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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스탭들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다 (3)

김유진 1986

해외 세일즈 / <황해>(2010)를 시작으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도둑들>(2012), <끝까지 간다>(2013) 등 쇼박스 작품의 해외 세일즈, 해외 배급, 해외 마케팅 등의 일을 하고 있다. 베를린, 칸, 아메리칸필름마켓(AFM) 등 1년에 5차례는 기본으로 마켓과 국제 영화제에 참석한다.

1 대학생 때 쇼박스 배급팀 아르바이트로 참여했다가 인턴 생활을 거쳐 2010년 입사했다. 2 다양한 작품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서 해외에 내놓았을 때 반응이 오면 뿌듯하다. 영화제 때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나오면 눈물이 난다. 특히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은 <끝까지 간다>의 경우 작품의 시작부터 관여해서 성과를 보니 더 애착이 갔던 작품이다. 3 감독, 프로그래머, 바이어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입장을 조율하다보니 감정노동이 큰 일이다. 4 진심!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썼나를 되새긴다. 5 동종업계와 비교해볼 때는 평균 정도지만, 일반 대기업과 비교하면 영화쪽은 확실히 임금이 낮다. 6 세관에서 영화 프린트 수급 문제로 해외 수출 담당자들이 애를 먹는다. 정책적으로 한국영화 수출을 장려하지만, 영화의 특수성에 따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이은주 1986

음악 / 작곡 전공. 모그 음악감독이 있는 필름뮤지커(Filmuziker)에 합류해 <악마를 보았다>(2010), <도가니>(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의 음악팀원으로 일했다. <조류인간>(2014)을 시작으로 <마담뺑덕>(2014), <메이킹 패밀리>(2015)에 음악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1 필름뮤지커 입사 전, 드라마 음악 작업을 했다. 촉박한 일정에 좇겨 기계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데 회의를 느꼈다. 학교 선배의 소개로 모그 음악감독님 음악팀에 들어갔다. 2 음악 작업물을 듣고 감독님이 ‘좋다’고 말할 때. 가장 오랫동안 작품을 고민했을 감독님과 내가 통했다는 생각이 든다. 3 힘들어도 그만둘 생각은 안 든다. 하지만 내가 확신을 갖고 작업했는데 돌아오는 답이 영 아닐 땐 스트레스가 쌓인다. 4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모든 게 다 위기였다. 1년 정도 일하다보면 위기를 탈출할 수 있겠지 싶었는데 지금도 탈출은 못했다. 다만 이제는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일하는 과정의 일부로 생각한다. 5 생활을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해야 할 정도로 부족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놀랍게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웃음) 6 작업자로서, 관객으로서 한국영화의 장르적 다양성이 확보되길. 일하는 맛이 날 것 같다.

이도훈 1984

영화평론 /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 창간 및 편집장을 역임했고, 독립영화 인터뷰 전문지 <NOW> 및 비평전문지 <독립영화>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1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스무살 여름부터. 고향 친구가 ‘이상하지만’, ‘재미난 영화’를 트는 곳이 있다 해서 따라간 곳이 서울아트시네마였다. 그 후 대학 졸업 때까지 영화에 빠져 지냈다. 영화제작쪽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는데, 영화 찍는 것 외에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영화 활동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사비 200만원을 털어 판을 벌인 게 잡지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을 창간한 거다. 2 잡지나 책 같은 인쇄물을 손에 잡았을 때. 인터뷰 따내고, 밤새워 필자들의 원고 받고, 교정 보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내겐 내러티브와 미적 자율성을 두루 갖춘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3 소논문 쓴다고 몇 개월 붙잡고 있으면 나중에 크게 몸살을 앓는다. 대단한 글 쓰는 것도 아닌데 몸이 그걸 못 받아줄 때 힘들다. 또 어머니 말씀이, 내 사주가 일복은 많은데 재물복은 없다더라. 통장 잔고가 바닥일 때 그만둬야 하나 싶기도 하다. 4 좋아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서 하려 하고, 영화는 적당히 보고 천천히 따라가려 한다. 5 영화제에서 일할 땐 한달에 140만~160만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할 땐 적으면 한달에 40만원, 많으면 80만원 받았다. 영화제 모더레이터 활동비, 원고료 등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6 잡지건 학교건 현장이건 젊은 재원의 충원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건 결국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없거나 위험부담이 큰 투자를 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절실하다.

이우 1994

스틸•메이킹 / 2015년 개봉예정인 <베테랑> <4등> <돌연변이> 그리고 한국영화아카데미 3D단편 옴니버스 8기•9기 작품에 스틸과 메이킹으로 참여했다.

1 마드리드에서 8살 때까지 살면서 눈뜨면 축구하고, 리코더 연주하고, 미술관 가는 삶을 살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을 전공하려 했으나 예고 입시 날짜를 놓치는 바람에 고등학생 시절 내내 영화 보고 글 쓰는 일에만 몰두했다. 영화과에 진학해 1년 다니다 휴학하고 각종 영상을 찍다가 스틸•메이킹 회사 ‘화화’에 들어갔다. 2 그날 하루 회차가 끝나고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소리를 들을 때. 3 그만두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 없다. 힘들었을 땐 <베테랑> 끝나고 3개월간 일이 없었을 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메이킹•스틸 ‘기사’가 아니라 ‘막내’로 대할 때도 서럽다. 4 스트레스받을 때 마음을 빨리 비우는 게 나만의 빠른 일처리 방법이다. 이젠 욕먹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다. 5 모 작품 때 월 120만원을 받았다. 적게 받는 거라 생각했는데 현장 경력 2~3년차 형과 누나들이 나보다 적게 받는 걸 알고 놀랐다. 6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스탭들이 너무 많다. ‘세컨드’ 아래 스탭들은 발빠른 것, 인사 잘하는 것, 음료수 빨리 들고 오는 것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 젊은 스탭들이 의견을 제시하거나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반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또 영화의 다양성이 사라졌다.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같은 영화가 지금은 안 나오고 있다.

이한빈 1985

시나리오작가 / 시네마서비스 소속 작가로 3년간 일했고, 2014년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에서 3D애니메이션 시나리오 <GO!>로 대상을 수상했다.

1 공부도 보통, 운동도 보통, 외모도 보통인 전형적인 문과생이었는데, 이야기 만드는 게 마냥 좋았다.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 싶어 시나리오학과에 진학했다. 2 글 써서 입금될 때. 수백 마디 칭찬도 좋지만 글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가 금전적으로 돌아올 때 기쁘다. 3 어떻게 하면 이 일로 평생 먹고살 수 있을까 고민하지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4 기존의 이야기를 잘 비틀어 변형하는 것 같다. 작업 방식은 산만한 편이다. A 쓰다가 B 생각하고, B 생각하다가 C를 끄적이는 식으로. 5 처음 영화 일 시작했을 땐 중•고등학교 친구 6명 중 수입 서열 꼴찌였다. 시네마서비스에서 일할 땐 4등쯤 됐고, 최근에 대상 상금(1억원) 받으면서 누적 집계 하니 대기업 다니는 애들만큼 번 게 되더라. 그런데 나는 정말 특이한 경우, 운이 좋은 경우다. 돈을 거의 받지 못하고 글 쓰는 친구들도 수두룩하다. 6 “잘되면 나눠줄게”, “좋은 경험이야, 일단 써봐” 이런 식으로 젊은 창작자들에게 접근하는 분들이 아직 있다. 그럴 땐 영화계가 열정페이 명예의 전당 같다.

유성진 1980

세트 / 현 유나이티드997 차장. 편의상 세트 시공이라고 하지만 제한적인 표현 같아 스스로는 ‘영화미술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작사와 미술팀 사이를 오가며 세트 컨셉 가안을 현실화하는 일을 주로 한다. 물론 현장 관리도 내 몫이다.

1 체대를 졸업한 뒤 트레이너로 일했고 건설업에도 몸담았다. 현장 관리, 사람 관리가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아트서비스에 들어가 영화 세트 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세트 시공 3년차. 2 세트 제작이 완료돼 무사히 크랭크인했을 때 촬영팀이 우리가 열심히 만든 세트에서 공간 활용을 잘해줄 때도 한없이 뿌듯하다. 3 중재하는 일이 많다보니 의견 조율이 뜻대로 안 될 때. 미술팀과 으쌰으쌰 하고 왔는데 제작사에서 예산 오버라며 단칼에 자를 때나 제작사랑 어느 선까지 하기로 합의보고 미술팀에 가서 퀄리티상 그 예산으로 절대 못한다는 얘길 들을 때는 내가 전생에 얼마나 죄를 지었길래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만 하고 다니나 생각한다. 4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다. 대신 속을 다 보여준다. ‘도와주세요’, ‘죄송합니다’가 입에 붙어 있다. 또 한 가지 노하우는 컨디션 조절이다. 5 일반 직장인 수준? 대기업 말고 중소기업. (웃음) 6 크레딧 정리가 제대로 안 돼 있는 것이 가끔 아쉽다.

왼쪽부터 김송이, 장찬우.

장찬우 1986

사운드 / 4년째 몸담고 있는 라이브톤에는 폴리 아티스트가 나 하나뿐이라 입사 이후로는 라이브톤의 대부분의 작품에 참여했다. 대표작은 <해무>(2014), <명량>(2014), <관상>(2013), <변호인>(2013) 등이다.

1 음향 일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딱히 없으나 워낙 음악을 좋아해 자연스레 사운드의 세계에 입문했다. 음향을 전공했고 포스트사운드를 다루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입사하게 됐다. 여느 사운드 작업과 다른 점은 폴리 아티스트는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2 없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냈을 때 희열을 느낀다. 3 시작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때려치우고 싶겠나. 여전히 일하는 게 재미있고 내 작업에 만족하기보다 아쉬움을 훨씬 많이 느낀다. 4 소리에 답은 없다. 틈틈이 다른 스튜디오 선배들이 참여한 작품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는다. 5 라이브톤에서 꾸준히 잘 받고 있고 부수적인 수입은 없다. 6 스튜디오에서 최고 컨디션의 사운드로 작업을 완료했더라도 극장 설비에 따라 제대로 표현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건 정말 아쉽다.

김송이 1986

사운드 / 라이브톤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장찬우 폴리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입사 이후 라이브톤 대부분의 작품에 참여했다. 다이얼로그 에디팅을 업으로 삼게 된 건 영화의 기본이 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어릴 때부터 뭘하든 영화판에 있을 생각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연극영화를 공부했고, 대학도 그대로 진학했다. 연출도 해봤는데 내가 이런 사운드를 원해도 작업자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나오지 않더라. 동시녹음도 해봤지만 100%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사운드를 만지기로 했다. 대학 졸업 뒤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음향을 전공했고 라이브톤에 입사했다. 2 배우의 감정을 생각하면 동시녹음 소스가 가장 좋은 사운드 소스다. 하지만 노이즈가 심하면 ADR(후시녹음)을 할 수밖에 없는데 노이즈가 심한 동시녹음 소스를 쓸 만하게 다듬는 데 성공했을 때 만족스럽다. 3 ‘왜 아직도 못할까’ 하는 생각은 매일 하는데 ‘이 일을 왜 시작했을까’ 하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다. 경력이 얼마 안 돼 노하우가 없다는 게 제일 큰 벽이다. 4 글 쓰는 사람들이 좋은 글을 필사하듯이 선배가 다듬은 사운드 소스 파일을 열어서 똑같이 만들어보려고 한다. 5 다른 스튜디오는 얼마를 받는지 몰라 비교가 안 된다. 적당히 받는 것 같다. 6 시사를 하고 난 뒤 지나치게 수정사항이 많아지는 건 문제 같다. 당연히 보완할 점은 보완해야 되지만 지나치게 연출 주관이 흔들리는 것 같을 때 우리도 혼란스럽다.

신재하 1993

배우 / 단국대학교에서 뮤지컬을 전공했다.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4)로 배우 데뷔한 뒤 차례로 <거인>(2014), 드라마 <피노키오>(2014), <오늘도 청춘>(2014)에 참여했고 현재 웹드라마 <소녀연애사>를 촬영 중이다.

1 외고 진학을 준비하며 한창 공부에 치이고 있던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여주셨다. 그때부터 무대 위 배우들의 생기와 현장성에 매료된 것 같다. 2 데뷔작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되던 순간. 스크린에 나오는 내 모습을 처음 봤고 관객이 알아봐주셨다. 이제 정말 시작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좌절했던 순간으로 해석하자면, 경험 부족으로 감정이 잘 안 잡힐 때다. 특히 <거인>의 범태 역은 적은 분량으로 범태의 감정과 행동의 이유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연기해야 했다. 함께했던 (최)우식이 형이 나에게 맞춰서 연기해주고 있구나 느꼈을 때 정말 미안하더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몰라 촬영 없을 땐 울기도 많이 울었다. 4 묵묵히 견디는 것. <거인> 끝나고 6개월간은 작품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답답하고 조바심이 났는데 견디다보니 나중에 아주 조금 더 단단해진 스스로를 깨달았다. 5 신인이다보니 개인적인 수익은 거의 없다. 좋은 작품, 좋은 캐릭터만 보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수익도 따라오지 않을까. 6 친구들 중 배우 지망생들이 많은데 특히 여자 친구들이 기회를 잡기 어려운 것 같다. 여자를 다루는, 여자가 주인공인 좋은 작품이 많아져서 친구들이 작품을 만날 기회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박현선 1982

무술 / 서울액션스쿨 15기. 현재는 박정률 무술감독이 이끄는 ‘열혈남아’ 스턴트팀 소속.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로 현장의 뜨거운 맛을 본 이후 <노브레싱>(2013), <관상>(2013), <빅매치>(2014)에 참여했다. 액션연기 6년차다.

1 배우가 꿈이어서 액션 연기를 배우려 액션스쿨에 들어갔지만 막상 하다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지만 무술감독으로 일하다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게 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아저씨>(2010)처럼 육체의 움직임에서 묻어나오는 감정이 참 매력적이다. 2 <관상>에서 송강호 선배를 말에 태우는 장면을 찍었다. 무술팀은 얼굴이 화면에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 장면에선 내 얼굴이 많이 잡혔다. 모르는 데서도 영화 잘 봤다고 전화가 오더라. 3 그만두고 싶을 리가. 아직도 현장이 좋다. 다만 일이 없을 땐 생계를 고민해야 한다. 힘든 연기를 하는 것보다 그런 게 더 힘들다. 언제까지 내가 무술사범으로 현장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한다. 4 이미지 트레이닝을 열심히 한다. 위험한 장면을 찍을 때도 무술팀은 카메라앵글과 각을 잘 숙지해둬야 하기 때문에 몸을 사리면 안 된다. 긴장이 되지만 그냥 깡으로 한다. 멋진 그림을 위해서라면 다쳐도 괜찮다는 각오로. 5 액션이 많은 작품은 많이 버는데 액션이 얼마 안 되는 작품은 얼마 못 번다. 못 벌 땐 일년에 1천만원 내외, 잘 벌면 2천만원도, 3천만원도 번다. 6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등 전에 비하면 환경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현장은 열악하다. 세트 촬영엔 밤낮이 없으니 밤샘도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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