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려 계속해서 코를 훌쩍이는 여배우. 컨디션 난조를 보인 인터뷰 당일, 여배우는 의상 선택에도 신중함을 보였고 메이크업에도 배로 신경을 쏟았다.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의상’을 주문했으나 그녀는 좀더 몸에 편한 옷을 택했다. 그리고 파운데이션은 잘 먹었는지 립스틱의 짙기는 적당한지 거울 속을 꼼꼼히 살폈다. 여배우에게 화장발, 카메라발은 중요하니까. 화장이 잘 먹지 않은 날 대개의 여자들은 외출이 두려운 법이니까. 입에 발린 얘기를 싫어하고 솔직한 화법을 즐기는 문소리는 털털함으로 이 바닥을 평정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카메라 앞에선 완벽하고픈, 아니 완벽을 기하는 여배우다. 프로페셔널의 아주 좋은 예랄까.
<관능의 법칙>의 미연은 자신이 프로페셔널한 주부라고 생각하는 여자다. 자식 다 키워 유학 보내놓고 남편(이성민)과 다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40대 주부 미연은 제 삶이 완벽하다고 믿는다. 남편이 비아그라를 복용하며 ‘의무방어전’을 치른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코믹 첩보물 <스파이>에선 남편의 정체를 몰라 고생하더니 <관능의 법칙>에선 남편의 마음을 몰라 고생이다. 고생한 보람이라면 한껏 물오른 코믹 연기로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힌 점일 것이다. 스스로 “배우할 팔자”라는 문소리는 연기를 통해 스스로 웃고 연기를 하며 남을 웃게 한다. 세상에 그만한 ‘팔자’가 또 있을까.
-<스파이> 홍보할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지난해 하반기에 대학원을 다녔더니 절로 빠졌다. <스파이> 홍보했고, <관능의 법칙> 찍었고, 대학원 다녔고, 강의 나갔고, 애도 키웠다. 그 사이 단막극도 한편 찍었는데 그때 밤샘 촬영했던 게 타격이 컸다.
-<관능의 법칙>은 만족스럽게 봤나. =만든 사람은 늘 아쉬운 것 같다.
-편집된 장면이 많았나. =한신 정도? 편집 때문이 아니라 과연 모두가 좋아할 만한 영화인가, 공감의 폭을 넓힌다는 게 뭘까, 상업적으로 만든다는 건 또 뭘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시나리오 읽을 때도 했던 생각인가. =시나리오 볼 때도 했고, 권칠인 감독님하고 중간에 술 진하게 마시면서도 했던 얘기고.
-미연은 남자한테 사랑받지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중산층 주부다. 문소리와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는 캐릭터 같은데. =(미연은) 자기 가치관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사는 인물이다. 보기 드물게 순진한 느낌이었달까. 결혼해서 애 낳아 키워보니 알겠더라. 옛날엔 애 키운다고 일 그만두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러라고 부모가 뼈빠지게 키워 공부시킨 건 아닐 텐데. 그러면 자아는 왜 찾고 자기계발은 왜 하는 건지 싶고.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한다. 자식,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삼시 세끼 밥 먹이고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지키는 게 대단한 일이더라. 영화 몇 편 찍는 것보다도 이게 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도 든다. 미연도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주부고, 미연은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거다.
-남편과의 베드신에서 메이드 복장을 하자고 한 건 본인 아이디어였다고 들었다. =시나리오에는 미연이 남편한테 하자고 할 때마다 와인을 딴다. 슬립 같은 거 입고. 그런데 일주일에 세번이면 일주일에 와인을 세병 따는 건데, 아니 결혼한 지 십몇 년이 지난 부부가 지금까지 와인을 딴다고? 너무 신혼 초 판타지 아냐? 부부는 안 그런다. 연애할 때나 분위기 잡지. 그런데 영화적으로는 이 여자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연구한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스페셜하게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코스튬 플레이를 떠올렸다. 의상이 여러 개 나왔다. 교복, 간호사복, 군복. 그런데 특정 직업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요즘엔 찾아보기 힘든 직업인 메이드로 갔다.
-노출 연기가 처음은 아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또 할 줄 몰랐다고? 계속할 건데. (웃음) <씨네21>이 아닌 다른 데서 이렇게 말하면 바로 제목 나오지. ‘문소리 노출 계속된다!’
-노출 연기를 하기까지 분명 예전과는 다른 차원의 고민을 했을 것 같다. =결혼해서 애가 있다는 게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바람난 가족>이 2003년 개봉했다. 영화 찍고 개봉할 때는 괜찮다. 영화가 있으니까. 그런데 개봉 뒤 영화가 사라지면 편집 영상만 남아서 돈다. 그것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나를 공격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그걸 10년 겪었다. 그러니 신중해지더라. 한국 사회가 너무도 저급하게 대중문화를 소화하는 걸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노출 여부가 영화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한때는 그렇게도 생각했다.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영화가 아니면 안 벗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내가 돈벌자고 벗는 거 아니잖나. 내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니고 네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작품성/예술성 따지는 게 무슨 큰 차이가 있나 싶더라. 결국 여배우로서 어떤 마음으로 한길을 걸어왔나 그게 중요하지.
<오아시스>의 뇌성마비 장애여성 공주와 <바람난 가족>의 바람난 아줌마 호정은 배우 문소리를 꽃피게 해주었다. 하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문소리의 바람은 꽤 오랫동안 그 두 작품에 발목 잡혀야 했다. “예전엔 다른 여배우들과 다르다는 얘기를 들으면 ‘뭐가 다르다고 그러지?’ 부정한 적도 있었다. 캐릭터는 캐릭터고, 예뻐 보이고 싶을 땐 예뻐 보이고 싶은 거고, 이런 욕망이 들 때도 있고 저런 욕망이 들 때도 있고. 종이 반장 차이 날까 말까 하는 건데 뭐가 다르다고 그러지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시작부터 주어진 롤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무식해 뵈는 김말순(<사랑해, 말순씨>),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 미숙(<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이상한 가족의 탄생을 목도해야 했던 미라(<가족의 탄생>), 통영의 관광해설가 왕성옥(<하하하>). 예뻐 보이는 건 애초에 포기해야 했던 작품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작품들이 문소리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그렇게 “한국영화가 이끄는 대로” 걸어온 지 15년. 문소리의 연기에 여유가 깃들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스파이> <관능의 법칙>을 보면서 평범한 장면인데도 코믹함을 불어넣는 솜씨가 일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유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은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스파이>부터 코믹한 작품을 두편 찍고 나니까 쓸쓸한 마음이 결결이 표현되는 영화가 당긴다. 달달한 거 말고 확 쓴 거! <우리 선희>에 나오는 대사처럼 들이파는 거 있잖나. (웃음) 너무 판 지 오래된 거 같은 거지. 파고 파고 또 파고 계속 들이파는 그 마음이 뭔가 싶고.
-데뷔 초 진지한 이미지의 배우였는데, 어느 순간 밝은 기운의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나를 강렬히 원하는 작품이 있으면 그 작품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밝아진 건 그 선택의 결과인 것 같다. 한국 영화계가 내 손 놓지 않고 잡고 가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디로 데리고 가도 괜찮다. 오지도 괜찮다. 손만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하하> 이후 배우로서 그리고 연기에 부쩍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아직 부족하다. 진짜 여유 있는 연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숀 펜만 해도 그냥 앉아만 있는데 대단하잖나. 그런 연기 보면 정말 부럽다. 난 아직도 애를 많이 쓴다. 애쓰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애쓰지 않아도 툭 뭔가 열리는 순간이 오길 바라고 있다.
-아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나. =내가 원하는 순간이 고난도의 경지인가보다. 그런데 제일 나쁜 건 다 채워지지 않았는데도 애쓰지 않는 거다. 어쨌든 다 채워질 때까지는 애를 써야 된다. 모자라도 넘쳐도 실은 계속 애를 써야 된다.
-어느 인터뷰에서 인간 문소리는 굉장히 평범하지만 배우로선 좀더 과감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배우가 아닌 삶에선 최대한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게 용감한 배우의 길을 가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내 연기의 특징 혹은 힘의 원천이 있다면 평범하게 살아온 내 삶이라고 생각한다. 26살에 데뷔하기 전까지 진짜 평범하게 살았다. 배우가 아니라 문소리로서 어떻게 살까 그 고민을 26살까지 했는데, 그게 배우가 되고서 연기를 하는 데 큰 힘이 된 것 같다. 너무 많은 욕망에 먹혀서 지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평범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다. 그게 나를 단련하는 길이기도 하고.
-성숙해졌을 때 비로소 평범함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래, 욕망아 나를 덮쳐라’ 하는 삶이 어떨 땐 부럽기도 하다. 화려하게 모든 걸 세게 누려보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를 남기고 가는 거지. 그런데 그것도 그릇이 돼야 하는 거고. 다들 어떤 경지를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나는 작품 하나하나 갈고닦아야 하는 타입인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두편으로 배우 데뷔한 문소리는 감독 복이 많은 배우다. 홍상수, 임상수, 임순례, 김태용 등 200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감독들의 작품에 문소리는 단골 출연했다. 영화감독(장준환 감독)을 배우자로 맞이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지난해엔 연출 공부도 시작했다. 연출에는 전혀 뜻이 없다고 했지만 감독 문소리의 등장이 기대되는 이유는 영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자꾸 떨어져서 불 좀 지펴보려고” 마흔에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문소리. 언제나 용감했고 앞으로도 계속 용감한 배우로 기억되지 않을까.
-가세 료와 함께 출연한 홍상수 감독의 신작은 언제쯤 볼 수 있나. =글쎄, 5월일 수도 가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홍상수 감독 영화는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해보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걸 느끼게 되니 정말 끊기가 어렵다.
-3월에 개봉하는 박찬경 감독의 <만신>에선 만신 김금화 선생의 중년을 연기한다. =<만신>은 얽힌 사연이 좀 있다. 그전에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단편 <파란만장>에 캐스팅돼 한달간 큰 굿당에 가서 굿을 배웠다. 그때가 유산하고 3개월쯤 쉬다가 다시 씩씩하게 활동 시작해야지 했을 무렵이다. (2010년) 11월에 촬영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촬영 당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왠지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며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눈물만 났다. 빼도 박도 못하고 영화를 펑크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양평 강가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강물에도 빠지는 장면이었는데 그건 할 수가 없잖나. 울면서 박찬욱 감독님이랑 통화를 했다. 감독님도 참 난감하셨을 거다. “허허허, 그래 축하하고, 근데 이걸 어쩌… 아 근데 축하하고, 허허허.” 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만신>을 안 한다 할 수가 없지. (웃음) 처음엔 무당 얘기라 이 자극적인 소재를 어떻게 다루시려는 건가 싶었다. 김금화 선생님의 책을 주셔서 읽는데 무당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됐다. 배우 마음이랑 참 비슷하더라. 누군가의 마음을 미리 안다는 건 신기한 능력이지만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을 대신해서 느끼고 표현해주고 풀어주는 건 배우와 같다. 한편으로 천대받았던 직업이기도 하고. 그 마음을 딱 알겠더라.
-무당 마음을 이해해서인지 어색함 없이 퍽 무당 같았다. =<파란만장> 때 굿 가르쳐줬던 선생님도 너무 잘 어울린다며 “배우해서 얼마 번다 그래, 이거 해” 스카우트 제의해주시고. (웃음)
-지난해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 들어갔다. 연출을 전공한다고. =연출에 뜻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다닌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구열이 생긴 건가. =언젠가부터 영화를 안 봐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영화로 먹고살고 있고 전문가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이건 문제다 싶어서 자극 받으려고 시작했다.
-배우다 보면 연출에 대한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전혀. 남편보다 잘할 자신이 없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도 그 이야기를 안 한다면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아직은 그런 이야기가 없다. 영화를 만드는 건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 거다. 연출에 정말 뜻이 있는 사람, 그 세계를 창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연출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감독이 창조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도 존재의 이유를 갖는다.
-그렇다면 배우할 운명도 따로 있는 건가. =배우도 팔자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안 살면 좀 힘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거겠지.