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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 그녀가 달라졌다

<널 기다리며> 심은경

그녀가 달라졌다. “나이가 들어 젖살이 빠진 거”라며 멋쩍게 웃는 심은경이 스튜디오에 들어선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해사한 피부 톤은 여전했지만 턱선이 날카로워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정말 몰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극장에 갔는데 직원이 저보고 혹시 배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저 그런 거 안 한다고 웃으면서 돌아나왔어요.” 다행이다. 아직 <수상한 그녀>의 오두리가 뼛속 깊이 새겨진 그 심은경이 맞다. 인터뷰 도중 입김으로 앞머리를 후후 불어넘기는 모습도 역시 영락없는 <써니>의 나미다. 반갑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한 것은 영화 <널 기다리며>를 기점으로 이제 그만 나미와 오두리를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동년배 배우 그 누구보다 화려한 흥행 성적을 자랑하며 주목받았던 그녀가 이제는 불과 몇년 전 일을 언급하며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연기에 관한 그녀의 진지한 고민이 담긴 영화 <널 기다리며> 이후 심은경이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20대를 보내는 심은경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묻고 또 물었다.

“모르겠더라. 어려웠다.” <써니>와 <수상한 그녀>의 연이은 성공으로 주목받은 배우 심은경은 차기작을 고르던 중에 <널 기다리며>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널 기다리며>에 마음이 쓰였다. 장르 때문이었을까. <불신지옥>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화에서 일단 환하게 웃으며 등장했던 그녀이니까 숨가쁘게 내달리는 스릴러에 대한 열망쯤은 당연히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작품은 탐욕과 부정이 뒤엉킨 시궁창 세계를 묘사하거나 혹은 미친 존재감을 뽐내는 인물 군상이 날뛰는 소위 ‘쎈’ 영화들과는 다소 거리가 먼 영화다. 모홍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고추장식 감성 스릴러”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영화다.

심은경을 고민에 빠뜨린 건 <널 기다리며>의 주인공 희주의 이상한 존재감이었다. 그녀는 아빠의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15년의 세월을 잠자코 방 안에서만 기다려온 이상한 소녀다. 그래서인지 희주는 심은경에게 도전과제처럼 다가왔다. “기존에 해온 연기와는 다른 스타일의 연기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던 차였다. <널 기다리며>의 희주는 이전에는 쉬이 볼 수 없었던 여성 캐릭터였다. 표면의 광기보다 내면의 진짜 광기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심은경을 사로잡은 희주는 15년 전 아빠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수감당한 살인마의 출소날만 기다린다. 하지만 살인마는 무죄를 주장하고, 결국 다시 세상에 나온 그는 자신을 누명 씌우고 감옥에 보낸 진범을 찾아나선다. 희주는 희주대로, 살인마는 살인마대로, 그리고 희주를 돕는 아빠의 동료 형사들은 형사들대로, 모두가 진짜 나쁜 놈을 찾아 법의 심판대에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복수를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는 희주를 연기하기 위해 심은경은 이때부터 ‘광기’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희번덕거리는 광기는 너무 뻔한 표현 같았다. ‘과연 15년 동안 복수를 꿈꾸며 살았던 그녀의 일상에서 광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그래서 오히려 더 감정을 많이 절제한 것 같다. 양면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보다는 하나의 흐름으로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에서 어른스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여전히 희주의 연기 톤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심은경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방향키가 아닐까? “처음 시나리오상에서 희주는 남자아이였다. 지금보다 더 폭력적이었을지도 모르는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뀌면서 감성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 같다.”

어려서부터 이미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톱배우라는 무거운 책임감과 그 어느 때보다도 알쏭달쏭한 캐릭터의 톤 앤드 매너 때문에 고민하던 차에 심은경은 마침 한편의 만화를 떠올렸다. 바로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요한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생각해보니 희주와 겹치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그가 어떤 장면에서 사람을 죽이고는 쓰윽 돌아서면서 ‘당신이 날 살린 거야. 의사 당신이 날 살렸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연기의 톤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덕분에 연기를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진다는 사실도 절실하게 깨달았을 터.

연기 톤에 관한 숙제가 어느 정도 풀리자 이번에는 액션이란 숙제가 찾아왔다. 그녀는 돌로 사람을 내려치거나 칼을 들거나 전력질주로 산을 오르내리는 액션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낯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감정에 몰입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울분이 치밀어올라 뭐든 휘두르고 있더라”라는 대답을 들으니 액션도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선다. 배우 김성오와의 밀착 액션 장면에서는 “서로의 합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 아직 걸음마 단계의 배우임을 보여주다가도, “정말 위험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직접 촬영하려고 노력했다”는 모습에서 그 어떤 베테랑 배우 못지않은 열정도 느껴진다. 마치 희주가 15년을 기다리며 집에서 홈스쿨 수업을 받듯이, 심은경 역시 연기 홀로서기를 위해 캐릭터와 액션 마스터 훈련을 차례차례 겪은 것 같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널 기다리며>의 희주는 부모 없이,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이 혼자 살인마와 싸워 이겨야 하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심은경이란 배우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살펴봤을 때 그녀 역시 처음으로 영화 속에서 부모가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언제나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있었던 <수상한 그녀>의 할머니 오두리,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사월이, <써니>의 나미, 경우는 좀 다를지라도 <불신지옥>의 소진, 멀게는 <헨젤과 그레텔>의 영희를 비교해봐도 그 차이는 확연해진다. 한때 연기력 이슈를 몰고 다녔던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의 설내일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주변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나타나 갈등을 봉합해주고 떠나곤 했다. 그런데 이젠 정말 그녀가 홀로서야 하는 것일까. 아니, 이미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일까. 어쩌면, 성공 여부가 불필요한 자연스러운 성장세는 아닐까.

<널 기다리며> 이후 올해 심은경의 변화의 결을 지켜볼 영화가 아직 몇편 더 남아 있다. 가장 가깝게는 박광현 감독의 <조작된 도시>가 있다. 이 영화에서 심은경은 억울하게 감옥에 간 권유(지창욱)를 도와주는 멤버 중 한명인 히키코모리 해커 여울을 연기한다. <로봇, 소리>에 이어 또다시 목소리 연기에 도전하는 <서울역>, 그리고 평범한 고등학생이 뭘 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다 벌이는 경보대회 영화 <걷기왕>, <특별시민> 등이 남아 있다. “다들 개성 강한 캐릭터니까 즐겁게 봐달라”며 화사하게 웃는 그녀는 사실 <널 기다리며>에 대한 관객의 평가가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캐롤>을 봤는데 그냥 좋더라. 나는 영화가 너무 좋은데 그래서 너무 싫기도 하다. 어떨 땐 정말 영화 못 보겠다는 생각도 하다가 <캐롤>은 좋고 싫음을 다 초월해서 그 감정 자체만을 생각하게 됐다. 사실 최근에 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캐롤>을 보고 치유됐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너무 좋고도 싫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연기하는 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연기가 진짜 같은데, 이게 참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가, 생각을 많이 하고 뭘 하든지 물러서게 되는 경향도 있으니까 그래서 좀 고민이 되는 것 같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당연하게 두려움도 커지고 잃을 것도 많아지고 점점 더 빛을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고민들을 쌓아나가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에게는 여전히 영화라는 무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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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최영주 실장·헤어 이하정 디자이너(이희 헤어 앤 메이크업)·메이크업 오성희 부원장(이희 헤어 앤 메이크업) 의상협찬 DKNY, 할리샵, 리사코 쥬얼리, 유니클로 앤 르메르, 유니클로, 르피타, 콜한, 캐롤리나 헤레나, 레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