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서 꼴통짓 못하겠더라고요”
심재명 대표님. <버스, 정류장> 찍으면서 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 이건 거꾸로 똑같이 당하는 거다, 라고. 전에 <조용한 가족> <반칙왕> 프로듀서를 하면서 김지운 감독과 겪었던 마음고생이 그대로 오더라고.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해결될 수 없는 미묘한 관계. 프로듀서와 감독이라는 입장을 떠나 김 감독이랑 나랑은 정말 친한 친구잖아. 그래서 그땐 영화는 둘째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우정만은 깨지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 아닌 다짐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김지운 감독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직접적으로 할말도 돌려서 하고 필터를 거쳐서 나오고 그랬지. 그러니까 싸움이 날 만한 일도 싸움이 안 되는 거지.
심 대표도 그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가 또 그런 말 대놓고 하는 성격들도 아니니까. 특히 명필름과 그간 감독들의 관계형성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나름대로 자기검열이 있었던 것 같아. 사고도 치고, 잠수도 타고, 꼬장도 한번 부리고 그랬어야 하는 건데(웃음) 워낙 오래된 친구니까 오히려 더 꼴통짓을 못하겠더라고. 좋게 말하면 배려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접고 들어가고 하는 그런 것. 그게 어려운 점, 아니 미묘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
사실 <버스, 정류장>이라는 시나리오를 처음받고 연출을 결심한 뒤 프리프로덕션 때는 정말 스피드하게 모든 일이 진행되고 시나리오를 보는 방향이나 지점 등이 서로 같았고 명료했어.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현장에 있으니 나만 혼자 전쟁터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 안 들 수 없더라고. 그때서야 김지운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겠더라. 그 기분이 설명하자면 참 복잡한 건데. 촬영장에 거의 매일 심 대표가 오니까 이럴 때 친구라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안도와 동시에 부담스러움이 있고 또 한편 프로듀서가 어떤 부분은 좀 참견해줬으면 하는 기대 같은 게 있었나봐. 그런 게 가장 극대화됐던 시점이 엔딩장면 찍을 때인데, 기억하겠지만, 나 그때 정말 우울했잖아. 엔딩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앞의 이야기가 모호함으로 남느냐 아니면 그나마 설명되느냐가 결정되는 거였는데, 그 순간 막막하더라고.
한참 망설이다 밤늦게 전화를 해서 심 대표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했잖아. 그러고나니 진작 왜 이러지 않았을까? 막말로 데뷔감독이 당연히 자신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건데 왜 엔드지점까지 오게 됐나 하는 후회가 들었어. 그런데 나에게 그게 쉽지가 않았던 거예요. 가끔 심 대표 보며 오늘 술이라도 먹자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스스로 검열이 드는 거야. 이 사람 아무리 새벽이라도 일 때문에 만든 자리를 피하는 법이 없는데 나까지 술먹자고 피곤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루종일 일하다가 딸얼굴 볼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몇 시간 안 되는데 내가 그 시간을 뺏는다는 걱정 말이야. 일하는 여자들이 아이에게 갖는 또다른 희생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걸 아는데 나까지 그러면 되나. 그런 걱정까지도 섞여 있었어. 이런, 감독이 영화에 신경쓸 머리도 모자라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나 정말 문제많지?
“나라도 악역을 맡았어야 하는데”
제작자 심재명이 감독 이미연에게
이미연 감독님. 사실 영화사 대표가 아무리 프로듀서라지만 거의 매일 현장에 나가 있는 건 스탭에게나 감독에게 부담 아닌 부담이라는 것도 알아. 현장이 즐거워서 나간 건 솔직히 아니고, 뭐 재밌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절대 아니었고(웃음) 잘돼야 될 텐데 하는 책임 반 우려 반 그런 걱정이 컸던 것 같아. 그래서 딴 영화들보다 <버스, 정류장>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던 것, 나 인정해. 하지만 정말 친구 영화라서 괴로운 부분도 많았어. 혹시 내 친구가 찍는 영화라서 내가 판단이 흐려지진 않을까 중심을 잃는 건 아닐까 끊임없이 자책.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쿨하게 뱉어야 하는데, 말을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저래도 되나 망설이는 통에 그냥 타이밍 놓친 것도 많았고. 오죽하면 빨리 촬영이 끝났으면, 빨리 개봉했으면, 빨리 예전의 친구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을까.
며칠 전에 이은 감독이 그간 <버스, 정류장>에 대한 일종의 작업평가같은 걸 명쾌하게 내려줬는데, 우리 부부는 명쾌함에 목숨거는 사람들이니까 이해하세요, 그 말 듣고 그렇구나 했어. 이미연 감독은 명필름이라는 제작사에서 거기다 친구가 프로듀서니 뭔가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심 대표도 역시 친구란 이름의 감독에 대해 구체적이진 않지만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는. 물론 큰 문제가 생긴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순간순간 그런 기대 때문인지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어. 명료하게 깨놓고, 솔직하게 뭘 원하는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다가서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 가장 커. 작품 들어간 감독이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내가 아는데, 게다가 이 감독이 나처럼 전전긍긍하는 스타일이 아닌 걸 아는데, 나라도 두 사람 중에 악역을 맡았어야 했다는 생각, 더 치열했어야 된다는 생각이 지금 와서 가장 큰 후회로 남아.
연극하던 이 감독이 갑자기 연출을 공부하겠다고 훌쩍 파리로 떠날 때에도, 충무로 들어가 연출부 한다고 했을 때도 우리 같은 길 가게 돼서 너무 잘됐다거나, 쟤 왜 저러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 그런데 그거 알아? 아기낳고 영화관에 앉아 <초록물고기> 스크롤에 ‘스크립터 이미연’이라고 뜨는 글자를 보는데 벅차오른달까, 감격스럽달까, 여하튼 그 묘했던 기분은 지금도 잘 설명이 안 돼.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그냥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