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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즐겁게 영화 찍던 시절은 지났다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5-11-26

<해에게서 소년에게> 안슬기 감독

배우로 전향한 건 아닌가 했다. 근 몇년간 필모그래피의 상당수가 단역 출연이다. 그랬던 안슬기 감독이 장편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돌아왔다. 데뷔작 <다섯은 너무 많아>(2005)와 <나의 노래는>(2007), <지구에서 사는 법>(2008) 이후 장편 연출로는 6년 만이다. 뜸한 신작 개봉과 더불어 현직 교사(서울방송고등학교)로 재직 중인 까닭에 안슬기 감독은 요즘 또다시 ‘교사 출신 감독’이라는 이야기로 이슈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이번 작품을 통해 보여준 그의 변화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형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원에 빠진 엄마가 자살하고, 아버지는 생활고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동안 버려진 아이 시완이 복수를 마음먹고 찾은 기도원 생활을 그린다. 시완은 이곳에서 결핍을 채워줄 뜻밖의 환대를 얻지만, 부디 이 관계를 대안가족 같은 휴머니즘의 틀로 규정짓지 말아달라는 것이 감독의 당부다. 이 영화에서 소년이 체감하는 세상은 어두운 심연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날선 긴장 속에 그동안의 안슬기 감독의 변화가 읽힌다.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DGC) 3기 졸업작품으로, 올 전주국제영화제 넷팩상과 전주프로젝트마켓 배급지원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뒤늦게 영화 공부를 한 계기는 무엇인가.

=먼저 진행했던 시나리오가 잘 안 됐고, 교직도 병행하다보니 선뜻 시작을 못하겠더라. 그렇게 오래 쉬다보니 정서적으로 불안했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찍을 수 있는지의 문제에 봉착했다. 한겨레영화제작학교 말고는 영화 공부로 정규 과정을 밟은 적이 없으니 이참에 제대로 공부를 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 결실이 영화제작 석사과정(MFA) 졸업작품이 됐다.

-<다섯은 너무 많아> 때부터 이미 발전시킨 기획이었다고.

=당시에 차기작으로 고민하던 작품 중 하나였다. 나머지 작품인 <나의 노래는> <지구에서 사는법>은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유독 어렵더라. 단지 누구와 누구의 단선적 관계를 그리기는 싫어서 여러 가지 함의를 내포하려다 보니 전개가 힘들었다. 대학원에 오니 그런 어려운 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 고민을 많이 할 수 있는 아이템 말이다.

-안수원, 기도회라는 소재는 어떻게 착안했나.

=영화에서 종교라는 것이 희망을 주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개인의 탓을 한다. 개인의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고 탓한다. 나 역시 모태신앙인데, 아직도 어머니는 일이 잘 안 되면 네가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말들에 정서적으로는 반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지점을 반영하고 싶었다. 좀 위험한 소재이긴 하다. 벌써 사이비 종교라는 점이 부각되고 반기독교 영화라는 오해의 소지도 있다. 하지만 특정 종교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믿음의 시작을 그리고 싶었다. 자기들 딴에는 열심히 살려고 하고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건데 외부의 시선은 좀 다른 거다. 애초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세상과 그 구성원, 신과 피조물 같은 관계가 굉장히 불합리하다고 할까.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나 스스로 투정을 많이 부려왔다. 그래서 이번엔 좀 객기를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 넌 신한테 잘했냐?

-PC방이 도망 온 신자들의 숨는 공간(기도원)이 된다. 실제 사례를 반영한 건가.

=모델이 있었던 건 아니고, PC방이 굉장히 재밌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PC방에 가면 천사와 악마 같은 형상의 이상한 중세 캐릭터들을 그린 포스터가 막 붙어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죽이고 총 쏘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 풍경이 참 이상하지 않은가. 전도사가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PC방과는 좀 다른 분위기라 사무실을 빌려서 옛날 PC방 느낌으로 제작했다.

-전작의 톤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밝은 기운, 웃을 수 있는 요소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간다.

=영화를 못 찍고 있는 사이에 많이 피폐해졌다고 주변에서 그러더라. (웃음) 만들면서 나도 많이 괴로웠다고 해야 할까. 혼자 고민한 전작들과 달리 변화가 온 것일 수도 있고. 나도 변한 것 같다. 마냥 즐거워서 영화를 찍던 시절은 지난 것 같다.

-진짜 가족을 잃은 시완은 전도사와 신도들과 유사가족을 형성하고 동화돼간다. 하지만 시완은 죽은 엄마, 가정을 파탄시킨 종교에 복수의 칼을 늘 품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의 휴머니즘적인 성격에서 벗어난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착하거나 약하지는 않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학교도 보내줄 것 같고, 밥도 먹여줄 것 같고, 맘에 드는 이성도 있으니 여기 있어보자 하는 판단을 내린다. 그런데 그렇게 위안을 얻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다 똑같아졌어” 하고 현실에 배신감을 느낀다. 내가 칼을 든 이유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절망을 상기하는 것이다.

-폭력적인 주정꾼을 처단하는 것도 어린 시완인데, 정작 어른들은 그걸 악용하려고 든다. 시완은 어리고 약한 존재지만, 이들에게 일종의 심판자 같은 역할로 다가온다.

=처음엔 내가 어린 시완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전도사에 동화되더라. 전도사가 되어 시완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까. 아이가 칼을 들게 만들었다니 미안한 입장이 되어 있었다. 나 역시 나이를 좀더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시완을 연기한 배우 신연우의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불안과 냉소,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래 찾았다. 가만 있어도 불안한 이미지, 키에슬로프스키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의 불안하고 냉소적인 ‘야첵’ 같은 이미지를 원했는데 잘 없더라. 오디션도 많이 하고 수소문도 많이 했다. 연우는 다른 교사의 추천으로 알게 됐는데 학생 단편에 출연한 것 말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기 경험보다 이미지가 중요했다. 경험이 없는 어린 친구들은 촬영을 하다보면 못견디고 숨어버리는 경우도 많아 캐스팅이 조심스러운데 이번엔 좀 용기를 냈다. 연우군이 잘해줬고, 본인도 이번 영화를 계기로 연기에 대한 생각도 진지하게 하고 있다.

-여름이 배경이고 더군다나 기상이 느껴지는 제목과 달리 철저하게 빛을 배제한 차가운 톤을 유지한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회화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려고 했다. 바로크 미술, 특히 카라바조 그림의 톤을 염두에 뒀다. 콘트라스트도 강하게 하고 비네팅(vignetting, 사진의 외곽이나 모서리가 어둡게 나오는 현상)을 줘서 색감도 척박하게 하고, 카메라워킹도 스틸로 갔다. 너무 어두워서 걱정도 됐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자신감 있게 가자고 생각했다. <다섯은 너무 많아> 때 촬영 스탭으로 인연을 맺은 김구영 촬영감독과 함께했는데, 덕분에 이번 작품은 ‘촬영만 보이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웃음)

-아이들과의 생활은 ‘어른’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점검받고 영향받게 된다.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안슬기 감독은 아이들 영화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 반발로 의식적으로 아이들 나오는 영화를 안하려고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래서 <지구에서 사는 법>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 사실 학교를 그만둘까 고민을 18년 째 하고 있다. 이제는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지쳤다. 학교를 그만두면 학내 고발 같은 소재로 만들 영화가 지금보다 세배는 될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한테 에너지도 얻고, 수익도 얻고. 학교는 버리기 아까운 또 하나의 내 영역이다. 물론 배우들, 스탭들한테는 미안하다. 맨날 내 방학 스케줄 맞춰서 한여름, 한겨울에 고생해서 찍었는데 ‘교사 출신 감독 영화’로만 초점이 가니. 모든 영화는 성장영화 아니면 멜로영화라고 하지만 이제 성장영화는 그만 좀 찍어야 할 텐데. 당장 다음엔 어른들의 멜로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진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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