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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민용근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설렘을 떠올림
민용근(영화감독) 2016-11-23

회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하던 일은 영화 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었다. 한주의 개봉영화를 검색한 뒤 홍보사에 연락해 자료테이프를 받고, 그 내용을 편집하고 대본을 써서 성우 더빙을 해 방송용 프로그램으로 완성하는 일이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퇴근하고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편하기로 치면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 고민을 했다. 먹고살려면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실 나는 다시 영화를 시작하고 싶었다. 군 입대와 휴학 3년, 방송다큐멘터리 4년, 약 7년간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영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만 쌓여갔다.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누른 채 매주 새롭게 개봉하는 다른 영화들을 들뜬 어투로 소개해야 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회사가 주는 금전적 안온감에 익숙해질 무렵, 우연히 단편영화 제작지원 공모를 접했다. 마감을 3일 정도 남겨둔 상황이었는데, 왠지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영화와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일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지만 일단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퇴근 후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마감 당일 아침, 시나리오까진 겨우 완성했지만 역시나 시간이 부족했다. 필수 제출 서류인 콘티를 전혀 그리지 못했던 것이다. 밤을 새우고 출근했지만 회사에선 해야 할 업무들이 있었다. 마감 시한까지 콘티를 그려 지원 서류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마음을 접자 마음이 편해졌다.

지원 마감 시한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각, 나는 성우 더빙을 위해 녹음실로 가느라 여의도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휑했다. 지난 3일간 퇴근 후에 느꼈던 행복하고 들뜬 기분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모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말한 뒤, 준비된 서류들만 먼저 접수시키고 콘티는 월요일 아침까지 가져다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기대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뜻밖에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녹음실로 달려갔다.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친 뒤 시나리오를 들고 접수처를 향해 전력질주했다. 마감이 1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은 부동산 브로커인 톰(로맹 뒤리스)에게 찾아온 열망과 숙명에 관한 영화다. 그는 부동산 일을 하며 폭력과 술수로 가득 찬 세계에 몸담고 있지만 피아니스트였던 죽은 어머니가 물려준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재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어머니의 옛 스승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묻어두었던 피아노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난다. 그는 부동산 브로커와 피아니스트라는 전혀 다른 두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제어할 수 없이 터져나온 자신의 강렬한 열망에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영화의 마지막, 결국 톰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이 아닌 피와 상처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아내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톰의 눈빛은 여전히 무언가에 매혹된 듯 번뜩이고 있다. 그 눈빛이 슬프고 강렬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다시 영화를 시작하던 때였다. 그전에 가까스로 접수시켰던 단편영화가 제작지원에 당선돼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나는 다시 영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열망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영화를 볼 때면 오래전 퇴근 후 시나리오를 쓰면서 느꼈던 설렘과 지원 서류를 들고 전력질주할 때 느꼈던 숨가쁜 행복이 떠오른다.

민용근 영화감독. 단편 <도둑소년>(2006), <자전거 도둑>(2014), 옴니버스 <원 나잇 스탠드>(2009), <어떤 시선>(2013), 장편 <혜화,동>(201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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