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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퍼스]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주성철 2014-08-26

콜린 퍼스

<매직 인 더 문라이트>

‘고전적이고 무뚝뚝한 영국 신사’ 혹은 ‘<오만과 편견>의 영원한 미스터 다아시’. 콜린 퍼스를 정의내리고자 하는 여러 시도는 이제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어느덧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이제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풍긴다. 특히 오랜 연인의 죽음 이후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죽음보다 더한 외로운 일상을 살아갔던 <싱글맨>(2009), 왕위를 포기한 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왕위에 오른 말더듬이 영국 왕으로 출연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가져간 <킹스 스피치>(2010)를 거치며 그 존재감은 더 단단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특유의 영국 악센트와 부드러운 매너로 마치 휴 그랜트의 반대유형처럼 존재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와 <러브 액츄얼리>(2003)의 훈훈한 매력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콜린 퍼스는 자기만의 거대한 성(城)을 여전히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가고 있는 중이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의 스탠리(콜린 퍼스)를 보고 있으면, 우디 앨런과 콜린 퍼스가 왜 이제야 만났나 싶다. 영적 세계를 전혀 믿지 않고 오직 이성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어딘가 예전 콜린 퍼스를 연상시키는 ‘각 잡힌’ 캐릭터가 제법 근사하게 우디 앨런의 ‘독설’의 세계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1928년 유럽, ‘웨이링 수’라는 이름의 중국인 마술사로 활동하는 영국인 스탠리는 현란한 눈속임 마술로 유럽 전역을 휩쓸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절대 믿지 않는 과학 신봉자다. 그런 그 앞에 사람의 과거를 알아내는 것은 물론 죽은 사람도 불러내는 놀라운 심령술사 소피(에마 스톤)의 소문이 흘러들고, 스탠리는 그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그녀가 머물고 있는 남부 프랑스로 향한다. 하지만 소피의 심령술이 가짜라고 확신한 그는,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옛 연인은 물론 과거의 일까지 척척 읽어내는 소피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린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는 바로 <러브 액츄얼리>다. 그 영화에서 소설가 제이미(콜린 퍼스)도 바람둥이 여자친구(시에나 길로리)에게 상처받고 남부 프랑스로 떠났었다. 작은 별장에서 소설을 쓰며 마음을 달래던 그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젊은 포르투갈 여인 오렐리아(루시아 모니즈)를 흠모하게 된다. 하지만 말은 거의 한마디도 통하지 않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만다. 이후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제이미는 급기야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을 때, 포르투갈로 직접 그녀를 찾아가 멋진 고백을 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는 그 고백을 하기 위해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왔던 그였기에, 콜린 퍼스의 사랑 고백은 이메일이나 통화가 아니라 국가의 경계를 오가는 수준이었다. 자, 그런데 스탠리는 제이미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남부 프랑스로 떠나는 것은 같지만, 그곳이 스탠리에게 ‘힐링’의 장소가 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이 남자는 과거 콜린 퍼스가 연기한 그 수많은 남자들과 비교해도 정말 꽉 막혔다. 함께 마술을 하는 동료들을 두고 “원시인들과 일하자니 정말 힘들구나”라고 재수 없게 탄식하는 스탠리는, ‘만인 대만인의 투쟁’을 얘기한 토머스 홉스의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며, 추하고 잔혹할 뿐 아니라 짧다”는 말을 절대 신봉하는 사람이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그런 스탠리 혹은 콜린 퍼스를 조롱(?)하는 재미가 있다(어쩌면 그 스탠리의 모습에는 콜린 퍼스는 물론 우디 앨런 자신도 적당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소피의 영적 능력이 뜻하지 않게 스탠리의 지나온 생을 통째로 복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피는 스탠리를 보자마자, (소피가 절대 알 리 없는) 옛 여자친구 제니 얘기를 꺼내며 “지루하고 우울한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라고 말하고 스탠리는 흠칫 놀란다. 소피의 속임수를 낱낱이 밝히겠다며 의기양양했던 그가 되레 당한 것이다. 이후 스탠리는 소피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콜린 퍼스 특유의 로맨틱 코미디 무드로 흐른다. 그냥 익숙하게 보아오던 모습의 반복이지만 콜린 퍼스이기에 반갑다.

스탠리가 어려서부터 좋아하고 따랐던 바네사 이모(에일린 애트킨스)를 만난 자리에서 소피는 이모가 좌골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탈리아로 온천 여행을 다녀온 것까지 맞힌다. 그러자 스탠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집에 있는 멀쩡한 목욕탕을 놔두고 왜 이탈리아까지 가서 돈을 쓰고 와요?”라고 나무라고, 이모는 한숨을 쉬며 “옛날 동네 신부님께서 동네 아이들 중에서 얘(스탠리)만 지옥에 갈 거라고 얘기했어”라는 ‘흑역사’까지 들려준다. 게다가 이모가 직접 만든 맛난 케이크를 보고서 신나서 또 먹겠다고 말하는 소피를 보고는 “좀전까지 그렇게 먹고 어떻게 또 먹냐”며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물론 스탠리가 공격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소피의 어머니가 그를 두고 ‘짜증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을 때 소피는 “그렇긴 한데 나름 매력 있어요”라고 말하고, 이모는 “너는 다 좋은데 너무 고집불통”이라고도 말해준다. 그런 가운데 급기야 “이 세상에 저만 정상인가요?”라고 혼잣말을 하는 스탠리는 어딘가 우디 앨런 특유의 남성 캐릭터와 콜린 퍼스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를 향해 바네사 이모는 이 영화의 주제와도 같은 얘기를 건넨다. “항상 넌 너무 확신에 차 있었어. 우린 그저 불쌍하고 부족한 인간에 불과해.”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동안 사랑해온 콜린 퍼스의 모습은 어떤 ‘변화’의 과정에 있었다. 언제나 굳게 다문 입술에 딱딱해 보였던 그에게서 어떤 비밀을 발견하거나, 뒤늦게 생겨난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살짝 흐느적거리며 미소를 지을 때였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도 예상치 못한 사랑에 빠져버린 그는 꽃길에서 “이제야 꽃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됐다”면서 아이처럼 기뻐하고, 소피와 함께 들른 바에서 뻣뻣하게나마 춤도 춘다. 얼마 뒤, 성대한 파티가 열린 날 너무나도 예쁘게 꾸미고 나온 소피가 그에게 묻는다. “오늘 저에게 칭찬을 하지 않은 건 당신뿐이에요.” 그러자 스탠리의 대답. “미안해요. 이렇게나 예쁠지 상상도 못했거든요.” 영락없이 ‘남부 프랑스로 간 미스터 다아시’의 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보면 <싱글맨>과 <킹스 스피치>로 정점을 찍은 콜린 퍼스가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그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스파이 ‘빌 헤이든’은 뭔가 보여주기 힘든 비중이었고, <갬빗>(2012)에서 런던의 큐레이터이자 희대의 사기극을 설계하는 ‘해리 딘’ 또한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긴 했지만, 마치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2005)의 경우처럼 왠지 그가 ‘규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동시에 줬다. 그럼에도 2차대전 도중 일본군 포로가 되어 ‘죽음의 철도’로 불리는 타이-미얀마간 철도 부설 공사에 동원된 영국 장교의 실제 일대기를 다룬 <레일웨이 맨>(2013), 1993년 웨스트 멤피스에서 8살 소년 3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18년간 복역한 뒤 풀려난, 역시 실제 ‘웨스트 멤피스 3인조’ 사건을 영화화한 <데블스 노트>(2013)는 그 특유의 견고한 캐릭터가 사건의 무게감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10월 개봉예정인 매튜 본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는 잠재력 있는 청년들에게 스파이 트레이닝을 시키는 베테랑 비밀요원으로 출연한다. 그처럼 현재 콜린 퍼스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작품들과 연계돼 있으며, <매직 인 더 문라이트>를 통한 우디 앨런과의 뒤늦은 만남은 무척 상징적인 사건이자 어떤 기점이다. 소피를 통해 “정말 대단해! 삶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신비롭고 마법 같은 뭔가가 있어”라고 뒤늦게 자신의 오랜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고백하는 스탠리의 모습에는, 콜린 퍼스의 다이내믹한 현재가 투영돼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언제나 ‘역시 콜린 퍼스!’였다.

magic hour

남부 프랑스로 간 미스터 다아시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우디 앨런과 콜린 퍼스의 만남이라기보다 우디 앨런과 미스터 다아시의 만남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 싶다. 1995년 TV시리즈 <오만과 편견>에서 맡은 다아시 역은 그를 스타로 만들었으며,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도 그에 대한 ‘인용’처럼 역시나 다아시라는 이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심지어 지난해 런던 하이드파크에는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의 그 유명한 젖은 셔츠 장면을 기리는 높이 3.7m의 다아시 동상이 세워졌다). 말하자면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남부 프랑스로 간 다아시의 이야기이다. <러브 액츄얼리>(사진)에서도 그랬지만 남부 프랑스의 우아하고 고즈넉한 풍광은 그에게 언제나 ‘사랑’이라는 깨달음의 순간을 선사했다. 실제로 콜린 퍼스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혹은 ‘싫증이 날 정도로’ 남부 프랑스를 즐겨 찾아 휴가를 즐긴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스탭들은 촬영지가 있던 리비에라 해변에서 촬영과 무관하게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그의 모습을 수시로 감상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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