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 <명량>(2014) <범죄소년>(2012) <파란만장>(2010) <하피>(2000) <침향>(1999) <마리아와 여인숙>(1997) <꽃잎>(1996) 외
종달새처럼 사뿐사뿐 옮기는 걸음, 높은 톤에 비음이 섞인 맑은 웃음소리,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 이정현은 말간 기운을 뿜으며 상대방의 말에 귀를 세운다. 그런 그녀와 마주앉아 그녀가 걸어온 영화의 길을 훑어본다. 그리고 곧바로 떠오르는 아주 강렬한 궁금증 하나. ‘어떻게 이토록 해사하고 가냘픈 사람이 그토록 지독하고 강단 있는 인물들을 연기할 수 있었을까.’ 1980년 광주항쟁으로 어머니와 오빠를 잃고 고통 속에서 실성했던 <꽃잎>의 소녀부터였다. 무려 3000 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그녀가 <꽃잎>에 캐스팅됐다는 사실보다도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광기어린 연기를 보여준 이 작품이 그녀의 데뷔작이라는 데 더 놀랄 것이다. 소복을 입은 물귀신처럼 보였다가 다시 보니 만신이 돼 원혼을 달래던 <파란만장>의 여자는 또 어떤가. ‘신들린 듯한’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정현의 연기에서만큼은 가장 적확한 수사가 돼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이정현이 보여주는 연기의 어떤 전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정현이 연기하는 수남이라는 인물 역시 강도는 다소 누그러졌다지만, 그 전형의 연기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다. 해맑아 보이는 수남에게서는 광기가 엿보인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남은 점점 더 미쳐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고교에 진학할 것인가, 공장에 취업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수남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순이’가 된다. 그리고 공장에서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 결혼에 이르고 비슷한 일들의 쳇바퀴 속에서 밥벌이를 해나간다. 그러다 남편의 자살 시도, 재개발의 광풍을 맞으며 급기야 그녀는 살인까지 저지르고 만다. “수남은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정서를 가진 인물은 아니다. 자격증을 13개나 딸 만큼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은 늘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잖나. 그런 수남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청각장애를 가진 남편이다.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며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상당히 유아적이면서 순수한 광기를 지닌 여자랄까. 한 남자밖에 모르는 대단히 로맨틱한 사람이기도 하다.” 수남의 이런 성격과 상황은 블랙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좀더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하다. 그래서 이정현은 더욱더 수남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신중했다. “배우가 쉽게 가려고 하면 수남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 폭발하듯 울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안국진 감독님께도 ‘여기서 수남이 우는지, 웃는지’라고 묻기보다는 ‘수남은 왜 이 상태까지 오게 됐고 이렇게까지 된 이상 수남의 감정은 이만큼 오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수남 주변의 상황을 계속해서 질문했다.” 자신이 맡은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법을 두고 이정현의 고민이 깊어졌던 건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 센 역할, 감정을 끌어모아 단번에 발산하는 캐릭터를 꾸준히 맡아오면서는 더욱 그랬다. “간혹 감독님들 중에는 내게 감정을 강하게 터뜨려달라는 주문을 하는 분들이 있다. 그게 관객에게 인물의 정서를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는 거다. 하지만 필요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맞다. 괜히 에너지만 소모하니까. <꽃잎> 때는 80년 광주라는, 소녀가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명량>의 정씨 여인은 전사(前事)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뭔가 한번에 감정을 끌어올려 ‘이 여자가 이렇다’는 걸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감정을 그렇게 크게 쓰면 나도 괴롭다. 힘들어 죽는다. (웃음)”
일부러 강한 역할만 고르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귀기 어린,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줄곧 맡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관객에게 또렷한 인상을 남기고 싶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역할, 극에서 남성 캐릭터의 보조적인 역할만 한다면 굳이 내가 해야 하나 고민이 든다. 꼭 주연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을 중요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캐릭터이고 싶다.” 반복적인 이미지로 그저 소모되는 배우가 아니라 자기만의 확실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그녀는 방점을 꾹꾹 찍는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런 의미에서 놓칠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는데 첫 신부터 눈을 못 뗐다. 반전이 거듭되니까 너무 재밌더라. 게다가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잖나. 감독님께 ‘제가 무조건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정현은 더없이 수남에게 빠져들었다지만 하마터면 수남이 되지 못할 뻔했다. 노 개런티로 출연했던 <범죄소년> 이후 저예산의 독립영화 시나리오가 부쩍 많이 들어오자 회사 차원에서 시나리오를 거르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랬다. 그때 이정현과 수남을 이어준 건 <파란만장>으로 그녀에게 가수가 아닌 배우라는 이름을 다시 찾게 해준 박찬욱 감독이었다. “박 감독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재밌다, 꼭 읽어보라’고 하시더라. 감독님이 칭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웃음) 얼른 읽어내려갔고 곧바로 반해버렸다.”
노 개런티, 열악한 촬영 환경 같은 건 연기에 대한 그녀의 갈증 앞에선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 캐릭터에 힘입어 전개되는 영화가 별로 없지 않나. 괜찮다 싶은 시나리오는 대체로 저예산이고. 그러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연기를 할 수가 없다. 감독님들이 좋은 여성 캐릭터를 많이 써주셔야 한다. 남자배우들은 바쁜데 쉬고 있는 여배우들이 얼마나 많나. <차이나타운>(2014), <무뢰한>(2014) 같은 여자영화가 잘돼야 한다. 나는 항상 연기에 목이 마르다. 그러니 돈이 뭐가 문제이겠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역을 만났을 때 카타르시스가 막 느껴진다.” 작품의 규모, 극중 비중보다도 자신이 꽂히면 일단 가고 보는 그녀다. 물론 한편으로는 걱정도 있다. “원래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는 편도 아니었지만 또 ‘이러다 작품을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면 불안해진다. 다작을 해서 이런저런 캐릭터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신중하게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게 맞는 건지, 어느 게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배우에겐 기다리는 일이 제일 힘들다. 그러다 지치면 필모그래피를 망가뜨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다 기다려볼 생각이다.”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메가 히트곡을 부른 가수로서도 에너지에 에너지를 거듭 발산해온 당찬 그녀이지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개봉(8월13일)을 앞두고는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 보였다. “밤에 잠을 설칠 만큼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한다. 가수 이정현의 팬들은 좀 충격을 받으시려나? ‘애교 많은 정현 누나가 어쩜 저렇게 세게 나오나’라며 무서워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그런데 그렇게 잔인한 영화는 아니니까 많이 봐주면 좋겠다.” 음악 얘기가 나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앨범? 좋은 곡이 나오지 않는 한 내지 않을 것 같다. 영화감독님들이 무대 위의 내가 너무 강해 보여 싫어하실지도 모르고. 하하.” 그 대신 배우 이정현을 볼 날은 마음 놓아도 될 만큼 길 것 같다. “연기가 점점 더 좋아진다. 연기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려면 계속해야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꼭!”
기구한 운명의 여자
<범죄소년>에서 이정현이 연기한 효승은 미혼모다. 17살에 아들을 낳았고 아들을 내팽개친 후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효승은 소년원의 면회장에서 아들과 재회한다. 특수강도 상해죄를 지은 아들과의 불안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직장도 집도 없는 효승이 엄마로서의 역할까지 하게 됐으니 그녀의 인생에 순탄한 길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처럼 기구한 운명의 여자는 이정현에게서 익숙하게 보아온 캐릭터다. 하지만 효승은 가장 일상적인 현실의 공간 안에서 생활인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정현을 색다르게 보이게 한다. 사고를 치고 온 아들과 행패를 부려 경찰서 신세를 지고 나온 후 묘한 동지의식을 느끼며 아들과 함께 걸어갈 때나, 어린 아들의 등에 업혀 잠시나마 서로의 체온을 나눌 때, 이어서 아들이 사주는 떡볶이를 입가에 묻혀가며 먹을 때…. 효승의 이런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