너의 ‘오! 컬트’ 칼럼에 실린다), 아트선재센터에 1주일에 3일 출근하는 그래픽디자이너로 일종의 직장생활도 하고 있다.

그림이나 디자인은 그에게 안정적인 수입원일 뿐 아니라 다른 뮤지션들과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상은, 강산에, 김윤아의 공연에서는 무대디자인, 그리고 이상은의 ‘외롭고 웃긴 가게’와 <버스, 정류장> 음악을 맡은 루시드폴 1집에서는 앨범재킷 디자인을 했다. 이 가운데는 어어부 밴드의 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인 뮤지션들도 있다.

“장르나 스타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걸 하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그게 중요하죠. 노래, 무대미술, 디자인… 내가 하는 영역들도 제안이 흥미롭고 내가 어느 정도 해낼 자신이 있고, 때로는 화폐도 되고 그럴 때 내가 움직여요.” 그 ‘흥미로운 제안’에 끌려 그는 색소폰 주자인 강태현의 연주에 목소리를 더하기도 하고, 무용가 안은미의 춤 무대에 퍼포머로 서기도 한다. 그리고 백현진이 요즘 가장 재미있어하는 분야는, 영화다.

레이다 이마

1집 수록곡인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가 <나쁜 영화>의 행려 장면에 삽입되면서부터 ‘풋풋했던’ 어어부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뽕짝 리듬에 생경한 가사를 붙여 새로웠던 <반칙왕>의 ‘사각의 진혼곡’ 역시 백현진의 목소리. 최근에는 <복수는 나의 것> 영화음악에 참여했다. 그런데 백현진이 재미있어하는 ‘영화’ 일이, 영화음악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최근에 긴 직업 목록에 배우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송일곤 감독의 <꽃섬>에서는 게이를 연기하면서 그 장면을 위한 곡 ‘어떤 냄새’를 만들어 불렀고, 지금은 애견가인 주인공 역으로 김지현 감독의 디지털 장편영화 <뽀삐>를 찍는 중이다. 같은 감독의 전작이며 한 사람씩 조리대를 앞에 두고 라면이 익는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 이야기인 <바다가 육지라면>에서는 ‘아버지 말고 다른 아저씨를 좋아한 엄마, 고기반찬 마다하고 라면만 먹다 영양실조에 걸린 형’ 등 어두운 가족사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다. 시나리오를 몇편 끄적이고 있으며 언젠가는 영화감독 일도 해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홍상수 감독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는 것. 노래부를 때 ‘한대수나 톰 웨이츠의 목소리가 뜨겁게 차지하던’ 머릿속 자리도 홍상수 영화로 바뀌었다.

“홍상수 감독 영화들은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줘요. 사려깊은 영화 같아요. <생활의 발견>을 보고 끊으려던 소주를 엄청나게 먹고 다음날 아무것도 못했어요. 그런 영화를 보면 몸이 소주를 부르도록 변하는 것 같아요. 사람을 화학약품 먹게 만드는 영화. 건전하게 직장 다니는 시민들은 그런 영화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술 마시게 하고, 회사를 못 가게 하니까.”

‘홍상수 영화의 배우’ 외에도 그가 궁리하는 일들은 많다. 따로 준비한다기보다 늘 하고 있는 것은 시 쓰기. 중고등학교 때는 자작시에 어어부라는 필명을 붙여 친구들에게 보여주었으며(반응이 썰렁하면 ‘그런 사람이 있다’ 하고, 칭찬할 때는 ‘어어부가 사실 나야’라고 털어놓았다) 94, 95년경 국군통합병원에서 방위로 복무할 때 매일 목격하는 죽음에 대해 썼던 글은 어어부밴드 1, 2집 노랫말이 되었다. 지금까지 써둔 시를 문단에 발표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인터뷰 도중 콘서트장에 가 있던 그의 친구들이 핸드폰을 울렸다. 핑크플로이드 전 멤버인 로저 워터스 공연.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공연에는 가기 싫어 자신은 빠졌단다. 무용음악 작업 때문에 파리에 한달 가 있을 때는 에펠탑을 안 보고, 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서도 석굴암은 안 갔다. “진짜 멋있을 텐데, 그런데. 왜 안 가고 안 보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오래 지나면 알게 될지도 모르죠. 내가 어어부라는 이름을 지었던 이유를 나중에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처럼.”

밭 가는 돼지

만화가 이우일은 “네가 아무리 이름 바꾸고 해봤자 아무도 몰라. 사람들이 너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아니?”라고 일갈했단다. 어쨌거나 그가 거쳐온 이름들은 “지을 때는 별 생각 없다가 정해놓고 놀면서 오래 지나보니 그 뜻을 알게 된” 것들이다.

첫 이름인 ‘어어부’는 ‘물고기 잡는 사람’ 漁夫와 ‘물고기 아버지’ 漁父를 합친 말. 물고기를 공격하고 착취하는 주체인 어부와 보호해주는 존재인 아버지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아이러니는 “상황이 사람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라는 그의 평소 생각과도 통한다. ‘저자’는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그 유래. 동시에 ‘저자, 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는 뜻이 있으며 백화점보다는 시장, 저잣거리를 좋아한다는 의미도 된다. ‘마부’라는 이름은 전주영화제에서 60년대 한국영화 <마부>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어렸을 때 봤는데 재밌었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붙인 것. 이름이 너무 의미심장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장 최근의 ‘없었을텐데 그러므로 나는’이라는 이름은 남들이 지어주고 부르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면 어떨까 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노트에 끄적여두었던 글에서 직감적으로 한 부분을 따와봤다.

“이름이 자꾸 바뀌는 것도,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 것도 아직은 내가 뭘 해야하는지 확실히 몰라서예요. 하는 일들을 한번 세어봤더니 너무 많아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뭘 하나 할 때 스스로에게 불안하지 않고, 정말 이걸 오래, 잘하겠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죠. 아마 그중에 하나는 노래하는 거일 것 같고, 하나만 더. 그래도 두 가지는 하고 싶으니까. 딱 하나 하기는 싫으니까.”

먹고사는 하나만으로도 바쁜 세상살이에서 ‘딱 하나만 하기는 싫도록’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내 얘기를 어떻게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예전에는 그 ‘이야기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목소리가 높고 큰 사람들일수록 대체로 자기중심적이고 추했기 때문에. 그러나 “내 속에 들어찬 이야기를 단단하게 만들어서, 나를 위해 정리하고 싶은 욕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밝고 명랑하지만은 않은 얘기들을 자유롭게, 심각한 것들은 심각하지 않게.

지금은 백현진이라는 이름을 당분간 쓰기로 했다는 그는, 빈 편지라는 단어 ‘백간’으로 이름을 바꾸어볼까 망설이는 중이다. 짓궂은 농담일 수도 있고 수만 가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 빈 편지가, 그의 이름으로 제법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이름 바꾸기 좋아하는 그를 흉내내 백현진에게 새 이름을 붙여본다.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글의 중간 제목들은 어어부프로젝트의 곡명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놀다보면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천천히.) 글 황선우 jiver@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뽀삐> <꽃섬> 출연한 어어부프로젝트 보컬 백현진

▶ 백현진이 쓴 노랫말들

▶ <죽이는 이야기> <우렁각시>, 삐삐롱스타킹의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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